"한국 입시경쟁, 냉전시대 끝없는 '군비 경쟁' 같아"
입력 2019.02.10. 14:00 수정 2019.02.10. 14:03
“한국의 교육열은 냉전시대의 ‘군비 경쟁’을 떠올리게 한다.”
1월 30~31일 영국 옥스퍼드대 너필드칼리지에서는 ‘생애 주기별 시간 압박과 스트레스 : 한영(韓英) 비교 연구(Time Pressure and Stress through the Life Cycle: a UK-Korea Comparison)’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조너선 거슈니(Jonathan Gershuny) 옥스퍼드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과 영국 청소년의 시간 사용을 비교, ‘교육 압박(Educational Pressure)’이 청소년 일상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발표했다. 1월 31일 ‘주간동아’와 인터뷰에 응한 거슈니 교수는 “한국 청소년이 공부에 들이는 시간은 놀라운 수준을 넘어 기괴하다(grotesque)고 느껴질 정도”라고 말했다.
거슈니 교수는 사회과학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영국 여왕으로부터 훈장을 수훈 받은 저명한 사회학자로, 옥스퍼드대에서 생활시간연구센터(Centre for Time Use Research) 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그는 몇 해 전부터 한국의 입시 경쟁을 ‘끝없는 군비 경쟁’에 비유하며 깊은 우려를 표해온 인물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에선 명문대 진학을 둘러싼 갈등을 다룬 TV 드라마 ‘SKY 캐슬’이 큰 인기를 끌었다. 한국의 입시 경쟁을 어떻게 보나.
“비정상적으로 과도하다(Essentially Pathological)고 생각한다. 학력 집착은 능력을 중시하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실력 위주 사회)에 대한 믿음에 기반을 둔다. 실력 위주 사회는 일견 공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문제가 많다. 우선 학력을 두고 군비 경쟁 같은 논리의 끝없는 경쟁이 발생한다.”
사교육을 군비 경쟁에 비유하는 건가.
2018년 11월 15일 서울 중구 이화여고 수능 고사장에서 수험생들이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있다. [동아일보]이미지 크게 보기
“그렇다. 상대가 전함을 만들 것이라는 두려움에 우리도 전함을 만드는 거다. 상대는 우리 전함을 보고 실제로 전함을 만들고, 그러면 우리는 추가로 전함을 만들어야 하고…. 결국 경쟁이 가속화된다. 한국 부모들은 ‘다른 집 아이가 사교육으로 더 앞서 나갈지도 모른다’ ‘우리 아이만 뒤처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사교육에 돈과 시간을 투자한다. 이를 본 다른 부모들도 교육에 투자하고, 다들 지지 않으려 점점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첫 번째 문제점이다.”
다른 문제점도 있나.
“좀 더 심각한 문제는 그다음에 온다. 서로 경쟁하다 보면 결국 더는 버틸 수 없는 시점이 온다. 상대가 겨우 좀 더 버텨서 이기면 자신을 패배자로 여긴다. 자신이나 부모가 충분한 능력(Merit)을 쌓지 못했다며 원망하고 자기혐오(Self-Loathing)에 빠질 개연성이 높다. 능력에 대한 판단 기준이 선망하는 대학에 들어갔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에 입시에 실패하면 곧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다.”
‘나는 옥스브리지에 가지 않을 거야’
영국 입시 분위기는 어떤가.
“상류층은 돈이 매우 많이 드는 스페셜 엘리트 아카데미에 자녀를 등록시킨다. 옥스브리지(옥스퍼드대와 케임브리지대를 함께 부르는 명칭)에 진학시키려고 자녀가 9, 10세일 때부터 사교육을 시키기도 한다. 이튼, 해로, 윈체스터 같은 사립고교에 입학시키려 애쓰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극히 일부다. 대부분은 옥스브리지가 귀족적 이미지를 가질 뿐, 다른 대학에 비해 ‘실질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영국민의 상당수가 ‘나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 가지 않을 거야. 거만한 녀석들만 가득하거든’이라고 말한다.”
일부 상류층을 제외하고는 옥스브리지에 진학할 형편이 되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 아닌가.
“그렇지 않다. 정부가 다양한 사회계층의 옥스브리지 진학을 지원해도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런던정경대, 맨체스터대, 브리스틀대, 노팅엄대 등 많은 대학이 옥스퍼드대나 케임브리지대와 마찬가지로 좋은 교육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도 대입을 향한 경쟁은 있지만, 한국처럼 스카이(SKY) 대학을 정점에 둔 하나의 서열을 놓고 이뤄지는 경쟁은 아니다. 다양한 대학이 있고, 이들이 다각적 서열(Multidimensional Status Hierarchy)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 한국과 다른 점이다.”
옥스브리지 출신이 아니어도 괜찮다?
“법정 변호사가 된다거나, 보수당에 입당한다거나, 정계에 진출하는 데는 옥스브리지를 졸업하는 것이 좀 더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밖의 직업에서는 옥스퍼드대나 케임브리지대 졸업이 다른 대학보다 더 유리하다고 볼 수 없다. 공영방송 BBC는 50년 전쯤에는 옥스브리지 출신만 채용했지만, 그 후에는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이들을 선발해왔다. 상류층 자제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젊은이들을 활용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하위권 대학 출신이라도 BBC에 취업할 수 있고, 옥스퍼드대 출신이라도 BBC 채용에서 탈락할 수 있다.”
‘메리토크라시’의 허상
거슈니 교수는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라는 한 가지 기준으로 사람의 역량을 측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틀렸다”며 자신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신은 공부를 아주 못한 학생이었고, 걸핏하면 학교를 빼먹고 숙제도 안 한 말썽꾸러기였다고 한다. 그는 “시험 성적이 좋지 않아 그다지 순위가 높지 않은 대학에 진학했는데, 갑자기 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역시 서열이 높지 않은 대학원에 진학했다”며 “거기서 정말 연구를 잘했고, 결국 옥스퍼드대 교수가 됐다”고 했다. 그는 “내 사례는 사회가 성취를 향한 다양한 경로를 갖추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영국에서는 대학 서열이 획일화돼 있지 않기 때문에 좋지 않은 대학에 진학했다고 트라우마가 생기거나 자기혐오를 갖게 될 개연성은 낮으며, 따라서 삶의 어느 시점에서든 성취를 향한 노력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과도한 경쟁을 해소하고자 대입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쪽으로 논의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SKY 캐슬’을 계기로 학종(학생부종합전형) 위주의 현 입시 제도가 과연 공정한가에 대한 논란이 뜨거운 것이 그 예다.
“학벌이라는 한 가지 기준으로 능력을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아무리 입시 제도를 공정하게 바꾼다 해도 상류층은 결국 자신의 자녀를 경쟁에서 승리하게 할 방법을 찾아내고 만다. 메리토크라시라는 말을 만든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1961년 쓴 소설에 이러한 상황이 생생히 담겨 있다. 사람들이 한 가지 목표를 위해 경쟁한 뒤 그것을 얻지 못했다고 해서 실패라는 느낌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다.”
마이클 영은 소설 ‘능력주의 사회의 부상(The Rise of Meritocracy 1870-2033: An Essay on Education and Equality)’에서 2033년의 미래를 상정하고 노동당 정부가 1960년대부터 공정한 입시를 위해 온갖 종류의 교육 개혁을 실시해온 상황을 묘사한다. 사립학교 때문에 계층 간 경쟁이 불공정하니 사립학교를 없앤다. 그러자 부자 학부모들은 사교육 등의 방법으로 자녀를 좋은 학교에 보낼 방법을 찾아낸다. 몇 번의 개혁 끝에 정부는 영·유아 시절부터 공정하게 키워야 한다며 유치원 교육을 개선하려고 한다. 그러자 부유층은 또 다른 대안을 찾아낸다. 소설에는 결국 하위계층 자녀들을 중산층에 입양시키자는 안까지 등장한다.
거슈니 교수는 “실력(Merit)은 타고난 능력과 노력의 합으로, 실력 위주 사회란 이러한 가정 하에서 본인이 갖춘 실력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례로 공부를 잘해 서울대 의대에 진학해 의사가 되면 사회·경제적 성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실력은 부모의 지위, 정보, 재력 등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으므로 순수한 의미에서 실력이라고 하기 어렵다. 학벌에 대한 보상이 과하지 않도록 사회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거슈니 교수가 발표한 한국과 영국 청소년의 시간 사용 비교 연구에 따르면 영국 학생들이 학업에 쏟는 시간은 한국 학생 대비 74% 수준에 불과하다(그래프 참조). 이 차이는 고학년으로 갈수록 더 커진다. 17세 영국 청소년이 하루 6.9시간을 공부와 학교 관련 활동에 사용하는 데 반해, 같은 연령의 한국 청소년은 11.5시간을 사용한다.
하루 4시간 이상 더 공부하는 한국 청소년
연구 결과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한영 청소년 간 시간 사용 차이는 놀라운 수준을 넘어 기괴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한국 청소년은 영국뿐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매우 많은 시간을 학업 활동에 쏟아붓는다. 군비 경쟁처럼 비합리적인 양의 노력을 소요하는 것이다. 물론 한국 청소년은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높은 점수를 획득한다. 그러나 높은 PISA 점수를 획득하는 것이 국가의 경제발전에 얼마나 기여하는가, 과연 그만한 희생을 치를 가치가 있는가, 무엇보다 그렇게 높은 점수를 얻고자 치르는 정신적 비용을 개인과 사회가 과연 감당할 가치가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청소년기에 학업에 많은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어떤 영향을 미칠까.
“청소년기에 수면시간과 운동, 놀이 등 활동시간이 적은 만큼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성인이 된 뒤에도 항상 일 중심으로 사고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교육과 경쟁에 너무 많은 것을 투자해왔기 때문에 출산이나 육아 등을 선택하기가 매우 어려울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마이클 영의 소설에서도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중산층 여성들이 출산파업(Birth Strike)을 선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를 낳느라 학교와 직업을 포기할 수 없다는 거다.”
최근 한국에서도 그와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면 육아 휴직, 유연한 근무시간 등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한국처럼 교육에 너무 많이 투자하면 남성과 여성 모두 높은 기회비용 때문에 직장 대신 출산·육아를 선택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에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공정한 입시 제도를 만드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소수만이 거머쥘 수 있는 학벌 성취에 모두가 자원을 쏟아붓지 않도록 사회적 보상 체계를 개선해야 한다. 대학 서열의 다각화(Multidimensional Status Ordering)를 비롯해 사회적 성취에 이를 수 있는 학벌 외의 다양한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다.”
전지원 토론토대 글로벌사회정책연구센터 연구원 latermotherhood@gmail.com
자료 | Jonathan Gershuny, ‘First steps in comparing educational pressures on UK and Korean Young People’, 2019이미지 크게 보기
<이 기사는 주간동아 1175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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