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7일자 파이낸셜뉴스 인터넷판 남형도 기자의 보도 “시각장애인의 꿈은 ‘안마사’가 아니에요”
"책을 통해 그들의 '눈'이 되다" 한국점자도서관 육근해 관장
"많은 시각장애아들이 어려서부터 '난 안마사가 될거야'라고 말합니다. 수학자, 과학자도 얼마든지 될 수 있는데 말이죠. 시각장애인들은 굉장히 논리적이고 암기력도 좋거든요."
세상의 빛을 잃은 이들이 마음의 빛마저 잃는게 걱정 됐을까. 한국점자도서관 육근해 관장(50)의 말에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그는 보이지 않아도 읽고 생각하고 꿈꿀 수 있다고 믿어 외길을 걸어왔다. 바로 한 권의 '책'을 통해서다.
육 관장의 부친 고(故) 육병일 관장은 우리나라 최초로 점자도서관을 세웠다. 그는 10살 때 시력을 잃어 시각장애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1969년 사재를 털어 점자도서관을 세우고 책을 만들었다. 당시 일곱살 아이였던 육 관장은 그런 아버지를 모시고 이 곳 저 곳을 함께 다녔다.
"시각장애인들이 사회적으로 굉장히 냉대를 받던 시기였어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아우 장님 재수없어'라고 말했죠. 다방에 가면 소금 뿌리면서 쫓아내고, 버스나 택시를 타는 것도 하늘에 별따기였습니다." 육근해 관장은 당시 기억을 이렇게 떠올렸다. 고(故) 육병일 관장은 시각장애인들이 이렇듯 천대 받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책을 통해 시각장애인들이 공부할 기회를 주고, 나아가 스스로 살아갈 길을 열어주고 싶어 종로 일대에 도서관을 세웠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났지만 육 관장이 느끼는 현실은 여전히 아쉽다. "복지가 급성장했지만 아직도 '빵'을 어떻게 던져줄까를 고민해요. '빵'을 스스로 만드는 방법을 알려줘야 하는데 말이죠." 그는 시각장애인이 다양한 직업을 통해 사회적 리더로 활약하는 모습을 꿈꾸고 있었다. 인터뷰 도중 육 관장이 건넨 책 한 권엔 그런 그의 바람이 잘 담겨 있었다.
가로가 긴 책의 왼쪽에는 주황색 바탕에 글자가, 오른쪽에는 독수리 모양의 스티커 라벨과 깃털이 달려 있었다. 독수리를 설명하는 장면이었다. "깃털은 하늘을 나는 독수리에게 정말 중요한 존재야." 비장애인도 책을 볼 수 있도록 점자와 묵자(일반 글자)를 함께 인쇄했다.
"시각장애인과 친구들이 함께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동질감을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장애인은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친구도 나처럼 책을 읽는구나. 똑같구나' 생각하도록 말이죠. 점자와 묵자책을 따로 만들면 서로 소통할 수 없게 되거든요." 육 관장에게 책은 지식과 사고를 전달하는 수단을 넘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소통하기 위한 '매개체'였다.
책 오른편엔 독수리 모양의 스티커 라벨과 깃털들을 달았다. 독수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또 깃털은 어떤 촉감인지 알게하기 위함이었다. 눈을 감고 책을 만져봤다. 상상 속에서 독수리가 깃털을 날리며 하늘로 힘차게 날아 올랐다.
생각하는 책들을 직접 만들고 싶어 출판사도 세웠다.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된 < 도서출판 점자 > 다. "시각장애인 뿐 아니라 다문화 가정, 정신지체 장애인, 노인 등 독서장애인의 비율이 20% 정도 되요. 이 분들에게 필요한 다양한 책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런 노력을 인정 받아 최근에는 서울시로부터 우수 사회적 기업인 '더착한 서울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1년간 출판되는 책 5만종 중 점자책의 비중이 2%를 채 넘지 못할만큼 관심이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점자도서관, 출판사를 함께 운영하는데 늘 재정상 어려움이 많다. "정부로부터 예산의 20~25%가 나오고 나머지는 후원으로 간신히 운영되는 실정이라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죠. 기계도 노화돼 바꿔야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3년차라 지원도 곧 끊기기 때문에 성공한 사회적기업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도서관이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도 문제다. "국립장애인도서관이 없어요. 전부 사립이고 정부의 제도권 바깥에 있죠. 민간도서관이 각자 움직이고 점자책을 중복 제작합니다. 그러니 책이 부족해 예컨대 대학에 다니는 장애인 학생들은 4년간 자료를 어떻게 확보할 지 항상 고민해요. 중앙에서 집중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민간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기 때문에 정부가 나서야 하죠."
외국의 장애인 도서관을 직접 방문하고 공부해 한국에 맞는 모델을 찾으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미국과 스웨덴의 경우 모두 국립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민간인 경우도 예산을 거의 다 지원받죠. 국가가 나서서 만들고 각 지역의 장애인 도서관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춰야합니다."
육 관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역시 '문화'를 통해 바꾸는 것이다. "책을 통해 자연스럽게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키워나가야 해요.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책을 읽으면서 장애를 이해하고, 인권을 생각하고, 내 친구라 여기고, 삶 속에 자연스레 배어 문화로 자리잡는거죠. 그럴 때 장애인들이 책을 통해 마음과 생각이 풍요로워지고 삶의 만족도가 높아질거라 생각합니다."
그에게 있어 '보람'은 역시 만든 책을 보고 시각장애인들이 행복해 할 때다. "장애인 분들과 부모님들이 책이 정말 좋다, 보기 편리하다, 고맙다 이런 이야기를 하실 때 굉장히 보람을 느껴요. 그동안 힘들었던 시간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죠." 지난 2008년부터는 책을 들고 시각장애인들을 찾아가는 '북버스'를 시작했다. 앞으로도 미래형 도서관을 발전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예정이다.
인터뷰를 마친 후 우연히 찾은 육근해 관장의 블로그 제목은 다름 아닌 '함께 사는 세상'이었다. 커서가 향하는 곳곳에서 장애인과 함께해 온 그의 흔적이 느껴졌다. 그러던 중 육 관장이 인용한 한 책 속의 글귀가 기자의 눈길을 끌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노부유키에게 색은 '사과의 빨강', '바나나의 노랑'처럼 가르쳐야 했다. 그러자 노부유키는 "그럼 오늘은 바람이 무슨 색이야?"하고 물었다. 노부유키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에 색이 있다면 바람에도 똑같이 색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 오늘은 바람이 무슨 색이죠?- 쓰지이 이츠코 著 >
책을 통해 장애인들의 문화와 생각,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그의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humaned@fnnews.com 남형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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