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검찰총장님께
저희는 "법률전문가로서의 이론과 실무를 연구·습득하고 높은 윤리의식과 국민에 대한 봉사정신을 함양함으로써 법치주의의 확립과 민주주의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법조인을 양성함을 목적"으로(법원조직법 제72조의2) 과분한 국비를 받으며 사법연수원에서 수습을 받고 있는 사법연수생들입니다. 1년여 기간 이론적인 수련을 거쳐, 지금은 검찰을 포함한 법원, 변호사 등 법조 각계에서 저희가 배웠던 법이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배우고 있습니다.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검찰청법 제4조 제1항)로서, 법치(法治) 그 자체를 상징하는 기관입니다. 헌법과 검찰청법은 검사에게 범죄수사, 공소의 제기 및 그 유지뿐만 아니라 법원에 대하여 법령의 정당한 적용을 청구하도록 하는 막중한 권한을 위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검사님들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성숙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 자리에 계셨던 것을 저희는 기억합니다.
지난 대선 직전부터 최근까지 국가정보원과 서울지방경찰청에서 일어났던 불행한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저희는 이 일들이 수많은 법조 선배들이 오랜 기간 동안 피땀 흘려 닦아 놓은 민주적 기본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검찰이야말로 바로 지금 헌법과 법치의 이름으로 이 일련의 사건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관이며, 이와 유사한 불행이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기관이라는 믿음으로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1. 국가정보원장의 위법행위에 관하여
최근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에 따르면,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은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국정원 직원들이 인터넷 사이트 수십 곳에서 수백 개의 아이디를 동원해 특정 후보를 지지·반대하는 댓글 1천760여건과 댓글에 대한 찬반 표시를 올리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저희는 먼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지키기 위하여 대공(對共), 대정부전복(對政府顚覆) 등과 관련된 국내ㆍ외의 보안정보를 수집하는 것 등을 그 직무로 하는(국가정보원법 제3조) 국가정보원이 직접 국내에서 자신들의 편향된 의견을 조직적으로 배포하는 것 그 자체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위법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는 헌법 제7조가 상정한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공무원제도와, 직업공무원제도의 핵심인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국가정보원은 대통령의 직속 기관이고(국가정보원법 제2조) 내란의 죄 등에 관하여 특수사법경찰관리의 역할을 수행하는(같은 법 제16조) 막대한 권력을 가지며, 국회에서도 정보위원회에 의하여만 통제를 받는(국회법 제37조 제1항 제15호) 폐쇄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가정보원이 국내 특정 정치세력을 조력하는 일은 특히 위와 같은 국가정보원의 권력과 폐쇄성 때문에 더욱 위험하며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대의제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우리 헌법의 통치구조에서 선거제도는 통치기구의 조직원리(헌법재판소 1996. 3. 28. 자 96헌마9 결정)이며, 선거제도는 기본적 인권의 존중, 권력분립, 의회제도, 복수정당제도,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골간으로 한 경제질서 및 사법권의 독립과 함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근간을 이루는 것입니다(헌법재판소 1990. 4. 2. 자 89헌가113 결정). 국민이 선거에 대하여 가지는 신뢰는 주권자인 국민이 통치기구에 대하여 부여하는 민주적 정당성의 핵심입니다.
국가정보원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절차에 개입하는 것은 헌법상 최고 통치기구인 대통령에 대한 민주적 정당성을 훼손하는 헌정 문란의 범죄라는 점을 검찰총장님께서 충분히 감안하시어 이 사건을 정당하게 처리하여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2. 서울지방경찰청의 위법행위에 관하여
서울지방경찰청 디지털증거분석실 자체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녹화 영상이 공개되었습니다. 대선 개입 혐의를 받고 있던 국가정보원 직원에 관한 수사에서,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의 지시에 의해 수사기록들이 증거를 남기지 않는 수기로 이루어졌고, 김 청장은 위 증거분석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고서도 자료를 모두 폐기하도록 지시하였다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김 청장은 선거 3일 전인 2012. 12. 16. "양당 후보에 대한 비방·지지 게시글이나 댓글을 게시한 사실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국가경찰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공정·중립을 지켜야 하며, 부여된 권한을 남용하여서는 아니됩니다(경찰법 제4조). 범죄사실을 발견하고서도 증거를 은폐하고 스스로 도출한 결론과도 다른 발표를 하는 것은 검사와 함께 범죄 수사라는 중대한 임무를 부여받은 사법경찰관들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으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입니다.
저희는 검찰이 "경찰의 수사권한 남용으로 인한 인권침해의 폐해를 시정하고 수사기관의 사법적(司法的) 성격을 회복하기 위해 검사로 하여금 경찰수사를 지휘, 통제케 하고 인권옹호기관으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았다고 배웠습니다(검찰실무Ⅰ, 2012, p3.). 수사기관에 대해 심각하게 훼손된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고 수사기관이 실체진실 발견과 인권 옹호라는 본연의 임무를 다할 수 있도록 검찰총장님께서 이 사건을 철저하게 규명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3. 저희는 이상과 같은 이유로 다음과 같이 의견을 개진합니다.
1.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에 대해 엄정한 공소유지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법조 후배들은 어떠한 외압에도 굴하지 않으시고 이번 사건을 수사하셔서 원 전 원장과 김 전 청장을 기소하신 검사님들의 지켜보며 그 노고와 용기에 대하여 깊이 감사하고 응원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결코 선처되어서는 안 될 매우 중대한 헌정파괴 범죄임을 감안하시어 우리 사법체계가 상정하고 있는 합당한 처단을 받을 수 있도록 끝까지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1. 이 사건에 관여한 국가정보원 직원 및 경찰들에 대하여도 그에 합당한 처분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관은 (……) 명백히 위법 내지 불법한 명령인 때에는 이는 벌써 직무상의 지시명령이라 할 수 없으므로 이에 따라야 할 의무가 없"으며(대법원 1999. 4. 23. 선고 99도636 판결), 상관의 위법 내지 불법한 명령에 따라 범한 범죄는 정당행위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 대법원의 확립된 판례입니다. 국가정보원장이 직원에게 현실 정치에 관여하는 게시글을 조직적으로 남기게 하는 것 또는 지방경찰청장이 소속 수사관들에게 수사기록을 폐기하고 수사결과와 다른 수사보고를 하게 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명백히 위법 내지 불법한 명령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국가정보원 직원들과 서울지방경찰청 경찰들도 그들이 행한 헌정문란행위에 관하여 반드시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1. 과연 원세훈과 김용판 두 사람이 이 사건의 핵심인지, 그렇지 않다면 이 사건에 관여한 다른 국가기관이 있는지를 명확히 수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사건의 중대성, 그리고 사건 발생 과정에서 드러난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며 국민들은 과연 이 사건의 핵심이 국가정보원이나 서울지방경찰청인지, 아니면 이 사건에 관여한 또 다른 국가기관이 있는지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검찰이 철저히 수사하시어 국민들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혹여나 이 사건에 개입된 또 다른 기관이 있다면 그와 관련한 자들에 대하여도 엄중하게 처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 이 사건을 통해 법치주의와 민주적 기본질서의 자생능력을 보여 주시고 헌법질서를 회복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민주주의는 살아 있는 생명체와도 같습니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겪으면서 통치기관과 국민은 그 대응의 방식을 터득하고, 그렇게 터득한 방식으로 다음 위기에서도 대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희는 이번 사태가 올바르게 해결됨으로써 민주적 기본질서와 법치주의가 제자리를 찾고 차후 헌정문란 범죄의 유혹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한 경고를 해 줄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합니다.
법은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입니다. 법이 최후의 보루로서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할 때, 통치기관은 월권을 휘두르게 되고, 국민들은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기 마련입니다. 저희는 저희가 공부하고 있는 법이 이 사회의 병폐를 치료하고 이 사회에서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것들을 지켜 내는 힘이 있다는 것을 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확인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 7. 4.
제43기 사법연수생 95명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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