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오늘 일제는 조선공립소학교 관제를 공포했다. 3·1운동 이전 일본 아동은 6년제 소학교를 다녔지만, 우리 어린이는 4년제 보통학교를 다녔다. 1919년 취학률은 조선인 3.7% 대 일본인 91.5%로 그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컸다. 1936년이 돼서도 조선 어린이는 넷 중 한 명만 교육받을 수 있었다. 고등교육으로 갈수록 차별은 더 심했다. 일본인은 전체 인구의 2.9%에 불과했지만, 경성제국대학 재학생의 63%를 점했다. 식민지에 살더라도 일본인은 교육 기회와 내용에서 본토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반면 조선 사람들은 철두철미 차별당했다.
사진은 1927년 6월에서 1930년 9월까지 3년 이상 자기 키보다 큰 지게를 짊어지고 학교 뒷산 비탈면 깎기 작업 중인 학동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노역에 시달린 까까머리 학동들의 고단한 어깨가 식민교육의 본질을 잘 말해준다. “교육은 국가의 백년대계이며 반도 통치의 성쇠를 좌우하는 관건이다.” 나라를 앗긴 지 1년 뒤 일제는 식민지배 성공을 위한 ‘조선교육령’을 포고했다. 충량한 신민(臣民), 말 잘 듣는 노예 만들기가 그 요체였다.
어떤 이는 일본의 식민교육 덕에 우리 교육이 근대화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해방 후 산업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강의 기적’을 꽃피운 씨앗은 일제가 아니라 1900년대 애국계몽운동을 이끈 이들이 심었다. 1905년 이후 민족의 미래에 투자하는 근대학교 설립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1910년 무렵에는 공립과 사립을 합쳐 2400개 교를 헤아렸다. 신학문을 가르치는 서당과 야학도 우후죽순처럼 돋아났다. 그러나 일제는 ‘사립학교규칙’(1911)과 ‘서당규칙’(1918) 같은 교육규제 법규를 만들어 자생적 교육 근대화 노력을 좌절시켰다.
일제가 근대 교육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민화 교육도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945년 조선의 문맹률은 일본보다 3배나 높은 78%였다. 그러나 나라를 되찾은 지 불과 10년이 못 돼 문맹이 사라지는 교육 기적을 일어났다. 그 시절 대학은 상아탑이 아닌 우골탑(牛骨塔)으로 불렸다.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끌어 낸 주동력은 우리 민초들의 교육열이었다. 우리의 성공신화는 논밭은 물론 생명보다 귀한 소마저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바친 어버이들의 희생을 딛고 쓰인 것이다. 늙은 농부네 워낭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https://news.joins.com/article/3546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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