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평론가로 왕성한 문학평론 활동을 했으며 영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이런 경력이라면 전형적인 ‘서재형’ 지식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금 다르다. 그는 ‘소수 기득권의 배타적 이익을 거부하고, 인간답고 지속가능한 공생의 논리를 모색하는 데 기여하자’는 신념으로 27년간 잡지를 발행했다. 그는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71)이다.
한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차용’했음직한 <녹색당 선언> 머리말을 쓰고, ‘당원 동지들에게 드리는 글’ 등을 쓴 체제변혁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실제 지난 촛불혁명 과정에서 신문에 ‘시민의회를 구성하자’는 칼럼을 쓰며 시민을 ‘선동’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로부터 ‘과격하다’ ‘비현실적이다’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주장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꾸준히 이어져 왔으며, 김 발행인 삶의 연장선상에 있다.
‘평화의 길’ 설립준비위원장 맡아
김 발행인이 최근 ‘감투’를 하나 맡았다. ‘평화의 길’이라는 평화·통일운동 단체 설립준비위원장이다. 이사장 명진 스님과의 오랜 인연 때문에 맡았다. 그와 명진 스님의 인연은 40년 가까이 된다. 그는 “1980년대 초부터 영남대 교수 몇몇과 해인사 젊은 스님들과 자주 어울렸다”면서 “전두환이 군홧발로 절을 유린한 법란에 항의해 벌인 해인사 승려대회에서 명진이 명연설을 하며 최초로 두각을 나타냈다”고 말했다.
김 발행인이 최근 ‘감투’를 하나 맡았다. ‘평화의 길’이라는 평화·통일운동 단체 설립준비위원장이다. 이사장 명진 스님과의 오랜 인연 때문에 맡았다. 그와 명진 스님의 인연은 40년 가까이 된다. 그는 “1980년대 초부터 영남대 교수 몇몇과 해인사 젊은 스님들과 자주 어울렸다”면서 “전두환이 군홧발로 절을 유린한 법란에 항의해 벌인 해인사 승려대회에서 명진이 명연설을 하며 최초로 두각을 나타냈다”고 말했다.
‘평화의 길’은 화해와 평등, 나눔과 연대, 깨달음과 치유를 위해 대중과 함께 걸으려고 만드는 단체이다. 구체적으로 ▲남북 화해와 협력, 한반도 평화를 위한 학술·사회·문화 교류의 길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사회와의 평화를 위한 연대의 길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 피해자 치유를 위한 사회참여 지원의 길 ▲평화와 통일, 수행과 실천, 나눔과 연대를 위한 교육·출판 캠프 학교 등 교육 홍보의 길 ▲‘평화의 길’의 지향과 부합하는 세상의 모든 길을 모토로 내걸었다. 지난 7월부터 준비를 시작해 11월 5일 창립대회를 가진다.
-김 발행인이 추구해온 녹색의 길과 평화의 길은 ‘더불어 살자’는 측면에서 같은 길 아닐까.
-최근 한반도 문제를 ‘한반도가 안보논리라는 근원적인 질곡으로부터 흔쾌히 벗어나는 게 가능할지 아직은 상당히 불안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재인 대통령의 뜻은 좋은데, 주변 사람들이 대통령의 뜻을 살릴 실력과 비전을 갖고 있느냐가 문제다. 선거 때문에 늘 단기적으로만 생각하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거나 집행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요한 갈퉁(노르웨이 평화학자)이 DJ 취임식 때 와서 국제통화기금(IMF) 빚 빨리 갚으려 하지 말고 에너지와 식량문제 등 근본문제에 주력하라고 했는데 안 됐다.”
-요즘 숙의민주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이제 시민운동을 한 몇 사람이 제도를 바꾸는 시대가 아니다. 공론문화가 활발해지고, 생활 속에 정착돼야 한다. 문 정권 들어서 원전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숙의민주주의를 시도했다는 것은 높게 평가한다.”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 시민이 주체가 된 의사결정 구조, 즉 시민의회를 구성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때 최장집 교수 같은 이는 국회로 수렴해야 한다, 제도권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그런 주장이 논리적 모순이라고 봤다. 국회가 제 역할을 했다면 왜 시민들이 촛불을 들었겠나. 몽골이나, 아이슬란드처럼 시민의회를 구성해 헌법 개정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때 지식인들이 토론을 통해 시민의회를 공론화시켰어야 했는데, 지식인들이 시민을 못 따라갔다.”
“그때 최장집 교수 같은 이는 국회로 수렴해야 한다, 제도권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그런 주장이 논리적 모순이라고 봤다. 국회가 제 역할을 했다면 왜 시민들이 촛불을 들었겠나. 몽골이나, 아이슬란드처럼 시민의회를 구성해 헌법 개정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때 지식인들이 토론을 통해 시민의회를 공론화시켰어야 했는데, 지식인들이 시민을 못 따라갔다.”
김 발행인의 시민의회 구성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과격’ 혹은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더 이상 논의되지 못했다. 아마 사람들은 시민의회 구성을 통한 개헌에 대해 과거 1986년대 민주화·학생운동이 추구했던 ‘제헌의회 그룹(CA)’을 떠올렸을 수도 있다. 당시 CA그룹은 한국 사회의 당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혁명을 통한 전면적인 국회 해산과 제헌의회 소집을 주장했다. 당시 권위주의 정권은 이를 모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했지만 나중에 민주화운동으로 복권됐고, 그 중 현직 국회의원으로 있는 사람도 있다.
사실 ‘지속가능한 공생’을 선도적으로 추구하는 주장은 처음에 ‘과격’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자본주의를 신봉하거나 신자유주의에 익숙한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발전했다. 소득과 자산 수준에 관계없이 모든 개인에게 지급하는 ‘기본소득’이 좋은 예다.
-<녹색평론>과 녹색당이 주창한 기본소득 개념이 이제는 보수정당도 받아들이는 일반적 개념이 됐다.
-<녹색평론>과 녹색당이 주창한 기본소득 개념이 이제는 보수정당도 받아들이는 일반적 개념이 됐다.
“나는 농민 기본소득을 먼저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망해가는 농촌과 농민을 살리고 청년 일자리를 늘리는 유일한 방법이다. 수도권 청년들이 농촌으로 가고 싶어도 지금은 막연하다. 농민이 수입이 생기면 지역에서 소비하고, 지역 시장이 살고, 학교도 산다. 농촌에 문화시설이 생기고 사람이 정주하면 일자리도 늘어난다. 그동안 농촌문제에 여러 가지 방법을 썼지만 예산만 낭비했다. 농업 기본소득은 간단하면서도 확실히 농촌을 살리는 길이다. 게다가 농산물의 70~80%를 수입해 먹는 나라가 자주권을 운운하기 어렵다.”
-녹색당 창당작업을 하면서 “정당 만들기가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고 토로했다. 녹색당도 열심히 활동하지만 기대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는 것 같다.
“현행 선거제도에서 새로운 비전을 가진 이념정당이 국회에 진출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게 첫째 문제다. 그리고 녹색당은 ‘성장’을 중단하지 않으면 지속가능한 사회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펴는 정당이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성장중독증에 걸린 사회에서 유권자의 표를 얻기가 어렵다. 독일에서도 녹색당이 사민당과 연정에 참여하면서 창당정신을 많이 상실했다. 그래서 녹색당 창당의 핵심 멤버들은 나중에 녹색당에서 탈퇴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요구하는 녹색당은 순진하지만 현실정치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여당 민주당 입장에서 현 선거제도에서 안정적인 원내 과반수, 심지어 200석도 얻을 수 있다는 분석까지 나오는데 굳이 바꾸려 할까. 민주당은 지난번 지방선거에서 기초의원 선거구를 대선거구에서 중선거구로 오히려 개악했다. 그보다 반발이 훨씬 클 선거법을 개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국회의석을 확 늘려야 한다. 의원 특권은 줄이고, 인원은 늘려야 한다. 국회의원을 한 500명 만들어 지역대표 절반, 비례대표 절반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 좀 민주주의가 될 것이다.”
-비례대표를 대폭 늘리는 것은 정당 공천자에게 곧장 금배지를 주자는 것인데, 이합집산을 다반사로 하는 우리 정당의 제도화 수준에 국민이 납득할까. 녹색당 정도의 당내 민주화·제도화가 이뤄졌다면 괜찮다.
“비례대표 후보 선정을 투명하게 하도록 독일에서처럼 선거관리위원회가 철저하게 관리해야 한다. 녹색당은 ‘과잉 민주주의’라고 할 만큼 민주적이다.(하~하~) 2012년 창당한 녹색당은 자기 이름을 유지하고 있는 가장 오랜 정당이다.”
김 발행인은 1947년 경남 마산 출신으로 마산에서 중·고교를 나왔다. 중학교 때 3·15 부정선거를 경험했다. 그는 “도립병원에 있는 김주열 시신을 보고 온 마산시민이 흥분했다”면서 “나는 하루종일 뛰어다닌 기억밖에 없다”고 말했다.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의 시신은 결국 4·19 학생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1965년 서울대 영문과에 입학했고, 졸업 후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군복무를 마친 다음, 몇몇 대학에서 가르치다가 1980년부터 영남대 교수로 재직했다.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거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이육사의 시에 대하여>(1976), <시와 역사적 상상력>(1978), <이용악-민중사의 내면적 진실>(1988), <신동엽론>(1989)등 주로 시에 대한 역사주의적 해석과 비평에 힘을 쏟았다.
한국 지식인의 속물 근성에 대해 일침
하지만 힘들다. 그는 “독서문화가 ‘사멸’되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에 그냥 살아있을 때까지 가는 것”이라며 “솔직히 자존심 때문에 잡지를 계속 내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의 청소년기에는 그 어려운 시절에도 <사상계> <현대문학> <씨알의 소리>가 있어 정신적 지주가 됐다. 그러나 이젠 스마트폰이 젊은이들의 정신적 사표가 돼버렸다. <녹색평론>은 지식인들의 토론의 장을 만들기 위해 만들었다. 적어도 지식인만이라도 서로의 지적 노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누군가의 노력에 반론도, 토론도, 격려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모두 자기 얘기만 하고 지나간다. ‘100분 토론’ 같은 대표적인 방송토론도 유치한 말싸움으로 시종한다. 대화와 토론이 빈곤한 사회이다 보니 ‘전쟁보다 무서운 가난에서 해방시켜준 은인 박정희를 욕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저급한 논리까지 나온다. 이런 말을 시정의 장사치도 아닌 예술원 회원이라는 저명한 지식인이 하는 한심한 나라다.”
그는 우리 사회 지식인들의 이중성과 천박성에 대해 분노했다. 그는 “꼭 서양사람들을 데려와 심포지엄을 하고, 신문사도 문화면 신간안내는 거의 외국작가 책만 메인으로 쓴다”면서 “한국 지식인은 속물근성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일갈했다. 그는 또 “한국 지식인들의 생각과 주장을 영어·중국어·일어로 번역해 당당히 외국에 알려야 한다”면서 “그런 기구를 만들라고 신문에도 쓰고, 도종환 문화관광부 장관에게도 얘기했는데, 요즘 너무 바쁜가보다”라고 말했다.
김 발행인은 이번 촛불혁명 때도 빠짐 없이 촛불을 들었다. 집이 청와대 뒤에 있어 걸어서 집회에 참석하고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중학교 때인 1960년 4·19 학생혁명, 교수시절 1987년 6월 시민혁명, 그리고 70줄이 가까워 또 촛불혁명.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대낀 삶이다. 그는 일부의 촛불혁명이냐 항쟁이냐 논쟁에 대해 “항쟁은 무슨 항쟁, 혁명 그것도 위대한 혁명”이라며 “4·19혁명보다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고, 무엇보다 해방 후 지금까지 득세한 친일파를 녹아웃시킨 게 아닌가”라고 말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811031518001#csidx40a4c65d7238d178da65c081ae6bcbd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