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전후 지식인’/ 서경식, 한겨레 2018년 11월 8일
지난 9월22일, 교토에서 히다카 로쿠로 선생 추도회가 열렸다. 추도라곤 해도 종교적 색채가 없는, 오히려 동창회 같은 분위기의 소탈한 모임이었다. 얼핏 보니 참가자는 100명이 채 되지 않는 듯했다. 이는 고인의 대단했던 존재감에 비한다면 꽤나 적적하다고 해야겠다. 물론 화려와 과대를 좋아하지 않았던 히다카 선생답다고 하면 그뿐이겠지만.
나는 최근에 <일본 리버럴파의 퇴락>(한국어판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을 내면서, 일본 사회는 1990년대 중반 이후 ‘긴 반동기’에 들어갔으며, 그동안 지식인과 언론인, 정치인을 포함한 ‘일본 리버럴파’가 반동의 흐름에 저항하지도 못한 채 ‘퇴락’을 계속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리버럴파’의 선배 세대에 해당하는 지식인들(일본에서는 통상 ‘전후 지식인’이라 칭한다)의 언설은 나 자신에게도 자기형성 토대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다. 나도 또한 그들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것이다. 그분들 중 일부의 이름을 거론해 보고자 한다. 돌아보면 젊은 날에 그분들을 직접 뵙고 얘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실로 다행이었다.
야스에 료스케(1935~1998)씨는 1972년부터 1988년까지 이와나미서점이 발행한 월간지 <세카이>(세계)의 편집장을 맡아 군사정권 시대 한국 민주화운동의 육성을 세계에 전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연재했다. 고자이 요시시게(1901~1990)씨는 전쟁 전에 두 차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당했다. 회상기에 옥중에서 ‘감방 동지’가 된 조선인 운동가에게 공감한 것을 글로 써서 남겼다. 내 형들의 구원운동에도 신경을 써 우리 집에 찾아와 어머니를 위로해준 적도 있다. 가토 슈이치(1919~2008)씨의 자전적 명저 <양의 노래>는 한국어로도 번역 출간됐다. 만년에는 일본국 헌법의 전쟁 포기 조항(제9조)을 지키는 운동의 선두에 섰다. 이바라기 노리코(1926~2006)씨는 일본의 전후시를 이끈 대표적 여성 시인이다. 독학으로 조선어(한글)를 배워 한국의 시를 번역 소개했다. 그가 윤동주를 소개한 에세이는 일본 고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이런 최량의 인물들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남았던 히다카 로쿠로 선생도 결국 올해 6월7일 교토의 요양시설에서 별세했다. 향년 101.
이들의 이름은 지금의 한국 독자들에게는 낯설지도 모르겠다. 아니 일본에서도 이들에 대한 기억은 해마다 급속히 엷어져가고 있다. 그것이 ‘일본 리버럴파의 퇴락’의 원인이자 결과이기도 하다. 앞으로 일본 사회는 더 나쁜 방향으로 갈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 평화나 민주주의를 향한 작은 희망이 싹텄던 ‘전후’라 불린 시대의 기억은 이 사람들의 이름과 함께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파시즘의 심리학적 기원을 밝히고 민주사회가 채택해야 할 대안을 제시하려 한 에리히 프롬의 명저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내가 태어난 1951년에 일본에서 출판됐다. 그 번역자가 히다카 로쿠로 선생이었다. 선생은 일본이 점령했던 중국 산둥성 칭다오에서 태어나 1941년 도쿄제국대 문학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전후에는 도쿄대학 신문연구소에서 교편을 잡고 평화운동, 시민운동에 헌신했다. 베트남전쟁에 반대해 탈영 미군 구조운동에 참여했고, 1969년에는 도쿄대 분쟁에 기동대가 투입된 데 항의해 도쿄대학 교수를 사직했다. 1976년부터 교토의 작은 사립대학 교수가 됐다. 평화운동 외에 공해병 문제나 한국 민주화 연대운동, 정치범 구원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대표적인 시민운동가, 아니 ‘문화적 지도자’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선생을 직접 알게 된 것은 1970년대 말 무렵이었다. 히다카 선생은 당시 한국 감옥에 있던 내 형들의 구원운동에 진력했다. 나도 교토에서 살았지만 주눅이 들어 실제로 뵙기까지 몇년이나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월이 흘러 형들도 출옥했고, 도쿄로 옮겨 가서 ‘글쟁이’가 된 나는 히다카 선생을 길게 인터뷰할 기회를 얻었다. 1996년의 일이다. 선생은 그 전년도에 <나의 평화론―전전에서 전후로>라는 저서를 막 낸 뒤였다. 이른바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일본의 전쟁 책임, 식민지지배 책임이 마침내 널리 주목을 받게 되고, 그 한편에서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나 ‘일본회의’ 등의 등장에서 보듯 우파의 움직임이 활발해져 오늘날까지 이어진 ‘긴 반동기’의 기점이 된 때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인터뷰 ‘국민에 대하여’는 졸저 <새로운 보편성을 향해>에 수록돼 있다.
민주주의자·평화주의자로서의 히다카 선생의 자세는 일관돼 있었다. 전쟁 말기, 도쿄제국대학 조교수였던 선생은 군무원으로 해군 기술연구소에 재직했는데, 그때 제출한 의견서에 다음과 같은 소견을 전개했다. ‘세계의 대세는 민주주의를 향하고 있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대만을 포기하고, 인도·인도네시아·필리핀 기타 아시아 국가들의 완전독립을 세계에 요청해야 한다. 국내에서는 언론·집회·결사 등의 자유와 8시간 노동제 등의 개혁을 실현해야 한다. …’
이런 주장은 그가 전후 민주주의 개혁을 그때 이미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당연히, 당시 아직 20대 젊은 연구자가 이처럼 공공연하게 국책을 비판하는 데는 큰 위험이 뒤따랐다. 연구소에서 해고당하고 최전선에 배치돼 목숨까지 잃게 될 위험이었다. 게다가 그 무렵 전체주의 체제가 극에 달했던 일본 사회에는 그런 정책을 실행에 옮길 주체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어진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젊은 히다카 로쿠로가 위험을 무릅쓰고 최대한 노력을 기울인 것은 제대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시대적 제약성과 문제가 될 만한 의문도 있었다. 그것은 앞서 얘기한 ‘주체’의 부재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천황에게 “위로부터의 변혁”을 기대한다고 말한 부분이다. 일찍이 나는 그런 의문을 직접 히다카 선생에게 던져본 적이 있다. 선생은 씁쓸한 표정으로 “노예의 말이지요”라고 한마디를 흘렸으나 그 이상은 설명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시대와의 격투 중에 떠안게 된 정리되지 않은 사상적 과제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극복하는 일은 후배 세대의 몫이다.
히다카 선생은 늘 중국에서 태어난 자신의 신분을 두고 ‘식민자’(콜롱)를 자임했고, 그 특권적 생활의 ‘쾌적함’을 쓰라린 죄책감과 함께 회고했다. 일본 패전 때 중국에 150만, 조선에 70만의 일본인 민간인이 살고 있었다. 그들 대다수가 패전 뒤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대부분은 기껏해야 철수할 때의 고생을 피해자적 관점에서 기억하고 있겠지만, 가해자·지배자로서의 존재형식을 고통과 함께 인식하고 있는 이는 많지 않다. 히다카 선생의 사상 근저에는 그 고통의 감각이 있었다.
앞서 얘기한 인터뷰 때 히다카 선생이 한 얘기 중에 내 마음에 새겨진 것이 있다. 많은 ‘식민자’와는 달리 선생에게는 식민지 쪽 사람들의 마음이 보이는 듯한데, 그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빈곤의 밑바닥에 있는 중국인, 이른바 쿠리(苦力)로 불렸던 사람들을 늘상 보고 자랐습니다…. 이런 옳지 못한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최근에는 문화 상대주의가 유행하고 나도 상대화해서 사물을 보라고 강조하면서, 머리는 비교적 부드러운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용납할 수 없는 불의가 존재하고 있다는 직관은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온화하고 언제나 신사적이었던 선생으로서는 의외였다고 할 만큼 강한 어조의 말이었다.
일본에서는 반동기가 20년 넘게 이어지면서 헌법 9조의 개폐조차 현실 문제가 됐다. 현대 일본 사회의 사람들은 지금 최후의 전후 지식인 히다카 로쿠로의 죽음 앞에서 옷깃을 여미며 그가 남긴 뜻을 이어가야 한다.
번역 한승동/독서인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69462.html?_fr=mt0#csidx77e58c5747542ca9bc757ca3ddceccd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