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개조한 생활편의시설… ‘지역 공동체’ 꿈이 익어간다
파리=한우신 기자입력 2019-11-19 03:00수정 2019-11-19 10:51
[주거복지를 넘어 공간복지로] <1> 프랑스 파리 ‘레그랑부아쟁’
《도서관, 공연장, 커뮤니티 공간, 체육시설, 유아원, 빨래방, 노인정…. 공간복지는 집에서 도보 10분 이내에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춰 주민들이 공간에서도 복지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개념이다. 현재 지역마다 공간복지의 수준이 천차만별이어서 공간복지의 개념을 확산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공공시설 재건축, 공공주택 공유 공간 재배치 등으로 공공시설의 활용도를 높이고 공간복지 혜택을 늘리려는 노력도 나오고 있다. 생활 밀착형 공간을 만들어 공간복지를 구현한 국내외 모범 사례를 찾았다.》
프랑스 파리14구 레그랑부아쟁(Les Grands Voisins). 레그랑부아쟁은 프랑스어로 ‘좋은 이웃’이란 뜻으로 주택, 카페, 공연장, 상점, 스타트업 사무실 등이 들어선 복합시설이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만난 50대 여성 실비 파예스크리브 씨는 개성 있는 옷과 유기농 빵을 구입하려고 왔다. 물건 가격은 인근 가게의 절반 수준이다. 파예스크리브 씨는 “젊은이들이 많아 늘 활력이 넘친다. 이곳만의 묘한 매력이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아들은 약혼자와 함께 공연이 수시로 열리는 바를 찾는다.
레그랑부아쟁은 공공병원인 생뱅상드폴병원이 사용하던 건물에 들어섰다. 생뱅상드폴병원은 환자가 줄어들자 문을 닫아야만 했다. 2013년 파리14구는 방치된 건물을 시민단체 오로르(Aurore)에 위탁해 실업자 지원시설 등 복지시설로 만들었다. 2015년에는 식당, 장터, 스타트업 사무실 등도 입주했다. 주민 편의시설이 갖춰지자 방문객이 늘기 시작했다. 도보 5분 이내에 주택이 밀집해 있다. 마리 길게 레그랑부아쟁 책임자는 “주민 편의시설은 실질적인 혜택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요소가 중요하다”며 “그런 요소를 갖추고 주거지와 가까워야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레그랑부아쟁은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체육시설, 독서실, 노인정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춰 주민들이 복지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공간복지’의 개념을 충실히 반영하는 사례에 해당한다. 하지만 레그랑부아쟁이 처음부터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초창기 주민들은 이곳에 들어선 취약계층 지원시설에 반대했다. 시설 운영을 맡은 오로르 등 시민단체들은 주민들을 직접 만나 앞으로 공간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적극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실제 카페, 공연장 등이 들어서며 실업자 지원시설에 불과했던 공간은 청년들이 즐겨 찾는 문화공간으로 바뀌었다. 길게 책임자는 “주민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공간을 구성했다.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시설이 들어서자 반대 여론도 바뀌었다”고 말했다.
레그랑부아쟁에서는 매달 흥미로운 장터가 열린다. 이 장터에서는 입주 창업 기업과 예술가들이 만든 제품을 팔고 세계 각국의 음식도 소개한다. 화폐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물물 교환으로만 거래해야 하는 행사도 있다. 지하철 이용권을 가져와서 필요한 물건과 바꿔갈 수도 있다. 그렇게 모인 이용권은 실업자 등 취약계층에 지급된다. 주민들은 이런 행사를 “즐거운 놀이이자 동시에 기부”라고 말했다. 시설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기부가 이어졌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때 두 잔 값을 계산하고 다른 사람이 마실 수 있게 배려하는 ‘서스펜디드 커피’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레그랑부아쟁에 입주한 기업과 예술가들은 건물 벽면을 꾸미는 등 재능기부를 약속해야 한다. 또 장터가 열리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 대신 임차료를 시세의 절반 정도만 내고 필요한 공간을 얻는다. 유기농 초콜릿을 만드는 몽자르댕쇼콜라테(Mon jardin chocolat´e)의 카린 데르 대표는 “입주 기업들과 공동으로 납품 계약을 맺는 등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전략을 세우기도 한다.
시설에서 소개한 구직 청년, 실업자를 채용할 때도 있다. 나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 입주 기업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유학생 A 씨는 “창업 초창기에는 만든 제품의 상품성을 평가해 봐야 한다. 여기에서는 옷가게, 장터 등을 통해 수시로 소비자와 접하며 제품의 반응을 현장에서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레그랑부아쟁은 현재 시험대에 놓였다. 파리시는 내년 6월부터 이곳에 임대주택 단지를 지을 계획이다. 다만 파리시는 주민들의 반응이 뜨거웠던 옷가게, 공연장 등은 새로 짓는 주택단지에 입주시키기로 했다. 현지에서 만난 주민들은 “집 가까운 곳에서 여러 편의시설을 쉽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공간을 매개로 주민과 청년, 창업자들이 공생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입을 모았다.
파리=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
베를린 영화제작소 ‘우파 파브리크’ 40년간 ‘주민 소통의 場’으로 변신
베를린=한우신 기자입력 2019-11-19 03:00수정 2019-11-19 10:51
독일 베를린 남부 지하철 6호선 울슈타인슈트라세역. 출구에서 나와 1분 정도 걷자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벽뿐만 아니라 지붕에도 풀잎들이 가득했다. 지붕에는 태양열 집열판이 설치돼 있다. 풀잎으로 뒤덮인 건물은 대표적인 도시 생태마을인 ‘우파 파브리크(Ufa Fabrik)’를 상징하는 모습이다.
우파 파브리크는 1920년부터 영화 제작사 우파(Ufa) 등이 영화를 촬영하던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화사들이 떠났고 오랜 기간 방치됐다. 1979년 가난한 젊은 예술가와 숙련공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임을 만들고 주민들에게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게 우파 파브리크의 시작이다. 설립에 참여한 지그리트 니머 씨는 “당시 친환경 주거에 대한 인식도 남달라 벽면과 지붕에 식물을 심어 열 손실을 줄였다. 자연 친화적인 마을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현재 우파 파브리크에는 공연장과 카페, 유기농 식재료점, 공동 육아 시설, 문화 강좌 공간, 대안학교 등이 들어서 있다. 당시 서베를린시는 방치된 부지에 갑자기 청년들이 모여들며 각종 시설을 만들려고 하자 마뜩지 않아 했다. 하지만 우파 파브리크가 지역 주민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태도도 달라졌다. 우파 파브리크는 연간 300회 이상 크고 작은 공연을 주관한다. 청년들의 자발적 활동이 주민 복지로 이어지자 베를린시는 활동을 장려했다. 초기 1년 단위로 부지 사용 계약을 맺었으나 1986년에는 2037년까지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올해는 사용 계약을 2067년까지 다시 연장했다. 운영 시스템을 배우려고 찾아온 덴마크 출신 마스 카를슬룬 씨는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공간을 조성한 뒤 시설의 혜택이 지역 주민들에게 돌아가게 했다는 점에서 지방정부들이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
---------------------------------
방치된 트램 차고지가 커뮤니티 공간으로… 매년 250만명 찾는다
암스테르담=김하경 기자입력 2019-11-21 03:00수정 2019-11-21 03:00
주거복지를 넘어 공간복지로] <2>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더 할런’
14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옛 트램 차고지 더 할런(De Hallen). 관광 명소인 안네의 집, 반고흐미술관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떨어진 곳이다. 더 할런은 현재 면적 2만2000m²의 커뮤니티 문화복합시설로 공공도서관, 식당, 영화관, 상점, 전시관, 호텔 등이 들어서 있다. 연간 250만 명이 찾는다. 카롤린 에베르스데이크 씨(38·여)는 “출산 이전에는 친구와 영화관을 주로 찾았다. 요즘에는 생후 15개월의 아들에게 읽어줄 책을 빌리려고 도서관을 찾는다. 더 할런은 주민 커뮤니티시설이 한곳에 모여 있는 복합문화시설”이라고 말했다.
○ 오랜 기간 방치된 옛 트램 차고지
더 할런은 1901∼1928년 단계적으로 완공돼 1996년까지 트램 차고지로 쓰이던 대표적인 산업시설이다. 건물 바닥에는 여전히 선로가 남아 있다. 건물은 길게 여러 동이 연이어 붙어 있는 형태다. 암스테르담 시청이 1990년대 트램 차고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이곳은 빈 공간으로 남게 됐다. 당시 차고지 소유주인 시립운송회사(GVB) 등은 건물을 완전히 철거한 뒤 새로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차고지가 암스테르담시의 산업유산으로 지정돼 이런 방식의 개발은 어렵게 됐다.
차고지 소유권을 넘겨받은 관할 구청은 건물의 용도를 정하기 위해 1997∼2006년 다양한 실험을 했다. 스타트업과 예술가, 디자이너 등에게 공간을 빌려주기도 했고 암스테르담 대중교통박물관이 이곳에 입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6년 박물관이 이전한 뒤 옛 차고지는 또 다시 빈 공간으로 남았다. 2012년까지 일부 저소득층 시민이 불법 점거해 거주하기도 했다.
관할 구청은 오랜 기간 차고지가 방치되자 민간 기업과 공동으로 개발하는 방안을 구상했다. 민간업체가 사업비를 충당하고 공공시설, 상업시설을 함께 짓는 방식이었다. 주민들의 반대가 거셌다. 민간 기업들은 수익을 늘리기 위해 신축 건물에 상업시설을 최대한 많이 넣으려고 했다. 주민들은 도서관, 미술관 등 공공시설이 이곳에 들어서기를 희망했다.
주민들은 건축가 안드레 판 스티흐트 씨(60)를 영입해 2010년 차고지 리모델링을 추진할 비영리단체 ‘TROM(트램차고지개발회사)’을 설립했다. 여기에는 건축가, 주민, 상인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차고지 시설을 고치고 공공시설을 다수 입주시키는 방안을 구상했다. 비용은 입주자 투자, 은행 대출, 일부 시설 매각, 자체 조달 등으로 마련했다. 마침 산업유산 보전 시민단체들이 민간 기업이 개발에 참여하면 산업유산이 파괴될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지적하며 힘을 보탰다. 차고지를 개발하려던 관할 구청은 주민 의견이 반영된 TROM의 계획안을 낙점하고 TROM에 50년간 부지 사용권을 부여했다. 옛 트램 차고지는 리모델링을 거쳐 2015년 초 ‘더 할런’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 상업, 사회적 공간이 공존하는 ‘핫 플레이스’
주 출입구를 통해 더 할런에 들어가면 바닥 중앙 선로를 기준으로 양쪽에 도서관, 식당, 영화관, 전시관, 상점 등이 보인다. 주변에선 사진전 등 다양한 전시회가 열린다. 호텔, 탁아소 등도 별도 건물에 마련돼 있다. 지하에는 면적 6000m²의 대형 주차장도 설치됐다.
낮에는 도서관 이용자가 많은 편이고 퇴근시간인 오후 4시 무렵부터 영화관과 음식점을 찾는 방문객이 늘어난다. 학생 톰 판 벤덜 씨(20)는 “도서관 내부에 카페가 있다. 인터넷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 사흘에 한 번꼴로 찾는다”며 “카페가 조용해서 학교 과제를 하기에 좋다”고 말했다.
일부 상점은 알코올중독자나 마약중독자 등을 채용해 다시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는 사회적 기업이 운영하고 있다. 더 할런은 이런 상점에는 임대료를 절반만 받는다. 상업시설과 사회적인 공간이 공존하는 셈이다. 더 할런 관계자는 “더 할런의 임대료는 암스테르담의 평균 임대료보다 30% 저렴하다. 다양한 계층이 섞일 수 있도록 입주 상점을 선별하고 있다”고 말했다. 더 할런은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 댄스교실 등 주민 문화 프로그램과 어린이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모두 무료다. 토요일에는 예비 창업 청년과 예술인들이 책이나 예술품 등을 판매할 수 있는 빈티지 마켓 공간을 제공한다.
더 할런이 활기를 띠면서 지역 부동산 가격도 덩달아 올랐다. 인근 집값은 최근 5년 동안 2배 이상으로 뛰었다. 더 할런의 디렉터 요한 발스터르 씨(61)는 “더 할런이 들어서기 전에는 이 일대에 작은 도서관이 공공시설의 전부였다. 주민들이 옛 장터처럼 더 할런에 모이기 때문에 이곳은 소통의 매개체 역할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암스테르담=김하경 기자 whatsup@donga.com
---------------------
단돈 1유로에 판 로테르담 ‘발리스블록’, 다양한 계층 어우러진 공간으로 재탄생
로테르담=김하경 기자입력 2019-11-21 03:00수정 2019-11-21 03:00
[주거복지를 넘어 공간복지로]40가구 참여해 낙후된 공간 개조
마약거래상-노숙인 무법천지서 살기 좋고 쾌적한 건물로 탈바꿈
“단돈 1유로(약 1300원)에 집을 팝니다.”
2004년 네덜란드 건축가 이네커 휠스호프 씨(65·여)와 프란스 판휠턴 씨(54)는 지방정부가 낡고 방치된 주택을 사들이면 입주 희망자들이 직접 수리하고 거주하는 방법을 구상했다. 당시 로테르담시는 낙후 지역의 거주환경을 개선하려고 노후 주택을 매입해 리모델링한 뒤 다시 민간에 매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책은 막대한 예산만 들어갈 뿐 별다른 효과를 내지는 못했다.
리모델링 비용만 해도 상당했다. 로테르담시는 이들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건물 매입 비용을 부담해도 리모델링 비용 등이 들어가지 않고 낙후 지역의 거주환경을 개선한다는 정책 목표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휠스호프 씨와 휠턴 씨는 이미 시가 매입했지만 사실상 방치됐던 스팡언 지역의 공동주택 ‘발리스블록’을 찾아냈다. 저소득층 지역에 위치한 이 건물은 당시 마약거래상과 마약중독자, 노숙인 등이 살던 곳으로 70%가 비어 있었다. 비가 새는 곳도 적지 않았고 곳곳에 비둘기 배설물이 한 뼘 이상 쌓여 있었다. 이들은 사실상 시에서 건물을 넘겨받아 주택 1채를 1유로씩 받고 팔기로 했다. 휠스호프 씨는 “워낙 낡은 건물이라 리모델링 비용이 비슷한 수준의 주택을 하나 매입하는 비용과 맞먹을 정도였다. 상징적인 금액인 1유로를 제시했다”고 말했다.
그 대신 까다로운 입주 조건을 내걸었다. 1년 이내에 리모델링 공사를 마쳐야 하고 이를 어기면 벌금 2만5000유로(약 3200만 원)를 내야 했다. 의무 거주기간이 2년 이상이라는 단서 조항도 달았다. 그런데도 사실상 공짜로 집을 구입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전국에서 400명 이상이 발리스블록을 찾았다. 하지만 건물이 매우 낡은 것을 확인한 뒤 상당수는 실망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결국 발리스블록에는 기존 4가구와 신규 36가구 등 모두 40가구가 집을 수리해 살기로 했다.
입주자들은 저소득층부터 건축가, 교사 등 전문직 종사자까지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됐다. 자연스럽게 여러 계층이 함께 섞여 거주한다. 건축가인 휠스호프 씨는 리모델링 노하우를 전수하며 저렴한 가격으로 리모델링을 마칠 수 있도록 입주자들을 도왔다. 입주자들은 정원 수목의 종류, 공동창고 크기 등을 의논해 정했다. 데이터분석기관인 ABF리서치에 따르면 스팡언의 안전지수(10점 만점)는 2005년 3점에서 2015년 9점으로 올랐다.
입주자 라우라 베이버르 씨(55·여)는 “직접 리모델링에 참여했고 입주 이후에도 이웃과 함께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발리스블록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우리 마을’이다”라고 말했다. 정부는 입주 희망자들이 직접 집을 리모델링하는 프로젝트에 ‘169 클뤼스하위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휠스호프 씨와 휠턴 씨가 이 프로젝트를 확산시켜 나갔다. 현재 500여 가구가 169 클뤼스하위전 프로젝트에 참여해 주택을 개선했다.
로테르담=김하경 기자 whatsup@donga.com
-------------------------
주택가에 만든 ‘주민참여 도서관’… ‘열린 사랑방’으로 인기
한우신 기자입력 2019-11-26 03:00수정 2019-11-26 03:00
[주거복지를 넘어 공간복지로] <3> 서울 은평구 ‘구산동도서관마을’
서울 은평구 연서로 구립구산동도서관마을. 책장에는 1990년대 인기를 끌었던 만화 단행본과 주간지로 빼곡하다. 주말이면 30, 40대 아빠들이 자녀에게 책을 읽히려고 왔다가 정작 본인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신남희 구산동도서관마을 관장은 “주민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 건물 한쪽 편 2∼4층에 만화자료실을 따로 만들었다”며 “주민들이 도서관을 딱딱하게 느끼지 않고 부담 없이 쉽게 와서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은평구는 주택 8채를 사들여서 5채는 허물고 나머지 3채는 리모델링하며 일부 신축해서 구산동도서관마을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이름에 ‘마을’이라는 단어를 붙였다. 2015년 11월 개관한 뒤 공부방, 사랑방 등으로 활용되며 지역 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6만2000여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연간 이용객은 2017년 33만 명, 지난해 59만5000명에 달한다.
○ 주민이 사업 기획부터 운영까지 맡아
구산동 주민들은 오랜 기간 마을도서관 건립을 희망했다. 구산동에는 노숙인 요양시설인 ‘은평의 마을’과 장애인학교 ‘은평대영학교’ 등이 있지만 도서관, 미술관 등 주민 문화시설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강북권에서도 소외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주민들의 볼멘소리마저 나왔다. 급기야 주민들은 2006년 직접 나서서 도서관 건립을 위한 서명 운동까지 벌였고 여기에만 2000명이 넘게 참여했다.
2008년 마침 은평구가 복지시설 건립 등을 위해서 구산동 주택 8채 등 터 1500여 m²를 매입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주민들은 이곳에 도서관을 지어달라고 구청에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은평구 관계자는 “주민들의 요구가 없었다면 노인이나 장애인 등을 위한 복지시설을 세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단순히 도서관을 세워 달라고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 건립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먼저 주민참여예산위원회를 통해 예산을 확보했고 자발적인 준비 모임을 만들어 도서관을 채울 공간, 시설, 서적 등에 대해 의견을 모았다. 지역의 현황을 잘 아는 구청이 발주기관과 건축가, 주민들을 연결해 의견을 조율하고 설계에 반영했다.
주민들은 ‘은평도서관마을 사회적협동조합’을 꾸리고 현재 민간 위탁 형태로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다. 사실상 주민들이 사업 기획부터 예산 확보, 시설 조성, 운영 등 전 단계에 참여한 것이다.
○ 열람실이 따로 없이 확 트인 ‘사랑방’
구산동도서관마을은 열람실이 없는 게 특징이다. 보통 도서관들은 공간을 칸막이로 구분하고 책상, 의자 등을 설치해 이용자들이 딱딱하게 느낄 때도 많다. 그 대신 곳곳에 벤치형 의자, 탁자 등을 마련해 누구나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공원이나 카페에 왔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한탁영 구산동도서관마을 정보서비스1팀장은 “열람실을 따로 만들면 공간을 독서실로만 사용하려는 이용객이 많아진다. 이렇게 되면 면학 분위기도 딱딱해지기 마련”이라며 “편한 공간으로 만들려고 애초부터 개방형 공간을 구현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도서관을 매개로 다양한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다. 중장년층은 시 낭송, 뜨개질 등의 모임을 만들어 주기적으로 모인다. 시 낭송 모임 주민들은 주말마다 도서관에서 틀어주는 자체방송 ‘도서관 라디오’에 종종 출연한다. 도서관 한쪽에는 라디오 스튜디오가 마련돼 있다. 뜨개질 모임은 도서관 곳곳을 꾸밀 수 있는 소품을 기증한다.
도서관 사서 20여 명은 은평의 마을을 매주 찾아 시설 입주자들에게 책을 읽어준다. 대영학교 학부모에게는 장애아동에게 효과적으로 책을 읽어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다문화가정 아이들과도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신 관장은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활동도 모두 주민들의 의견이 반영됐다. 도서관의 문화 혜택을 받은 주민들이 다시 혜택을 다른 주민들과 나누고 있다”고 말했다.
○ ‘집에서 가까운 편한 공간’ 구현
공간복지는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체육시설, 독서실, 노인정 등 생활 사회간접자본(SOC)을 갖춰 주민들이 편하게 복지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개념이다. 구산동도서관마을은 기존 다세대주택을 허물고 조성한 공간이라 태생적으로 이동거리가 짧다. 또 기존 주택을 허물지 않고 활용해 계단, 벽돌, 테라스 난간 등이 고스란히 남아 정감을 더한다. 주민 고상영 씨(64)는 “동네 다세대주택, 골목길이 도서관으로 바뀌었다. 감성적으로도 편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9월 구산동도서관마을을 직접 방문해 “주택을 허물지 않고 지어서 공공건물이라기보다는 동네의 여느 집과 같다”며 “생활 SOC의 모범”이라고 했다. 구산동도서관마을은 2016년 ‘서울시 건축상 대상’과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대상’도 받았다.
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
“동네가 커다란 집”… 도보로 5분 거리에 주방-서재-거실을 만들다
김하경 기자입력 2019-11-27 03:00수정 2019-11-27 03:00
[주거복지를 넘어 공간복지로] <4> 서울 후암동 공유공간
25일 서울 용산구 후암동 후암주방. 10m² 남짓한 작은 공간에 가정집 주방처럼 싱크대, 전자레인지, 냉장고, 전기밥솥, 냄비, 식기 등이 마련돼 있다. 식사를 할 수 있게 4인용 식탁도 있다. 찬장에는 소금, 설탕, 참기름, 간장 등 각종 양념 재료도 가지런히 놓여 있다. 대학생 남태현 씨(26)는 “원룸에서 혼자 살고 있는데 주방 공간이 매우 좁다. 음식을 하면 온 집 안에 냄새가 퍼진다. 화구도 적어 요리를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커플 기념일에는 여자친구와 함께 이곳을 찾아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고 말했다.
○ ‘내밀한 공간’ 가정집의 주방을 공유하다
2017년 3월 문을 연 후암주방은 일정 사용료를 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유 주방이다. 옛 의류 수선집을 개조해 가정집 부엌을 그대로 옮겨다 놨다. 2인, 3시간을 기준으로 이용료는 7000∼1만 원. 공간을 마련한 이준형 씨(34) 등 20, 30대 건축가 6명은 “원룸, 고시원의 부엌은 좁다. 뭘 만들어 먹기 어려워 공유 부엌을 구상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신축보다는 낡은 건물을 수선해 재사용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도시공감협동조합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후암동은 일제 적산가옥부터 신축 협소주택까지 다양한 형태의 주택이 혼재한 동네다. 일부 지역은 산기슭에 위치해 있고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남산 주변 고도제한 등으로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다. 대부분 지하철역에서도 상당히 떨어져 있다. 시간이 멈춘 듯 개발이 더뎌 도시재생에 관심이 많은 건축가들에겐 매력적인 곳이다. 건축가 이준형 씨는 “처음 후암동을 방문했을 때 주민들이 오랫동안 어울리며 사는 ‘동네’라는 느낌이 강했다”며 “함께 어울려 사는 주거지를 모색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라고 말했다.
후암주방은 하루 두 팀만 이용할 수 있다. 한 달 평균 50∼55팀, 최소 100명 이상이 이곳을 이용한다. 이용자의 20% 정도만 동네 주민이다. 대부분 주방을 이용하려고 후암동까지 찾은 사람들이다. 크고 작은 가족, 친지, 친구 모임이나 기념일 등을 위해 공간을 빌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꿈을 키우는 공간으로도 활용한다. 요리사 유현준 씨(21)는 “후암주방을 빌려 한시적인 식당을 만들 수 있다. 음식을 만들어 주민들의 반응을 살펴보고 출시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인터넷으로 신청해 하루 동안 대관 가능
도시공감협동조합의 청년 건축가들은 주방을 시작으로 다양한 공유 공간을 늘리기 시작했다. 후암동을 커다란 집으로 보고 서재, 거실 등을 계속 만들기로 했다. 후암주방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후암서재를 열었다. 후암서재도 인터넷으로 신청해 하루 동안 빌릴 수 있는 공유공간이다. 27m² 공간에 책꽂이와 책, 5인 테이블과 1인용 소파, 싱크대, 커피메이커 등이 갖춰져 있다. 안쪽에는 바닥에 열선이 깔려 있는 작은 방도 있다. 작업을 하다 피곤하면 잠시 낮잠을 잘 수 있다. 대여료는 4인, 8시간 기준 5만 원 정도. 도시공감협동조합 소속 건축가 이기훈 씨(27)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함을 느끼면서 작업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공유 사무실이나 카페 등은 타인과 섞여 일해야 하지만 후암서재는 자신이 대여한 시간 동안은 개인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
올 7월 후암주방과 후암서재의 중간 지점에는 후암거실을 마련했다. 3층 건물 1, 2층에는 요리사가 상주하고 맥주 등을 파는 작은 식당을 열었다. 3층에는 스크린, 홈시어터, 소파 등을 갖춘 후암거실이 들어섰다. 각 층의 면적은 27m²가량이다. 동네 주민들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 비슷한 또래의 자녀를 둔 주민들이 부부, 자녀 동반 등으로 모임을 갖고 후암거실을 찾아 소소한 주제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생일파티가 열리기도 한다. 영화감상, 독서토론 등의 정기 모임도 열린다. 4, 5시간 이용료는 3만∼8만5000원.
○ 청년 건축가들이 구현한 ‘공간복지’
공간복지는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체육시설, 독서실, 노인정 등 생활 사회간접자본(SOC) 시설을 갖춰 주민들이 편하게 복지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개념이다. 가정집의 내밀한 공간인 주방, 거실, 서재 등도 주민들과 공유한다면 공간복지의 개념을 충실하게 반영할 수 있다. 또 지방자치단체나 공공기관이 아니라 도시재생에 관심을 보이는 민간 부문의 건축가들도 공간복지를 구현할 수 있다. 도시공감협동조합의 건축가들은 “민간이 운영하는 공유 공간들은 수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 수익을 내야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며 “주민들이 원하는 공유 공간을 앞으로 더 늘려 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하경 기자 whatsup@donga.com
-----------------------------
상도동 성대골에서도 “셰어합니다”
김하경 기자입력 2019-11-27 03:00수정 2019-11-27 03:00
[주거복지를 넘어 공간복지로]지역 밀착형 사회적 기업 ‘블랭크’
공유 주방-작업실-주택 조성
2012년 3월 당시 대학생이던 문승규 씨(33) 등 4명은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성대골 마을을 방문했다. 성대골 마을은 낡은 저층 주택이 많은 곳이다. 주민 2만5000여 명이 거주하지만 초등학교도 없다. 다만 주민들은 어린이도서관, 마을학교 등을 직접 만들 정도로 자치활동은 활발했다. 문 씨는 아예 성대골로 이사했다. 문 씨는 “당시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조사하다 보니 애착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블랭크’라는 지역 밀착형 사회적 기업을 세우고 2013년 4월 성대골에 33m² 크기의 단층 점포를 빌려 공유 주방 ‘청춘플랫폼’을 마련했다. 공유 주방을 만들기 전에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주민들은 “주민들끼리 모여 밥을 해먹고 다양한 모임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2015년에는 사진작가, 그래픽디자이너 등을 위한 작업 공간인 ‘청춘캠프’를, 2017년에는 공유 주택 ‘청춘파크’를 선보였다. 청춘캠프는 사무실을 빌려 일부는 블랭크의 사무실로 사용하고 나머지 공간을 저렴하게 디자이너 등에게 내준 것이다. 다양한 재능을 가진 이들과 함께 동네 소식지와 마을소개 책자 등도 만들었다.
청춘파크는 오랜 기간 성대골에 거주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만든 공간이다. 1인실 3개와 3, 4인이 작업할 수 있는 스튜디오 2개, 공유 서재, 공유 부엌 등으로 구성됐다. 보증금이 따로 없고 한 달 단위로 계약을 맺어 거주하거나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청춘파크에도 공유 주방이 생기면서 기존 청춘플랫폼은 어린이도서관으로 개조했다. 동네에는 어린이들이 편하게 책을 읽을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난방시설을 보완하고 다락방도 만들었다.
블랭크는 지난해 10월 ‘찾고 싶은 동네술집’을 모토로 커뮤니티 공간 ‘공집합’을 만들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알게 된 성대골 주민 22명도 여기에 투자했다. 주민들은 동네술집을 운영하고 수익금의 일부를 가져간다. 블링크 대표를 맡고 있는 문승규 씨는 “직접 거주하며 무엇이 동네에서 가장 필요한지 몸으로 느끼게 됐다. 주민들과 계속 소통하면서 공유 주택, 공유 부엌 등 필요한 공간을 만들었다”며 “주민들과 함께 힘을 모은다면 공간복지의 개념은 지방자치단체와 공공기관뿐만 아니라 주민 스스로 구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하경 기자 whatsup@donga.com
---------------------------------------
노후 임대아파트 주민들에 자부심 심어주는 ‘공간닥터 프로젝트’
한우신 기자입력 2019-12-03 03:00수정 2019-12-03 03:00
[주거복지를 넘어 공간복지로] <5> 서울 노원구 중계목화4단지
서울 노원구 중계목화4단지. 1991년 완공된 공공임대 아파트단지라서 공동시설들은 낡은 곳이 많았다. 특히 한 놀이터는 한눈에 봐도 휑했다. 크기에 비해 시설이 적었고 우레탄 소재 바닥은 군데군데 해진 부분만 네모나게 오려내 보수했다. 흡사 누더기 같았다. 주민 곽모 씨(64·여)는 “언제부터인지 학생들이 놀이터에 와서 흡연한다. 골칫거리”라고 말했다. 놀이터 옆에는 작은 나무숲이 보였다. 단지와 외부를 나누는 경계 같은 곳이다. 나무 사이에는 길이 나 있었다. 주민들이 하나둘 다니기 시작하면서 의도하지 않았던 길이 만들어졌다. 자세히 보니 오랜 기간 흙이 밟히고 파헤쳐진 탓에 나무뿌리가 드러났고 풀, 낙엽 등과 뒤엉켜 있었다.
○ 숨은 공간 찾아내는 ‘공간 닥터’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는 올 4월부터 노후 임대아파트 단지에서 유휴공간을 활용하는 방법을 마련하기 위한 ‘공간 닥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건축 도시 조경 등 전문가 26명을 ‘공간 닥터’로 임명해 주민에게 필요한 복지시설을 발굴하거나 공간 개선방안을 마련한다. 의사가 질환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듯 공간 전문가들이 문제점을 찾아내 공간 개선 방안을 제시한다는 의미로 ‘공간 닥터’라는 이름을 붙였다. 대상 아파트는 완공 20년 이상이고 500가구 이상인 21개 임대단지다. 이런 아파트들엔 어린이, 노인들이 많이 살지만, 이들을 위한 복지시설은 부족한 실정이다.
21개 사업 단지는 지역별로 5개 그룹으로 나눠 한 명씩 책임자를 배정했다. 팀을 이루는 공간 닥터들은 각기 다른 전공자들이 섞이도록 했다. 공간 닥터들은 할당을 받은 아파트단지의 개선 사업을 책임지고 개선안을 마련한다. 또 다른 전문가들이 맡은 단지의 개선안에도 조언한다. 공간 닥터들은 5∼9월 현장에 투입돼 조사와 주민 의견 청취 등을 진행했다. 활용도가 떨어지는 씨름장 등 노후 시설은 없애고 주민 휴게 시설과 생태 공간을 늘리는 개선안을 마련했다. 최근 시공사를 선정한 중계목화4단지를 시작으로 연말까지 월계사슴2단지, 가양4단지, 방화11단지 등이 시설개선 공사에 들어간다. 나머지 17개 단지는 개선안을 바탕으로 내년에 착공한다.
○ 주민 연령대 반영한 둘레길 설치
중계목화4단지 공간 닥터로 위촉된 최혜영 성균관대 건설환경공학부 교수는 일단 주민 의견을 청취했다. 어린이들은 여러 높낮이로 된 지형을 체험할 수 있는 모험형 놀이터를 희망했다. 이런 형태는 현재 ‘언덕 놀이터’로 불리며 어린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놀이터 형태 중 하나다. 놀이터 옆 유휴 공간에는 꽃을 심고 정원을 만들기로 했다. 나무숲에는 나무덱을 설치하고 산책길을 구상했다. 아파트단지 외곽을 도는 길이 약 1km의 둘레길도 만든다. 놀이터 분위기가 밝아지고 산책로가 생겨 행인이 많아지면 놀이터에서 일탈 행위를 하던 청소년도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사실 둘레길을 계획했을 때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단지 인근에는 불암산 중랑천 등 주민들이 산책할 공간이 많다. 주변에 산책할 공간이 많은데 구태여 단지 주변에 산책로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중계목화4단지는 1991년 입주했던 중장년층들이 현재 노년층으로 바뀌었다. 이들은 건강 등을 이유로 먼 곳으로 산책하는 것을 꺼린다. 둘레길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최 교수 등 공간 닥터팀은 단지 중앙에 있는 또 다른 놀이터에는 노인들을 위한 다양한 시설을 넣어 다른 연령대의 주민들도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 주민 의견을 최대한 반영한 ‘공간 활용’
공간 닥터팀과 주민의 의견이 맞서 보류된 방안도 있다. 공간 닥터팀은 주민 소통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텃밭 조성을 제안했다. 반면 주민들은 관리하기 어렵다며 반대했다. 그 대신 주민들은 단지 내 벤치를 없애달라고 했다. 벤치에서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사례가 잦아졌기 때문이다. 이 의견은 개선안에 반영됐다. 설계도면화 작업을 맡은 이윤주 엘피스케이프 공동 대표는 “단순하게 공간 활용을 개선하는 게 아니라 단지 이미지를 바꾸고 주민도 적극 참여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SH공사는 2기 공간 닥터 프로젝트로 임대아파트에 설치된 작은도서관의 활용도를 높이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SH공사 관계자는 “59개 임대아파트단지에 작은도서관이 설치돼 있다”며 “설립 당시와 비교하면 활용도가 많이 떨어졌다. 주민들이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방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
“공간복지는 빈곤 세습을 막는 정책이죠” 이원호 성신여대 교수 강조
한우신 기자입력 2019-12-03 03:00수정 2019-12-03 03:00
“공간복지는 단순히 시설을 하나 만드는 게 아닙니다. 빈곤의 세습을 막는 정책이죠.”
공간복지는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체육시설, 독서실, 노인정 등 생활 사회간접자본(SOC) 시설을 갖춰 주민들이 편하게 복지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개념이다. 이원호 성신여대 지리학과 교수는 공간복지의 개념을 더 깊게 살펴봐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현재 공간복지에 대한 인식은 시설 개선 정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는 “불평등과 공간분리 현상이 합쳐지면서 결과적으로 부와 빈곤이 대물림된다”며 “빈곤이 세습되는 환경을 바꾸기 위해 생활 편의시설을 확충하고 창업 시설 등을 지원해서 주민들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게 공간복지의 목적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한국은 빈부 차이에 따라 공간 분리가 심화되고 있다. 빈부 격차에 따라 지역이 나뉘고 점차 그 경계는 두꺼워진다. 교육 문화 교통 등의 인프라가 우수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으로 분리되는 것이다.
영국 런던, 미국 뉴욕 등 오랜 기간 슬럼이 형성된 선진국 대도시들은 이미 ‘공간’에 초점을 맞춘 빈곤 완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2016년 5월 영국 왕립도시계획연구소(RTPI)가 발행한 ‘가난, 장소, 불평등’ 보고서는 “빈곤은 특정 지역에 집중해서 발생하고 있다. 이런 지역의 열악한 환경을 바꾸는 정책은 빈곤을 줄이는 데 중요한 도구가 된다”고 했다. 영국은 빈곤 지역 100곳을 ‘가라앉는 지역(Sink Estate)’으로 정해 개발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 교수는 현재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가 임대아파트단지 등을 활용해 공간복지를 추진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중앙정부, 서울시 등과 정책의 실효성을 높이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교수는 “빈집을 활용해 커뮤니티 시설로 만들었다면 이후 정부, 지자체의 스마트시티 계획과 맞물려 효과를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현재 SH공사가 추진 중인 ‘동북4구 지역밀착형 공간복지 마스터플랜 수립’에 관여하고 있다. SH공사는 도봉 노원 강북 성북구 등 동북지역 4개 자치구처럼 상대적으로 생활 인프라가 취약한 지역에 우선적으로 공간복지 구현을 추진하고 있다.
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
청년건축가의 아이디어로 어둡던 반지하에 쨍하고 볕들다
김하경 기자입력 2019-12-05 03:00수정 2019-12-05 04:13
[주거복지를 넘어 공간복지로] <6> 서울 반지하주택 6곳 리모델링
서울 성북구 종암동의 3층짜리 주택 반지하. 33m²(약 10평) 남짓한 공간은 오랜 기간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채 방치돼 있었다. 철문을 연장으로 뜯어내고 들어가니 벽지, 장판은 모두 뜯겨 있었고 낡은 변기만이 덩그러니 보였다. 흉가처럼 방치된 이곳은 내년 커뮤니티 다이닝(공유 식당) 공간으로 바뀐다.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는 올해 9월부터 빈 공간 활용 방안을 청년 건축가들과 함께 모색하는 ‘SH 공간복지 스타트업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SH공사가 매입한 노후주택 반지하 공간을 청년 건축가들이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고 수리해 새로운 마을 공간복지 시설로 꾸미는 사업이다. 공간복지는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체육시설, 독서실, 노인정 등 생활 사회간접자본(SOC) 시설을 갖춰 주민들이 편하게 복지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개념이다.
○ ‘주택 반지하’에 커뮤니티 다이닝 공간
올해 3월 ‘제5회 SH청년건축가 설계공모전’에서 수상한 6개 팀 14명의 청년 건축가가 이 프로젝트에 합류해 반지하 공간 6곳을 리모델링한다. 종암동 반지하 공간은 김민종 씨(26) 등 고려대 건축학과 학생 3명이 맡았다. 이들은 현장 답사를 한 뒤 주민 20여 명을 인터뷰했다. 그 결과 이 일대엔 주민이 모일 만한 마땅한 공간이 없었다. 종암동 주택가는 도시계획에 따라 인위적으로 형성된 동네가 아니다. 공원, 쉼터 등 주민 편의시설이 부족했다. 김 씨는 “일대를 다녀보니 주민들이 사무용 의자를 골목길에 내놓고 앉아 대화를 나누거나 쉬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 씨 등은 항상 열려 있고 주민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대화를 나누는 커뮤니티 다이닝 공간을 구상했다. 여기에다 소박한 음식이나 차 등을 곁들인다면 더 좋은 방법이다. 이들은 직접 음식을 만들고 주민들을 초대해 대접하며 소통하는 시간도 만들 예정이다. 정승준 씨(29)와 김래빈(26) 씨는 “학교 수업에서 가상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실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매우 자세하게 고민해야 했다”고 말했다.
○ 주부를 위한 ‘차 마실 공간’
중앙대 대학원 건축학과에 재학 중인 김은석 씨(27)는 구로구 개봉동의 한 주택 반지하 공간을 맡았다. 개봉동은 주민 구성에서 노인 비율이 높은 편이다. 김 씨는 이런 점을 고려해 노인 복지시설을 구상했다. 하지만 담당한 주택은 오르막길과 계단을 거쳐야 진입할 수 있다. 노인들이 자주 드나들기엔 어려운 환경이다. 또 일대에는 경로당, 주민센터 등 다른 편의시설도 많다.
김 씨는 주민 인터뷰를 실시했다. 40명 이상을 만났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30∼50대 주부들이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들은 가까운 공공도서관 정도에 갈 수 있는데, 도서관에서 할 수 있는 여가 활동은 제한적이었다. 커피숍을 자주 가기엔 금전적인 부담이 컸다. 자녀 등하교 시간 때문에 주민센터, 문화원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김 씨는 반지하 공간(33m²) 중 70% 정도 면적에 의자, 테이블 등을 설치하기로 했다. 커피메이커 등 차를 만들 수 있는 간단한 조리기구도 구비된다. 주택 인근 마당, 정원 등을 활용해 작은 텃밭도 만들 예정이다. 김 씨는 “전문 강사를 초빙해 ‘맘키움 강의’ 등의 이름으로 부모 교육 프로그램도 열려고 한다. 주민들과 함께 텃밭을 가꾸고 채소 등 작물이 생산되면 이웃들과 나눠 먹으며 소통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 집수리 방법 알려주는 건축학교
건축설계사무소에 근무하는 건축가 김대청 씨(28)와 김요셉 씨(28)는 구로구 오류2동의 한 주택 반지하 공간 59.9m²(약 18평)를 맡았다. 이들은 일대에 마을 단위 도시재생 사업이 추진된다는 점을 고려해 ‘건축학교’를 개설하기로 했다. 간단한 집수리, 리모델링 등은 외부 업체에 맡기지 않더라도 주민들이 직접 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것. 건축 전문가를 초빙해 워크숍, 강의 등을 열고 주민들이 교류하며 도시 재생에 직접 참여하게 만들 계획이다. 김대청 씨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작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고 고민했다”며 “건축학교를 중심으로 주민들이 스스로 도시를 재생하는 모델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양천구 신월동, 성북구 정릉동 등 다른 3곳의 주택 반지하 공간에는 마을 자료실, 전시장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SH공사 관계자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청년 건축가들은 공간복지 등 관련 전문가들에게 사전 교육, 멘토링 등을 받았다”며 “도시 재생에 기여하는 창의적인 건축가를 더 양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하경 기자 whatsup@donga.com
---------------------------
“버려진 빈집, 쓸모있게 바꿔드립니다”
인천=박희제 기자입력 2019-12-05 03:00수정 2019-12-05 04:13
[주거복지를 넘어 공간복지로]
사회적 기업 ‘최고의 환한 미소’, 인천 빈집 재활용 프로젝트 추진
임대주택-사무실 등으로 개조
“동네 골칫덩이인 빈집이 주변에 더 이상 피해를 주지 않고 주민과 공존하게 할 활용 방법은 무궁무진합니다. 여러 실험을 통해 그런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청년 기업가 최환 씨(35)는 사회적 기업인 ‘㈜최고의 환한 미소’를 5년째 이끌며 빈집 활용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있다. 그는 인천 미추홀구 내 방치된 빈집을 다양한 용도로 개·보수해 청년 임대주택, 사무실, 스마트 도시농업, 일자리 창출 교육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일명 ‘빈집은행 프로젝트’를 통해 버려진 집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미추홀구 지원으로 추진되는 이 프로젝트는 2017년 대한민국 지방자치박람회에서 소개된 공동생산 우수사례였다.
최 씨 제안으로 옛 미추홀구 용현1·4동 주민센터는 빈집 활용의 베이스캠프 격인 ‘빈집은행’으로 단장돼 지난해 5월 개소식을 가졌다. 지하 1층에 공유 오피스 10개가 꾸며져 있고, 1층은 창의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메이커 스페이스’다. 3D 프린터, 레이저 자동 절삭기, 나무 합판 가공기계, 각도 절단기, 전기톱 등 집수리와 창작물 제작 때 필요한 크고 작은 100여 개의 기기를 갖추고 있다. 협동로봇도 있어 아이디어를 프로그래밍해 시험을 해보거나, 공용 기자재로 여러 창작물을 만들어볼 수 있다.
2층 교육과 모임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이틀간의 집중수업부터 1∼3개월 과정의 DIY(Do It Yourself·스스로 하라) 제작법, 3D프린트, 방수, 집수리 등의 국가자격증 취득이나 기술전수 교육이 펼쳐지고 있다. 최 씨는 “무박 2일 교육엔 수백 명이 강의를 듣기도 하지만 주로 주 1, 2회씩 저녁 시간에 이어지는 기술 강좌를 들으러 오는 30대가 많은 편”이라고 전했다.
최 씨는 5년 전 현수막을 재활용하는 사업을 펼치다가 우연찮게 빈집의 가치를 발견했다.
“폐현수막을 수거해 가방과 여성 구두(하이힐)를 만들고 패션쇼를 진행해 보았는데 자본력과 유통 마케팅 뒷받침 없이는 성공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동료 5명과 사무실 임차료와 집값을 아끼기 위해 조사를 하다 보니 빈집이 보였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빈집을 활용한 ‘집수리 리모델링’ 교육과정을 홍보하다가 한 노인이 고독사한 뒤 방치된 2층 단독주택을 얻어 사무실 겸 교육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악취가 심해 주민 신고로 노인이 숨진 사실이 발견됐다”며 “이 빈집을 임차해 리모델링에 들어간 비용만큼 무상으로 사용했고, 다른 빈집에도 이런 방식을 적용해 가치 있는 공간으로 바꿔왔다”고 말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소유의 빌라 중에서 임대가 이뤄지지 않는 지하나 반지하 빈집은 ‘스마트 도시농장’으로 변신시켰다. 최 씨는 “물이 역류하는 지하주택이어서 수리하더라도 세가 나가지 않는다”며 “그간 16채를 버섯재배 공간으로 바꿔 농사에 참여한 주민들이 월 100만∼150만 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고 소개했다. 최 씨는 LH로부터 20년 임차 계약을 맺고 지하주택을 작물 재배와 일자리 창출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는 빈집에서 청년들의 창업과 주거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모델 발굴을 위한 계획도 야심 차게 추진하고 있다.
인천=박희제 기자 min07@donga.com
출처 http://www.donga.com/news/Series/70030300000061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