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2023년 봄부터 여름까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월요 시국미사를 열었다. 마산부터 서울까지 계속 이어진 시국미사, 사제단은 시국미사를 열 때마다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성명서는 마치 시(詩)와 같았다. 나는 여기에 옮겨놓고 거듭 읽어보고자 한다. 성서 구절은 ‘공동번역성서’https://bible.cbck.or.kr/를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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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본색원이 답이다 2023.05.08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나의 백성은 이것을 좋아하니,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예레 5,31)
1. 기시다가 왔다
<월요시국기도회>가 전주, 서울, 마산, 수원, 광주를 거쳐 오늘 춘천에 이르렀다. “도대체 신부들이 왜 이러는 거요?” 하는 항의를 듣곤 한다. 사실은 하루를 여는 새벽마다 우리 스스로 던지는 물음이다. 우리는 왜 이러고 있는가? 그런데 우리도 묻고 싶다. 지금이 가만히 있어도 좋은, 아니 가만있어야 하는 그런 때인가? “가만있으라 세월호에”(2014.4.16.) 하던 박근혜도, “가만있으라 서울에”(1950.6.27.) 하던 이승만도 가고 없는데 날 저무는 것도 모르고 어째서 빈둥거리기만 하는가?
물론 참고 기다려주어야 할 때가 있다. 그래서 연이은 ‘외교 실패’/ 숱한 논란에 대한 ‘거짓 해명’/ 경제위기 속에서 부자감세·복지축소를 강행하는 ‘민생이반’/ 대통령 부부의 비리는 눈감아주고 야당대표 수사에만 몰두하는 ‘공작검찰’/ 대통령 전용기 MBC 탑승 배제, YTN 민영화 추진 등 ‘언론자유’ 파괴/ 공공 자산 ‘민영화’/ 중대재해처벌법·노란봉투법·안전운임제 등 ‘노동 인권’ 묵살/ 사고예방과 구조에 실패했으면서 진상 규명을 외면하는 ‘이태원 참사’를 지켜보면서 우리는 그저 묵묵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무능·독선 행보로 정치·외교·경제·사회 각 분야에 일대혼란을 일으켜도, “한국 대통령은 기본을 배워야 한다.”(이코노미스트)는 외신의 잔소리를 접하던 날에도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기다려주었다. 어서 대통령이 자신의 본분을 깨닫고 도리에 충실하기를, 그래서 피와 눈물로 이룩한 민주국가의 체계와 제도를 무너뜨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사람들의 울화와 환멸이 낙심과 무관심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빌었다.
그러나 윤석열 그는, 번뇌와 망상을 키웠을 뿐 잘못을 뉘우치거나 마음을 바로 잡으려는 아무런 성의도 보여 주지 않았다. 어제 드디어 일본 총리 기시다가 왔다. 윤석열이 일본, 미국과 손잡고 아무도 모르게 벌이는 모종의 거래들에 비하면 대다수 국민을 대경실색케 만든 저 끔찍한 일들은 어쩌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가 대한민국을 어둡고, 위험하고, 가난한 나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여 양심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재촉한다. 그만 침묵을 깨고 어서 행동하라고.
2. 화근인 사람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 ‘말’이 어떤 재앙을 부르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마구 떠벌이기만 하는 그는 화근禍根, 재앙의 가장 큰 뿌리다. 실성하지 않고서야 저럴 수 없다. 어느 집 가장이기만 했다면 일가의 풍비박산으로 끝날 일이겠으나, 망나니 칼춤 추듯 하는 그가 남북 칠천만 겨레의 앞날을 좌지우지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듯 오금이 저린다. 발본색원이 답이다. 1597년 7월 16일 칠천량 해전의 패배를 교훈 삼아 결단해야 한다. 당시 모든 전투에서 압도적인 격차를 보이며 일본 수군을 갖고 노는 수준의 최강 조선 수군은 멍청한 지휘관 한 명 때문에 어이없이 괴멸되다시피 했다. 판옥선만 무려 122척이 소실되었고 1만여 명의 경험 많은 조선 수군이 죽거나 행방불명되었다. 그날의 패전은 새로운 전쟁을 불렀다. 곧바로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대통령의 입만 화를 부르고 키우는 게 아니다. 언론을 공모자로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멸칭, ‘기레기’의 장본인들에게 말해서 무엇하랴만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느라 말과 글로써 사실을 비틀고 진실을 가려서 시민들을 속이고 있는 언론 종사자들이라도 1980년 5월 20일, 광주문화방송이 불타버린 일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대법원은 그날의 방화에 대해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행위”라며 무죄를 판결한 바 있다. 언감생심 지조와 기개를 기대하겠는가마는 국민들 눈에 그저 실리와 사욕만 추구하는 집단으로 비칠까 염려스럽다.
3. 아이들을 보아라
그러면 남은 것은 나와 너의 입이다. 흙으로 발암물질을 대충 덮고는 ‘용산어린이정원’이라 부르고, 후쿠시마 오염수가 아무 문제없다더니 해군은 매일 1천만 원 가량의 비상 식수를 준비하고 있다. 이것이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이다. 죽도록 피곤한 일상에 지칠 대로 지쳤겠으나 우리가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새싹 같은 어린이들은 물론이고 지금 우람한 젊은이들도 머잖아 낙심의 벽에 갇히고 말 것이다.
동화작가 권정생은 누구라도 자살을 하거나 자기 몸밖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고질병에 시달렸으나 오로지 아이들의 앞날과 평화를 걱정했다. 그래서 몽실 언니처럼, 억압받는 처지를 분노하거나 슬퍼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서로 보살피고 아껴주면서 삶의 근원적인 행복과 기쁨을 찾아가는 아름다운 주인공들을 탄생시켰다. 선생은 오늘도 말하리라. 강아지 똥이라도 환한 민들레꽃을 피우거늘 하물며 사람이 사람 속에 피우는 꽃은 얼마나 눈부시랴. 뜻 있는 이들의 작은 실천이 모여 역사의 흐름을 바로 잡았던 것이 한국 현대사다. 비바람 부는 날이라도 토요일이면 빌고 바라는 행동을 멈추지 않는 촛불 시민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나라가 위태로우니 “뭐라도 해야지, 나라도 나가야지” 하는 그들,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나부터 희망이 되면 된다고 믿는 그들이야말로 시대의 예언자다.
더 늦기 전에 교회도 목소리를 들려주어야 한다. “내 백성은 목자를 잘못 만나 이 산 저 산 헤매다가 흩어진 양떼처럼 되었었다. 보금자리를 잃고 산과 언덕을 헤매었다.”(예레 50,6) 하시던 주님의 탄식이 온 산하에 메아리치고 있다. 아직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식별하지 못하고 있거나 용기가 없어서 침묵하는 이들을 격려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선포이며 봉사다. 자애로운 어머니이면서 엄격한 교사인 교회의 사명이다.
4. 아버지들의 투쟁을 기억하고 행동하자
일주일 전 철근공 양회동 미카엘(춘천교구 청호동본당) 형제가 분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조 탄압을 일삼는 대통령이 ‘건설 조폭’을 운운해서 노동자의 명예를 더럽힌 것에 대한 항의였다. 이태원 참사 때도 건성이었던 대통령실은 “다시는 이런 불행한 사태가 되풀이되지 않기 바란다.”고 마치 남 말하듯 했다. 하지만 아는가? 철옹성 같은 권력이라도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를 함부로 대했다가 별안간 무너졌다는 사실을. 구약의 성전도, 신약의 성전도 그래서 불탔고 그래서 무너졌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알아채는 것이 참 지혜요 믿음이다.
갑오년 시월, “추수가 끝난 마을마다 곳간 속 묻어 뒀던 창, 엽총, 없는 사람은 쇠스랑, 낫까지 닦아 들고 나섰다. 만삭 아내의 귀밑머릴 만져주며, 병든 아버지의 머리맡에서 무릎 나온 아들딸들의 코를 닦아주며, 그리고 정든 기둥나무에 눈인사를 보내며 우리의 조상들은 서리 내린 아침 집을 나섰다.”(신동엽, 금강) “왜적을 몰아내자”, “썩은 왕실을 도려내자”는 깃발들이 펄럭였다. 안타깝게도 우금티 고개에서 악전고투했다. 상봉 능선에 일렬로 늘어선 왜군 제5사단의 최신식 화력. 야전포, 기관총, 연발소총이 불을 뿜었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 수백 명이, 그 흰옷들이 붉게 물들어가는 것을 본 수천 명이 차례차례 달려가고 뛰어들었다. 저 고개만 넘으면 새 세상이 열리는데 이 한 목숨을 아끼랴, 하면서. 그날 3만에 달하는 농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품위와 권리는 옛 어른들의 수고로 거저 받은 것들이니 우리도 우리의 수고를 거저 내놓음으로써 자라나는 세대를 복되게 하자.
2023년 5월 8일 어버이날
춘천교구 애막골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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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 5,31
31예언자들은 나의 말인 양 거짓말을 전하고, 사제들은 제멋대로 가르치는데, 내 백성은 도리어 그것이 좋다고 하니, 그러다가 끝나는 날이 오면 어떻게 하려느냐?
**예레 50,6
6내 백성은 목자를 잘못 만나 이 산 저 산 헤매다가 흩어진 양떼처럼 되었었다. 보금자리를 잃고 산과 언덕을 헤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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