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2023년 봄부터 여름까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월요 시국미사를 열었다. 마산부터 서울까지 계속 이어진 시국미사, 사제단은 시국미사를 열 때마다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성명서는 마치 시(詩)와 같았다. 나는 여기에 옮겨놓고 거듭 읽어보고자 한다. 성서 구절은 ‘공동번역성서’https://bible.cbck.or.kr/를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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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처럼 순박하고 뱀처럼 슬기롭게(마태 10,16)
우리는 이 싸움을 치러나갈 것이다
종말의 묵시록, 대한민국의 총체적 난국 2023.08.07.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지 이제 15개월이 되었다. 임기 60개월 중 4분의 1일이 지났는데, 우리는 이미 너무 고단하고 고통스럽다. 우리의 일상 곳곳을 잠식한 코로나 3년의 후유증이 여전히 생생하고, 국제정세의 불안으로 정치·경제 상황은 날로 험악해지는데다 인류의 탐욕이 초래한 기후위기로 인해 우리의 삶 전체가, 너무 위태롭다. 종말의 묵시록을 목도하고 있는 듯하다. 오송 지하차도에서 열넷의 사람이 죽었는데 공무를 맡은 이들의 윤리적 해이와 책임 떠넘기기는 여전하고 정치인들은 자기 정치에 골몰해 있다. 남편을 보내고 자식을 잃은 이들의 슬픔과 상처는, 갈 곳이 없다. 생때같은 자식들을 이태원의 거리에서 떠나보낸 부모들이 오송 지하차도의 유족을 위로하는 생경한 풍경, 이 잔인한 풍경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있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생명이 새털처럼 가벼워진 지금-이곳의 난국을, 오 어찌하랴.
159명이 거리에서 횡사했는데 국정의 최고책임자는 사과의 말 한마디한 바 없고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으니, 자연재해이지만 인재이기도 했던 오송의 참사 또 한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서이초등학교 선생님은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학교에서 생을 마감하여 자신의 억울함과 교단의 부당한 현실을 알리고자 했지만, 우리는 지난 5월에 이와 유사한 죽음을 이미 겪은 바 있다. 건설노동자 양회동 열사는 정당한 노조활동을 건폭으로 몰아간 이 땅의 현실을 향해 죽음으로써 자신의 억울함을 알리고자 했다. 죽음으로 죽음이 덮이고, 통곡이 또 다른 통곡에 의해 잦아드는 이 참담한 상황을 어찌하랴. 죽음이 전하는 목소리를 우리 공동체가 받아내지 않고서 억울한 죽음들을, 저 창자를 끊는 울부짖음과 소리죽여 우는 내 형제·자매의 흐느낌을 어찌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의 본성과 정치의 부재
우리는 국민이기 이전에 먼저 인간이어야 하며, 법에 대한 존중보다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더 중히 여기는 것이 옳은 일이다. <시민의 불복종>의 저자 소로우(H.D. Thoreau)의 말이다. 교실의 인권이 과연 법과 규정으로 바로 세워질 수 있는 일인가, 법적 책임이 없으면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저 무치(無恥)의 법기술자들에게 우리 공동체의 운명을 맡길 수 있겠는가. 맹자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 본성 넷을 기초로 하여 공동체의 운영과 정치의 지혜를 생각하였다. 어짊(仁)의 실마리인 측은히 여기는 마음, 의로움(義)의 실마리인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 예(禮)의 실마리인 감사하고 양보하는 마음, 앎(知)의 실마리인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 이 넷을 모든 인간의 본성이라 했건만, 윤석열 정부에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도, 부끄러워하는 마음도, 양보하는 마음도,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도 없으니, 지금-이곳에 정치가 부재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저들에게는 상대 진영에 대한 미움과, 국민을 피(彼)와 아(我)로 가르는 분열의 책동만이 있으니, 이를 어찌하랴.
그것은 정치가 아니다. 정치는 우리 모두가 동일하지 않은 존재라는 인간의 복수성에 대한 존중에서 오는 것이며, 정치 행위는 다름과 차이에서 오는 갈등을 전제로 한다. 하여 정치는 끊임없는 대화 과정에 자신을 내놓는 일이며, 이는 상대와 토론하고 애써 상대를 설득하려는 태도에 기초한 행위이다. 정치는 폐기처분하고 국민을 다스림의 대상으로 하는 통치행위만 창궐한 윤석열 정권, 윤석열 정부는 자기 진영만을 상대로 하는 노골적인 분열과 갈등의 책동을 반드시 중단해야 한다. 그것은 이곳의 현실을 끔찍한 분쟁의 장으로 만드는 행위이며, 우리의 미래를 강탈하는 행위이다.
대구의 과거와 현재
이곳 대구는 한말에는 의병운동,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해방기에는 민족의 역사를 실천으로서 고민했던 ‘10월항쟁’의 도시였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끊어낸 4월혁명의 맨 앞자리에 대구의 2.28이 있었으며 박정희 군부독재 시기에는 자신의 젊음을 내놓은 청년의 도시, 우국의 도시였다. 장기간의 군부독재 기간을 통과하며, 부패한 권력을 비판하고 권력의 폭력에 저항했던 야도(野都)로서의 대구는 이제 실종되고, 오직 영남 출신 기득권-정치집단의 기만과 오만에 온전히 포획되어 정치적 조롱과 혐오의 섬으로 전락한 땅이 된 지 오래이다. 항일과 우국의 도시가 지금-이곳의 대구와 무슨 관련이 있으며, 2.28이 오늘의 대구와 무슨 상관인가.
무도無道의 시대와 야만의 행렬
그럼에도 우리는 절망하지 않으며, 우리의 촛불을 다시 든다. 소수가 무력한 것은 권력에 순응하고 있을 때이다. 개와 돼지는 백만, 아니 천만이어도 개와 돼지일 뿐이지만, 비판의 촛불을 드는 우리는 적지만 결코 소수일 수 없다. 성서의 <판관기>에 등장하는 13만의 미디안 군대에 대항했던 3백의 기드온 병사들처럼, 정의에 대한 순수한 갈망과 지치지 않는 인내로서 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이어갈 것이다. 작은 물결이 거센 노도(怒濤)를 만들어 내듯이, 소수가 전력을 다한다면 거스를 수 없는, 아니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될 것이다. 공자는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부(富)하고 귀(貴)하면 부끄러운 일이라고 힘주어 말한 바 있으니, 이 무도(無道)의 시대에 나와 내 가족만의 안위를 위해 차마 편히 지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부끄러운 삶이다. 나와 내 가족의 삶이 소중한 만큼, 하느님이 조성한 내 이웃의 생명 또한 귀한 것이다.
한국사회의 전 영역이 처참하게 붕괴되고 있다. 노동자를 조폭으로 몰아가는 노동 탄압, 기업의 영업사원을 자처하며 사회적·경제적 약자들을 외면하는 친기득권 정치, 反헌법적이고 굴욕적인 일본강제징용 제3자변제안, 분단된 한반도 상황에서 균형감각을 포기하고 이웃 국가들을 갈라치기하는 호전적인 외교,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언론 탄압, 159명의 죽음에도 어떤 책임도 느끼지 않는 10·29이태원참사, 일본 정부의 대변인을 자처하는 후쿠시마 핵오염수 대응, 몰상식과 몰염치의 양평고속도로, KBS·MBC·EBS 공영방송 이사진 동시 해임 시도, 국제적 망신이 든 잼버리대회 등 … 끝없는 반동과 참사가 줄을 잇고 있는 윤석열 정부의 폭거와 무능, 그리고 자의적인 통치행위를 묵과하는 것은 우리의 공동체를 불덩이에 몰아넣는 일이며, 우리의 미래를 폐기하는 일이다.
환대의 도시, 생명의 땅을 위한 기원
대구는 오만한 통치자들이 참사와 실정(失政) 때마다 기만적인 환약(丸藥)을 제공하는 맹목(盲目)의 환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이는 자신의 과오를 돌아볼 줄 모르는 저 통치자들을 어떠한 반성이나 성찰도 불가능하게 하는, 끔찍한 괴물로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우리 사회 전체에, 그리고 우리의 미래세대에 죄를 짓는 일이다. 그러한 따뜻한 환대는 우리 공동체 안팎의 사회적·경제적 약자를 살피고 돌보는 일에 마땅히 돌려져야 한다. 권력자들에는 준엄한 비판의 채찍을 들 줄 알고 약자들에게는 따뜻한 환대를 베푸는 건강한 시민들의 도시를, 우리는 꿈꾼다. 권력자를 살찌우는 패역한 땅이 아니라 수난에 처한 이들을 살리고 북돋우는 생명의 땅이 되기를 우리는 간절히 소망한다.
척박한 도시 대구에서, 우리는 다시 촛불을 든다. 대구가 바뀌면 대한민국은 한걸음 나아갈 수 있다. 권력의 과오에 대한 마땅한 비판을 선동정치로 돌려세우고 국민의 정당한 생명권의 요청을 괴담으로 몰아가는 이 뻔뻔한 괴물 통치의 시대, 부끄러움과 수치를 잃은 이 참담한 시대에, 우리는 비둘기처럼 순박하고 뱀처럼 슬기로운 마음과 태도로써 우리의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 끝까지 인내하며 지치지 않고 싸워 나갈 것이다. 하느님과 한반도의 역사가, 우리의 길에 동행할 것이다.
2023년 8월 7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구시국미사추진위원회,
윤석열심판대구시국회의, 대구경북대전환연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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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0,16
16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
**판관기 6, 1-40
1 또다시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자, 야훼께서는 그들을 칠 년 동안 미디안족의 손에 부치셨다. 2 그래서 이스라엘은 미디안족에게 억눌려 살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미디안 사람들을 피하려고 산 속에 굴을 파야 했고 동굴과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야 했다. 3 이스라엘 사람들이 씨를 뿌릴 때만 되면 미디안 사람들은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백성을 이끌고 올라와 4 진을 치고 이스라엘을 쳐서 가자 어귀에 이르기까지 온 땅의 농사를 망쳐놓곤 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먹고 살 것을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고 양 한 마리, 소 한 마리, 나귀 한 마리도 남겨두지 않았다. 5 그들은 가축떼를 몰고 천막을 떠멘 채 메뚜기떼처럼 몰려왔다. 사람이고 낙타고 이루 다 셀 수 없이 몰려들어와 온 땅을 망쳐버렸다. 6 이리하여 미디안은 이스라엘을 극도로 황폐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은 또 야훼께 울부짖었다. 7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 사람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야훼께 부르짖자, 8 야훼께서는 한 예언자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시어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였다. 종살이하던 집에서 너희를 구출해 내었다. 9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너희를 못살게 굴던 모든 사람의 손아귀에서 너희를 건져내었다. 그리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다. 10 그리고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느님 야훼요 아모리인들의 땅에서 산다고 해서 그들의 신들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끝내 너희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11 야훼의 천사가 아비에젤의 후손 요아스의 성 오브라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와서 앉았다.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밀 이삭을 포도주틀에서 떨고 있었는데, 12 야훼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일렀다. "힘센 장사야, 야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13 기드온이 반문하였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야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왜 우리가 지금 이 모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실 때 야훼께서 온갖 기적을 행하셨다는 말을 우리는 선조들에게서 들었습니다마는 그 기적들이 지금 다 어디로 갔습니까? 지금은 야훼께서 우리를 버리셨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미디안 사람들의 손에 부치시지 않으셨습니까?" 14 그러자 야훼께서 그를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 "너에게 있는 그 힘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러 가거라. 내가 친히 너를 보낸다." 15 기드온이 말하였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아시는 대로 우리 문중의 부대는 므나쎄 지파에서도 가장 약합니다. 또 저는 제 집안에서도 가장 어린 사람입니다." 16 야훼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미디안을 한 사람 해치우듯 쳐부수리라." 17 기드온이 말하였다. "정말로 제가 눈에 드셨거든,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당신이시라는 표를 보여주십시오. 18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 때까지 여기를 떠나지 말고 계십시오. 예물을 내다 드리겠습니다."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돌아올 때까지 이 자리에 있겠다." 19 이 말을 듣고 기드온은 물러가 새끼 염소 한 마리를 잡아 요리하고 가루 한 에바로 누룩 넣지 않은 떡을 만들었다. 그리고 고기를 바구니에 담고 국물은 그릇에 담아 상수리나무 아래에 있는 그에게 가져갔다. 기드온이 오는 것을 보고 20 야훼의 천사가 그에게 일렀다. "고기하고 누룩 넣지 않은 떡을 가져다가 이 바위 위에 놓고 국물은 그 위에 부어라." 기드온이 그대로 하자, 21 야훼의 천사는 손에 든 지팡이를 뻗쳐 그 끝을 고기와 누룩 넣지 않은 떡에 대었다. 그러자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누룩 넣지 않은 떡을 살라버렸다. 야훼의 천사는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22 그제야 기드온은 그가 야훼의 천사라는 것을 알고 말하였다. "오, 주님 야훼여, 제가 주님의 천사를 대면해 뵈었군요!" 23 야훼께서 "안심하여라. 너는 죽지 않을 테니 두려워하지 마라." 하셨다. 24 그리하여 기드온은 거기에서 야훼께 제단을 쌓아 바치고는 그 제단을 "안심시켜 주시는 야훼"라 이름지어 불렀다. 그 제단은 이날까지도 아비에젤의 성 오브라에 서 있다. 25 그 날 밤, 야훼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네 아비의 일곱 살 된 살진 소를 끌고, 네 부하 열 사람을 데리고 가서 네 아비의 바알 제단을 허물고 곁에 있는 아세라를 찍어라. 26 그리고 이 산성 꼭대기에 너의 하느님 야훼께 바칠 제단을 차곡차곡 쌓아라. 그리고 그 살진 소를 잡고 찍어낸 아세라 목상을 태워 번제를 드려라." 27 기드온은 부하 열 사람을 데리고 야훼께서 시키신 대로 하였다. 그러나 집안 사람들과 성읍 사람들이 두려워 낮에 하지 못하고 밤에 해치웠다. 28 다음날 아침 일찍 성읍 사람들이 일어나 보니, 어이없게도 바알의 제단은 헐려 있었고 곁에 서 있던 아세라 상은 찍혀 있었으며 새로 선 제단 위에는 살진 소가 번제로 타오르고 있었다. 29 그들은 누가 이런 짓을 했느냐고 서로 부산을 떨며 조사하고 캐어본 결과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한 일임을 알아냈다. 30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요아스를 닦달하였다. "당신 아들을 내놓으시오. 죽여버려야겠소. 바알의 제단을 헐고 곁에 서 있던 아세라 상을 찍어버렸는데 어찌 그냥 두겠소?" 31 요아스는 둘러선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답변하였다. "당신들이 바알을 역성하겠다는 거요? 당신들이 바알을 도울 수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바알을 역성하는 사람은 해 뜨기 전에 죽을 테니 그리 아시오. 만일 바알이 신이라면, 기드온이 바알의 제단을 헐었으니 친히 나서서 기드온을 칠 것이 아니오?" 32 그 날 기드온은 여룹바알이란 이름을 얻었다. 바알의 제단을 헐었기 때문에 바알이 그와 맞설 것이라 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33 마침 미디안 사람들은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백성들을 다 모아가지고 강을 건너 이즈르엘 평지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34 야훼의 영이 기드온을 사로잡았다. 그러자 기드온은 뿔나팔을 불어 아비에젤 일족에게 따라 나서라고 하였다. 35 그는 또 전령들을 므나쎄 온 지파에 보내어 므나쎄 지파도 따라 나서라고 불러내었다. 아셀 지파와 즈불룬 지파와 납달리 지파에도 전령들을 보내니 그들도 올라와서 기드온과 합세하였다. 36 기드온이 하느님께 아뢰었다. "이미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을 제 손으로 구하시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이렇게 해주십시오. 37 보십시오. 제가 타작 마당에 양털 한 뭉치를 이렇게 펴놓습니다. 만일 이 양털 뭉치에만 이슬이 내리고 땅바닥은 말라 있으면,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을 제 손으로 구하시려는 줄로 알겠습니다." 38 정말 그대로 되었다. 기드온이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양털 뭉치를 짜보니 한 대접 가득 물이 나왔다. 39 기드온은 다시 하느님께 아뢰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린다고 노하지 마십시오. 양털 뭉치로 꼭 한 번만 더 시험하게 해주십시오. 이번엔 양털만 말라 있고 사방의 땅바닥은 이슬로 젖게 해주십시오." 40 그 날 밤 하느님께서 그대로 해주셨다. 양털은 말라 있었고 사방의 땅바닥은 온통 이슬로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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