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특별기고]'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공교육과 그가 죽었다
중앙일보 입력 2023.08.04 06:00 업데이트 2023.08.04 09:27
[특별기고] 소설가 김훈, 교사 집회현장을 가다
지난달 29일 오후 2시에 전국 교사 3만여 명이 서울 광화문 앞 거리에 모여서 ‘교육권 보장’을 외쳤고, ‘악성 민원’에 시달리고 짓밟히는 교육자의 고통을 호소했다.
교사들은 교육자의 ‘교권’뿐 아니라 ‘인권’과 ‘생존권’까지도 절규했다. 서울교육대학교 교수 10여 명이 이날 집회에 참가했고, 교수 102명의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교사들은 교원단체나 노동조합이나 소속 학교의 깃발을 내세우지 않고 다만 ‘전국교사일동’의 이름으로 집회를 열었다. 행사를 진행하는 중견 교사는 참가자들에게 “배포된 피켓 이외의 구호를 외치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이날 집회가 정치적 당파성에 오염되는 사태를 교사들 스스로가 경계하고 있음을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날 집회에서 검은 상복을 입은 3만여 명의 교사는 선생 노릇 하기의 어려움을 일기에 써놓고 자결한 젊은 여교사의 죽음을 애도했고, 고인이 아이들과 함께 이루고자 했던 뜻을 추모했다. 이날 낮기온은 34도였고, 아스팔트 위의 온도는 50도가 넘었다. 길바닥의 주저앉은 검은 상복의 대열은 길어서 끝이 아물거렸고, 아스팔트가 뿜어내는 열기 속에서 흔들렸다. 그 고통스러운 대열이 외쳤다.
“공교육은 죽었다” 그 배후는 학부모라는 익명 집단
(사진)지난달 30일 서울 서이초등학교를 찾은 소설가 김훈. 학교 건물과 담장에 여러 지방에서 온 교사들이 고인이 된 젊은 여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포스트잇으로 빼곡하게 붙어 있다. 동행한 출판인 김영훈씨가 촬영했다. 사진 김영훈
이날 교사들이 절규하는 고통은 실체가 분명했다. 요약하자면, 교육을 망치는 가장 큰 해악은 ‘악성 민원’이고 교육청, 교장, 교감 등 교육의 관리자들은 이 사태의 뒷전으로 물러서 있다는 말이다. 이날 집회에서 교사들은 ‘학부모’라는 익명의 거대 집단을 직접 겨냥해서 발언하지 않았고, 다만 ‘악성 민원’이라고, 에둘러 가는 언어를 사용했다. 교사들의 조심스러운 태도에는 어쨌거나 학부모들이 교육의 과정을 함께 수행해 나가야 할 파트너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교사들이 자신들의 집회에서 정치적 당파성을 배제하고, ‘학부모’에 대해 거친 언사를 쓰지 않는 조심스러움에서 나는 교사들의 집단지성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악성 민원’은 학생들이 아니라 학부모들이 제기해 온 것이므로, 무대 조명 안으로 소환되지 않은 ‘학부모’라는 익명 집단은 이 사태의 핵심이며 배후였다. 전국 교사 3만여 명이 도심의 거리에 모여서 교육에 가해지는 학부모 집단의 행태에 절규하고 저항하는 사태는, 아마도 세계 공교육의 역사상 초유의 일일 것이다. 이날, 검은 상복의 대열은 폭염 속에서 거듭 외쳤다.
(사진)지난달 30일 서울 서이초등학교를 찾은 소설가 김훈. 학교 건물과 담장에 여러 지방에서 온 교사들이 고인이 된 젊은 여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포스트잇으로 빼곡하게 붙어 있다. 동행한 출판인 김영훈씨가 촬영했다. 사진 김영훈
젊은 여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버린 서울 서이초등학교 주변 일대는 전국의 교사와 시민들이 보내온 조화로 도시의 한 블록이 뒤덮였다. 한 새내기 여교사의 죽음에 모이는 이 거대한 조문의 대열은 공교육이 이 사회의 저변에서 일상적으로 그리고 전면적으로 붕괴되어갔던 사태를 증언하고 있다. 사람이 모이고 말이 들끓는 자리에 얼굴을 들이밀고 마이크 잡기를 좋아하는 정치세력들은 이 조문의 대열에 조화를 보내오지 않았다. 판세에 민감한 그들은 학부모 집단과 교사 집단의 갈등이라는 이 사태의 심층구조가 얼마나 두렵고 또 난감한 것인지를 알고 있고, 진영의 입장으로 여기에 섣불리 개입했다가는 득 될 것이 없다고 정세판단을 내렸을 수도 있겠지만, 인산인해를 이룬 이 고통스러운 조문 행렬이 보여주는 탈정치, 무정치의 풍경은 정치의 부재, 정치의 실종을 느끼게 했다. 그토록 끓어 넘치는 정치는 다 어디로 갔는가. 서이초등학교의 건물과 담장에는 여러 지방에서 온 교사들이 고인이 된 여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포스트잇으로 붙어 있다.
-너도나도 당하면서 이게 우리 직업이려니 하면서 참고 살았습니다.
-다들 당하는 걸 보면서 ‘난 운이 좋아서 안 당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부당함에 맞서는 사람이 되라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과 똑같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제가 먼저 소리 내지 못했습니다.
(사진)지난달 29일 정부서울청사 인근 도로에서 열린 서이초 교사 추모식 및 교사 생존권을 위한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날 주최 측 추산 3만여 명이 참가했다. 뉴스1
이 슬픈 편지들의 전언은 힘없는 자들의 힘이 무수한 파편으로 흩어져서 각자의 울음을 따로 우는 소리로 들렸다. 교사들은 이 편지에서도 ‘학부모’라는 익명 집단을 직접 호출하지 않고 있다. 나는 교사가 아니므로, 이 ‘악성 민원’의 실체를 교사들보다 덜 점잖은 언어로 말하려 한다. ‘악성 민원’의 본질은 한마디로 한국인들의 DNA 속에 유전되고 있는 ‘내 새끼 지상주의’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내 새끼’를 철통 보호하고 결사옹위해서 남의 자식을 제치고 내 자식을 이 세상의 안락한 자리, 유익한 자리, 끗발 높은 자리로 밀어 올리려는 육아의 원리이며 철학이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나의 자식이 겪게 되는 작은 불이익이나 훼손을 견디지 못하고 사회관계망 전체를 뒤흔들어 버린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아이들 사이의 사소한 다툼이 ‘내 자식’을 편드는 부모의 싸움으로 확전돼 교사를 괴롭히는 사례는 흔하고, ‘내 자식’을 편들며 달려드는 학부모의 태도는 울면서 떼를 쓰는 아이와 같다고 경험 많은 교사는 말했다. 이렇게 해서 ‘내 새끼 지상주의’는 자식을 명품 시계나 고가 핸드백처럼 물신화한다. 이것은 이제 이 난세의 생존술이고 이데올로기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계층의 차이가 없이 고루 퍼져 있지만, 부유층 밀집지역의 ‘악성 민원’이 더욱 잦고 사납고, 위압적이라는 일선 교사들의 고백은 이들을 행세하게 하는 부(富)의 천민성을 증언하고 있다. 사실, 이 ‘내 새끼 지상주의’는 이 나라 수많은 권귀(權貴)들에 의해 완성됐다. 국회 인사청문회에 나온 고위 공직자 후보들은 너도나도 그 자식을 일류대학에 보내기 위해 실정법을 위반해 가며 학원 좋고 학군 좋은 동네로 거듭 위장 전입을 해왔는데, 이 정도 범죄는 매우 경미한 사안이다. 위장 전입이 문제돼 공직 임명에서 탈락한 사람은 없다. 이런 위법행위들은 애끓는 모성애, 부성애, 또는 맹모삼천(孟母三遷)의 미담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공동체의 가치는 파괴됐고, 공적 제도와 질서는 빈껍데기가 되었다. 아마도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지위에 오른 인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의 부인일 터인데, 그는 아직도 자신의 소행이 사람들에게 안겨준 절망과 슬픔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일가가 관련된 재판의 과정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인연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미망(迷妄)일 수가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나 자신의 무명(無明)과 마주 대하고 있었다.
새내기 여교사의 죽음과 전국 교사들의 대규모 조문 사태는 한 시대의, 전체의 통렬한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내 새끼 지상주의’로 몰락해 가는 현실을 향해 ‘반성’을 말하는 것은 무력한 관념의 신음처럼 들리지만 뉘우침의 진정성이 없다면 문제를 헤쳐 나갈 추동력은 발생하지 않는다.
정부가 내놓은 ‘해법’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아동학대 처벌법을 고쳐서 ‘정당한 지도 행위는 신고하거나 처벌하지 않는다’라는 취지의 조항을 신설하자는 것이다. 여야는 이 법안에 대해 의견이 접근해 가고 있다고 여러 매체가 보도했다. 이 법안이 ‘해결책’으로 내세우는 ‘정당한’이라는 한마디의 형용사는 며칠 전 야당이 방탄 국회라는 비난을 벗어나기 위한 개혁안을 발표하면서 ‘정당한 영장청구에는 면책특권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정한 것과 똑같다. 이것은 언어의 농간(弄奸)이다. ‘정당한’이란 한마디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이 형용사는 매끄러워서 붙잡을 수 없고 아리송해서 기댈 수 없다. 이 몽롱한 형용사 한 개로 괴물을 막으려 한다면 더 큰 괴물이 달려든다. 두 번째 괴물은 더 많은 언어와 세련된 논리를 동반하고 달려들게 되는데 이 세련된 논리는 사태를 정돈하지 않고 더욱 헝클어 버려서 수렁으로 빠뜨린다.
상처받은 교사들에게 직무 연수교육을 강화하고 심리상담과 치료를 해주겠다는 ‘대책’은 고마운 것이기는 하지만 이 사태의 본질과 관련이 없는 것이라고 교사들은 말했다. 교사들의 경험 부족, 자질 부족, 열정의 부족으로 이 같은 사태가 벌어진 것이 아니며, 민원을 퇴치하는 개인기를 길러주고 상처를 힐링해 주겠다는 것은 개선책이 아니라고 현장에서 만난 교사들은 말했다. 교사들은 개별적 교사 한 명씩을 이 무겁고 또 무서운 사태 앞으로 내세우지 말고, 교육청, 교장, 교감이 교사들과 함께 사태의 전면에 나서 주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지위 높은 선생님들은 사태를 빙 돌아서 형용사 ‘정당한’ 뒤로 숨어들고 있다.
29일의 광화문 집회에 참석했던 교직 2년 차의 젊은 교사는 이날 집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이초등학교 분향소에 들러 숨진 동료 여교사에게 바치는 편지를 써서 붙였다.
-오늘 4만 명이 거리에 모여서 외쳤습니다. 교육대학교 교수님들도 함께 외쳤습니다. 다들 함께 외쳤습니다. 다들 함께 외쳤으니까 이제 무언가 달라지겠지요. 선생님.
편지는 ‘함께 외쳤다’는 사실을 희망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이날 현장에서 이 젊은 교사의 ‘희망’은 아직은 울음으로 보였다. 광화문 앞거리의 거대한 울음은 이 시대의 지층 맨 밑바닥까지 울려야 하는 울음이다. 숨진 여교사는 지금 이름도 없고 사진도 없다. 숨진 여교사가 이름 석 자와, 웃는 표정의 사진으로 돌아오기를 교사들은 바라고 있었다.
‘전국교사일동’은 8월 5일 토요일 광화문 앞거리에서 다시 모인다.
◆김훈=1948년 서울 출생. 한국일보 등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뒤늦게 작가가 됐다. 장편소설 『하얼빈』 『칼의 노래』 『달 너머로 달리는 말』,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 산문집 『연필로 쓰기』 등이 있다. 동리문학상·황순원문학상·동인문학상·이상문학상·대산문학상 등을 받았다.
소설가 김훈
출처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82441#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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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이야기꾼' 김훈을 착취하지 말라
민들레 이명재 에디터 promes65@daum.net 입력 2023.08.05 10:40 수정 2023.08.05 12:44
중앙일보 기고, 한국사회에 대한 표피적 이해
그에게 과중한 짐 지우며 명성 '소비' 안 돼
소설가 김훈이 젊은 여교사의 죽음에 대해 중앙일보에 특별기고를 했다.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이라는 제목으로 1면에서 시작해 안쪽의 한 면을 내준 이 글은 김훈의 대부분의 글들이 그렇듯 많은 이들이 읽었을 듯하다. 서이초교 젊은 교사의 죽음을 추모하는 교사 집회 현장을 다녀와서 쓴 이 글은 역시 ‘김훈다웠’다. '이야기꾼' 김훈다운 글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작가' 아닌 이야기꾼으로서의 김훈다움을, 김훈의 글다움을 보여줬다.
"한국인 모두의 죄, 조국 일가가 최악이다"
그의 집회 현장 취재기는 분명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 죽음 속으로, 그 죽음의 슬픔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게 했을 것이다. 그의 소설들이 독자들을 몰입하게 하듯 그 기고는 많은 이들을 문제의 현장으로 들어가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깊이 들어갔던 것은 그 집회의 '현장'까지였다. 그 현장을 넘어선 교사의 죽음을 불러온 한국 학교의 현실, 그같은 학교와 교육을 있게 하는 한국사회의 '현실'에까지 들어갔는지는 의문이다. 현장에의 몰입이 곧 그 현실의 근저와 총체로의 진입은 아닌 것이다. 그의 글에서 그러나 현장의 슬픔과 분노를 넘어선 한국의 학교와 교육과 사회의 큰 현실, 심층의 현실은 잘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 점이 김훈을 소설가로서의 이야기꾼은 되게 하지만 작가로서의 김훈이라고 하기 힘든 점이기도 하다. 이는 결코 소설가에 대한 폄하로서의 얘기가 아니다. 다만 작은 이야기라는 뜻의 '소설(小說)'로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으로서의 김훈의 탁월함이 동시에 드러내는 작가, 지식인으로서의 김훈의 미달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는 큰 주제도 작은 이야기로 만드는 이야기꾼으로서 뛰어나다. 그리고 그렇게 작은 이야기로 만드는 것에서의 성공이 그를 이야기꾼을 넘는 '작가' 되는 것에서의 실패로 이끈다.
그러나 이 글은 결코 그에 대해 탄핵이나 비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에 대한 원군으로서, 그를 위한 변명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를 언론으로부터 지켜주고자 하는 것이다. 언론은 그를 '소비'하고 있다. 언론은 은둔형인 그를 수시로 불러내 짐을 맡긴다. 한국사회에 큰 일이 터졌을 때 그로 하여금 그 문제의 현장으로 가게 하고, 고발케 하며 때로는 해법까지 내리게 한다. 그러나 언론은 그를 다만 이야기꾼으로 있게 해야 한다. 그에게 과중한 짐을 지우지 말아야 한다. 그를 '착취'하지 말아야 한다.
집회장에서 김훈은 ‘이 고통스러운 조문 행렬’이 “정치의 부재, 정치의 실종을 느끼게 했다’고 말한다. 서이초교 건물과 담장에 붙어 있는 고인 앞으로 온 편지들에서 교사들을 괴롭히는 ‘악성 민원’의 본질을 “한마디로 한국인들의 DNA 속에 유전되고 있는 ‘내 새끼 지상주의’다”라고 결론 짓는다. 부유층 밀집지역의 ‘악성 민원’이 더욱 잦고 사납다면서도 ‘내 새끼 지상주의’가 계층의 차이가 없이 고루 퍼져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의 끝에 결론처럼 덧붙이는 말은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한 이, 게다가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지위에 오른 인물로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의 부인을 지목한다. 그리고는 그에 대해 준엄히 꾸짖는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소행이 사람들에게 안겨준 절망과 슬픔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서이초교 교사의 죽음에서 한국인 모두에게 죄 있음을 자복하라는 고해를 요구하고, 한 시대와 한국인 전체의 통렬한 반성을 요구하면서도 '한국인들 모두'의 죄인됨의 최악으로서 조국 일가를 지목하는 그의 글은 하나의 '이야기'로는 성립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이 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진단과 처방으로 타당한 것일지는 의문이다.
‘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라는 찬사를 거느리는 그는 문체의 탐미를 추구하는 이로 이름나 있다. 특별기고에서의 그의 글은 그가 <칼의 노래>에서 정철의 글에 대해 “허무하고 요염했다”고 했듯이 자신의 문장에서 허무와 요염을 보여주고자 한 것인가.
소설 작품 속 주인공들은 그 작품의 작가만큼 얘기를 하는 법이다. <하얼빈>에서 안중근은 '한 남자'로 그려진다. "나는 안중근의 '대의'보다도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블을 지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그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 있는 몸에 관하여 말하려 했다." 그는 '다른 또 하나의 남자', 이토라는 남자에 맞서는 남자로 그려진다. 망국의 청년지사 안중근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동양평화주의자 안중근은 희미하다. 하얼빈의 거사에 이르는 과정은 다만 남자 대 남자로서, 이토와 승부를 벌이는 경기와도 같이 그려진다. 이 책에 <두 남자 이야기>로 제목을 붙여도 좋을 것이었다.
안중근이 지금의 한국에 다시 되살아온다면 그가 부닥치고 처절히 고뇌했을 한국의 현실과도 같은 현실은 김훈의 기고에는 없다. 현실은 없고 다만 '상황'만 있을 뿐이다. 현실과의 두절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실의 일부만 있을 뿐이다. 그의 눈에 비친 일부의 현실, 광각 렌즈가 아닌 그 자신이 서 있는 현장에 들어오는 현실의 일부만 있을 뿐이다.
그것이 김훈의 문체이며, 김훈의 문학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문학의 한 현황이며 자산일 수 있다. 소설가가 사회학자일 필요도 없다. 그에게 현실을 넓게 깊게 보라고, 현실과의 긴밀한 접합과 교섭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에게 사회적 실천으로, 지식인으로 나서주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에게는 다만 자기의 '자리'가 있는 것이다.
작가, 지식인 역할 강요하지 말라
그에게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현실과는 다른, 혹은 자신을 그 현실로부터 빼돌린 다른 현실의 세계가 있을 것이다. 그 탈현실의 인식은 결국 탈아(脫我)가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거기에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자신의 소임이 있고 역할이 있을 것이다. 다만 자신이 보고자 하는 현실 외에서는 이방인 국외자가 되는 그의 글은 그래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는 하나 현실을 제대로 드러내지도, 그와 대결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명성은 일종의 의무다. 그것은 쌍방에서의 의무, 즉 그 명성의 주인 자신에게도, 그 명성을 가져다 주는 그 사회에게도 의무이다.
언론이 그 명성을, 그 명성의 주인인 김훈을 '소비'하고 있다. 그러나 김훈은 다만 김훈식의 소설로, 김훈 소설이 주는 흥미와 위안으로 놔 두는 게 좋겠다. 그에게 감당하기 힘든 과제를 맡기지 말아야 한다. 단편과 꽁트로서의 현실을, 이야기꾼으로서 보는 눈으로 한국 현실에 대한 장편과 대하를 쓰라는 과도한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
김훈은 중앙일보 기고에서 아동학대처벌법 개정안의 ‘정당한 지도 행위’에 대해 ‘정당한’이라는 한마디의 형용사를 “야당‘이 방탄 국회라는 비난을 벗어나기 위한 개혁안을 발표하면서 ‘정당한 영장청구에는 면책특권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정한 것과 똑같다”고 하고, 이것을 언어의 농간(弄奸)이라고 규탄하며 ‘정당한’이란 형용사는 ‘매끄러워서 붙잡을 수 없고 아리송해서 기댈 수 없다’고 말한다.
언론으로부터 기고 요청을 받은 그로부터 '붙잡을 수 없고 아리송한 말'을 듣게 되는 것, 그가 그런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은 그 자신의 비애이며, 그에게 '한국 대표 작가'라는 이름을 붙이는 우리 사회의 비애가 된다. 한국 언론에 의한 비애다. 한국 언론은 김훈을 다만 김훈으로, '이야기꾼' 김훈으로 놔둬야 한다.
출처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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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
2023년 8월 5일
"아마도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지위에 오른 인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의 부인일 터인데, 그는 아직도 자신의 소행이 사람들에게 안겨준 절망과 슬픔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김훈의 글)
내가 김훈류의 소위 '자유주의자'들을 경멸하고, 역겹게 여기는 장면이 바로 이런 거다. 내 자랑 같지만, 나는 내 예감에 따라 사람을 판단할 때가 있는데, 김훈, 하루키 같은 작가들은 일찌감치 내 판단에서 한쪽으로 제껴진 인물들이다.
사람들은 김훈의 문장이 대단하다고, 헤밍웨이를 닮았다고 말하지만, 그건 기자를 오래 해서 생긴 문장의 특성일 뿐, 그게 무슨 대단한 문장도 아닌데, 그의 아버지 후광과 함께 허명을 얻은 인물이다.
나는 김훈이나 하루키의 작품을 읽지 않는데, 많은 사람이 좋다고, 훌륭하다고 해도 나에게는 그렇게 여겨지지 않았다.
오늘, 아래 김훈의 글을 읽으면서, 이런 자들이 조국 교수를 비난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다. 김훈이 과연 조국 교수와 그의 가족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정확히 이해는 할까? 김훈은 가끔 사고로 죽은 노동자를 위해 글을 쓰기도 한다. 그러면서 마치 자신이 진보적인 태도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데, 그건 그의 독자나 그를 아는 대중을 기만하는 행위다. 김훈은 어쩌면 조해일 작가를 닮고 싶었는지 모른다. 평생 노동 현장에 있었던 조해일 작가는 그것이 '진심'이었지만, 잘 먹고, 잘 사는 김훈이 노동자의 죽음에 관심을 갖는 건 '어쩌다 한 번'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아래 글에서 김훈은 이번 서이초 교사의 자살 사건과 그 사건으로 분노한 교사들의 집회를 보면서, 한국 교육의 문제를 '내 새끼 중심주의'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가 옳은 것도 아니지만, '내 새끼 중심주의'에서 가장 극악한 인물로 조국 교수와 정경심 교수를 꼽은 건, 참으로 가증스럽고, 악랄하며, 역겨운 태도다.
조국 교수를 비난하고 싶으면, 그냥 비난하면 된다. 김훈처럼 글 나부랑이를 쓰는 자들은, 자신의 글로 다른 사람의 영혼에 흠집을 내고, 상처를 입히며, 타격한다. 조롱하고, 비난하고, 책임지지 않을 내용을 활자로 써낸다.
정작 비난받아야 할 범죄자인 권력자와 정치가, 행정책임자들에게는 아무 말도 못하면서, 결백한 조국 교수와 정경심 교수를 향해 저주와 비난을 퍼붓는다.
나는 김훈류의 자유주의자들이야말로 수구반동보다 더 악질이고, 나쁜 인간들이라고 여긴다. 나는 김훈이 쓴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지만, 어쩐 일인지 집에 한두권 눈에 띈다. 당장 내일 날이 밝으면 발기발기 찢어버릴테다. 예전에 이문열이 수구반동이 되면서, 사람들은 그의 책을 불태웠고,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내가 가진 책 가운데 이문열의 책은 한 권도 없다. 김훈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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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bina Kuk
2023년 8월 6일
김훈 씨에게.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지위에 오른 인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의 부인"이라고 적으셨더군요.
재판을 지켜본 소수의 시민 중 한 사람으로서 실소를 금할 수 없습니다. KIST에서 갑질, 열정페이를 당하고도 말 한마디 못한 것, 만점에 가까운 텝스 성적, 500시간의 봉사활동도 "내 새끼 지상주의"가 되는군요. 귀국학생으로 외고를 갔고 어학성적으로 고려대를 갔고 아빠 직장인 서울대 의전원 면접에서 나경원이나 정호영처럼 부탁하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해서 0.05차로 떨어졌지만 업무방해로 부모가 기소되고 유죄 받은 것이 영세불망의 지위군요.
알렉스 한과는 달리 단국대, 공주대 지도 교수가 성실성을 인정했고 구체적으로 입시에 이용하지 않았어도 그게 영세불망의 지위가 되는군요. 어학성적이 주 합격원인이었던 부산대 의전원. 동양대 봉사활동을 목격한 사람이 여럿 있고 자소서에 썼을 뿐이지만 사법부와 학교에서 버림 받은 것이 영세불망의 지위가 되는군요.
당신의 외동딸 얘기해봅시다. "딸아이가 10분짜리 영화 찍는다고 해서, 돈을 1000만원을 줬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지요. 당신의 소설 '남한산성'의 판권을 싸이런픽쳐스의 대표인 딸에게 팔았지요. 이건 '내 새끼 지상주의’가 아닙니까?
말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글 함부로 쓰지 마십시오.
당신이 쓴 그간의 글들, 독자들이 불쌍할 뿐입니다.
추가) 김훈의 정체는 전두환 찬양 기사 기자, 이회창-이명박 지지자,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충격 먹고 한겨레 사표, 여성비하, 남성우월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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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 칼럼] 김훈의 기고문에 대하여
칼럼 / 김동규 / 2023-08-07 18:39:13
▲1980년 8월24일 김훈이 한국일보 전면 기사로 쓴 “전두환 장군 의지의 30년”.
[칼럼] 김동규 동명대 교수= <김훈의 기고문에 대하여>
1. 그의 글은 항상 그렇다. 유려하게 똑똑 끊어지는 문장. 비장미를 양념처럼 듬뿍 뿌린 산문. 그러나 결연하고 단호한 ‘장엄’의 휘장을 한 겹만 들추면 드러나는 표피적인 세계 인식.
김훈이 중앙일보에 쓴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을 읽었다.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죽음. 그리고 그것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3만명 교사들의 광화문 집회를 보고 쓴 글이다. 절반 정도는 집회 장면의 단순 묘사다. 검은 상복 입은 교사들이 거듭 외쳤다는 ‘공교육은 죽었다’는 주제를 설명하기 위한 평범한 인용들. 이런 자리에 어떤 정치세력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개탄.
2. 여기까지는 읽을 만하다. 문제는 글의 절반을 지나면서 나온다. 이번 사태의 원인을 “한국인의 DNA 속에 유전되고 있는 ‘내 새끼 지상주의’” 탓으로 돌리는 거다.
그는 이 유전자를 다음처럼 설명한다. “내 새끼를 철통 보호하고 결사옹위해서 남의 자식을 제치고 내 자식을 이 세상의 안락한 자리, 유익한 자리, 끗발 높은 자리로 밀어올리려는 육아의 원리이며 철학”이라고.
뭐 별다를 건 없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숱하게 논의되고 비판되어 온)우리 사회의 극단적 가족 이기주의를 말하는 것. 나는 (당연히)뒤를 이어 그 같은 천박한 사회심리적 병폐를 뿜어올린 시스템적 질곡을 그가 비판하리라 생각했다. 예의 날카롭고 단호한 문장으로.
3. 하지만 이게 끝이다. 이런 문제를 입에 담으려면 그러한 문제적 집단심리를 만들어낸 근(近) 역사적, 구조적 뿌리를 주목해야 하는 것이 상식임에도.
돈이 모든 사회적 가치의 중심이 되고 다시 그것이 권력화되는 금권자본주주의의 극단. “고객이 왕이다!”라는 슬로건이 초등교육 현장에까지 독안개처럼 퍼져버린 세상. 내가 낸 세금으로 내 아이를 학교 보내니, 선생도 내 마음대로 ‘사용’하겠다는 그악한 교육 상품주의.
이런 요인들이 마침내 교사의 가르칠 권리 자체를 짓밟는 괴물이 된 사회적 배경을 최소한이라도 주목하고 지적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점에서 김훈의 기고문은 일종의 무속적 DNA 학설을 넘어서지 못한 그저 피상적 내용이었다.
4. 가장 꼴불견은 자신의 그 같은 ‘학설’을 증명하겠다고 뜬금없는 사례를 끄집어 낸다는 거다. 사회지도층 위주의 내 새끼 지상주의 사례를 들다가 (아마도 의도적으로)갑자기 조국 이야기를 꺼낸다. 해당 문장은 이렇다.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의 지위에 오른 인물은 조국 전 법무부장관과 그의 부인”이라고.
두 가지만 지적한다.
첫째, 조국과 그의 일가족이 멸문지화의 처절한 사법적 공격을 당하는 장면을 김훈은 뉴스에서 한번이라도 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적 이지메의 형극을 통과 중인 한 자연인을 두고 던지는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의 지위”에 올랐다는 표현은 역설적 조롱이거나 아니면 지독한 착종적 판단 둘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가 정경심 교수에 대한 실형과 조국 가족 모두가 겪고 있는 법적 징벌의 배후에 깔려있는 (윤석열 정권 등극을 목표로 진행된)뚜렷한 정치적 공격의 본질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는 거다. 아니면 새카맣게 망각하고 있거나.
검찰개혁 흐름이 시작된 지난 5년 간 조국과 그의 가족을 둘러싸고 어떤 비극이 진행되었는가를 그는 인식 속에서 완전히 삭제하고 있는 것이다.
조국 일가에 대한 광범위하고 집요한 징벌이 과연 ‘저지른 만큼 벌을 받아야 한다'는 죄형법정주의 기준에 부합하는 것인가.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한 수사와 판결의 형평성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누가 목소리 높일 수 있겠는가 하는 말이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지지한 스스로 행동을 이렇게 해명한 그의 입으로.
"(이명박의) 도덕성에 대해 꺼림칙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살다보면 더럽혀지는 부분이 있는 것이지요. 백지상태보다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5. 김훈의 글을 읽으며 떠오르는 것은 역시 그가 쓰고 말한 과거의 흔적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광주민주화항쟁의 피웅덩이를 딛고 전두환이 권좌에 오른 1980년 8월 24일 그가 한국일보 전면 기사로 쓴 것이다. 제목은 “전두환 장군 의지의 30년”(사진 1). 제 정신으로 썼든 억지로 썼던 역사적 부역의 글이다.
두 번째는 2000년 9월 27일 한겨레21 인터뷰에서 그가 떠들어댄 다음의 내용.
“(재벌이 아들한테 회사 물려주는 거) 그거 한심하지만 불가피한 거라고. 나도 내집 아들한테 물려줄 판인데…. 우리 사회의 문제를 개선할려면 재벌이 자본을 인간화해 리더십을 보강하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고. 재벌이 무너지면 우리가 무너져. 노동자들이 무슨 연대를 해. 노동자가 우리 사회에서 제일 보수주의잖아. 무슨 신기술 도입하면 저항하고 구조조정에 저항하고… 노동자들이 제일 보수적이고 재벌 리더들이 가장 진보적이라고.”
“나는 <조선일보>를 아주 좋아해서 평생을 보는데, 가장 우수한 신문이더만. <조선일보> 사설 같은 걸 보면 얼마나 글을 잘 쓰는지 소름이 쪽쪽 끼친다고. 우리 기자들보고 이것 좀 보고 배우라고 하지. 근래 들어 정권에 대해 가장 극렬하게 저항하고 있는 게 <조선일보> 아니야?”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023000/2000/021023000200009270327078.html?fbclid=IwAR1EEVvlhzT79LOfvxAg528eRGR2-0_CvEWL3OHt-2F-aNj-_nJebvS24zA
한 인간이 인생의 20년 단위로 이런 글을 꾸준히 쓴다는 것은, 그의 세계관이 평생을 두고 큰 변화가 없다는 한 증좌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점에서 김훈이 그그저께 중앙일보에 올린 글도 (색깔과 주장의 지점이 조금 이동하기는 했어도)결국 수십년 간 변하지 않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나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얄팍하고 즉흥적인 마초주의.
출처 https://m.pressna.com/news/newsview.php?ncode=1381163996696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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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대
2023년 8월 7일
<소설가 김훈의 중앙일보 기고문을 읽고>
“교사들이 자신들의 집회에서 정치적 당파성을 배제하고, ‘학부모’에 대해 거친 언사를 쓰지 않는 조심스러움에서 나는 교사들의 집단지성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악성 민원’은 학생들이 아니라 학부모들이 제기해 온 것이므로, 무대 조명 안으로 소환되지 않은 ‘학부모’라는 익명 집단은 이 사태의 핵심이며 배후였다. ... ‘악성 민원’의 본질은 한마디로 한국인들의 DNA 속에 유전되고 있는 ‘내 새끼 지상주의’다. ... ‘내 새끼 지상주의’는 계층의 차이가 없이 고루 퍼져 있지만, 부유층 밀집지역의 ‘악성 민원’이 더욱 잦고 사납고, 위압적이라는 일선 교사들의 고백은 이들을 행세하게 하는 부(富)의 천민성을 증언하고 있다. ...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지위에 오른 인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의 부인일 터인데, 그는 아직도 자신의 소행이 사람들에게 안겨준 절망과 슬픔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일가가 관련된 재판의 과정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인연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미망(迷妄)일 수가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나 자신의 무명(無明)과 마주 대하고 있었다...”
-소설가 김훈의 중앙일보 기고문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공교육과 그가 죽었다” 중에서.
소설가 김훈은 공교육과 그(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죽음의 원인을 ‘내 새끼 지상주의’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내 새끼 지상주의’가 부유층 밀집지역에서 더욱 기성을 부리고 있다고도 진단한다.
내 새끼 지상주의가 부유층 밀집지역에서 더욱 사납고 위압적으로 실행된다는 김훈의 진단을 가만히 분석해보면 내 새끼 지상주의가 공교육과 그(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죽음의 하나의 원인은 맞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그의 말대로 부(富)와 부의 천민성에 있다. 공교육과 그의 죽음의 원인은 내 새끼 지상주의이고, 내 새끼 지상주의의 원인은 부의 천민성이다. 부의 천민성이라는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과 병폐가 이번 사태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걸 김훈 본인이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잔인한 부유층 학부모 몇 명 잡아들이고 징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학부모와 선생을 대립시켜 이번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런데도 김훈은 느닷없이 조국과 그의 가족을 소환하여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있다. 김훈의 기고문 전체의 맥락을 다시 살펴봐도 왜 조국이 소환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갑질부모 정순신과 이동관을 소환해야지. 수구보수 언론과 무소불위 검찰의 십자포화를 맞고 쓰러진 사람을 다시 짓밟는 일은 작가가 할 일이 아니다. 그런 짓은 진중권이나 할 짓이다. 조국 재판을 지켜봤다는데 검찰과 언론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가장 강력하게 물어뜯던 사모펀드 건은 무죄로 판명되었다는 걸 알고는 있는지, 검찰의 기소가 얼마나 정권야욕적이고 모순적이며 선택적인지 알고는 있는지. 이를테면 검찰이 윤미향 의원을 10개의 죄목을 씌워 기소했지만 9개가 무죄로 판명된 건 아는지, 나머지 1개의 죄목마저 법원에서 다투고 있다는 건 아는지. 왜 김훈이라는 위대한 작가가 국힘당이나 윤정권이 하는 짓을 따라 하는지 안타깝다. 올해 봄에 비트코인 문제로 언론의 십자포화를 맞고 만신창이가 되어 반격도 못하고 쓰러져 겨우 숨을 쉬며 언론을 피해다니던 김남국 의원에게 한판 붙어보자고 외치던 장예찬이 생각난다. 사자에게 물려 죽어가는 토끼에게 용감한 표정으로 달려드는 야비하고 비열한 살쾡이나 뭐가 다른가?
김훈은 사회구조적 모순을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문제로 치환하는 세심하게 몽매한 능력이 있어 보인다.
“교사들이 자신들의 집회에서 정치적 당파성을 배제하”고 시위를 한다고 나름대로 점잖게 진단한 김훈은 큰 문제를 지엽적으로 만들어 내는 데 능력이 있다. 교사들이 왜 정치적 당파성을 배제하고 시위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김훈은 자기모순에 빠진 감정 소비적 해결책을 내놓는 데는 탁월하다. 그의 해결책 혹은 그의 기고문은 전체적으로 문학적 비유, 감정적 감상적 토설로 보인다.
시선은 옹졸하지만 정서적으로 점잖은 김훈이라는 훌륭한 작가를 소설을 쓰도록 해야지 사회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인물로 내세워서는 안 된다. 김훈은 그럴 능력이 없다. 문제의 근본 원인을 기회주의적으로 외면하고도 있다. 중앙일보가 김훈을 욕되게 하였다. 지난 91년 조선일보가 김지하의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통해 반정부 투쟁의 불길을 잠재웠던 것처럼 중앙일보는 김훈의 ‘내 새끼 지상주의’라는 기고문을 통해 현실의 사회 구조적 모순을 인간 정서적 모순으로 바꾸고, 교사들의 분노가 정권 혹은 자본주의 전체로 향하는 걸 막으려고 하는가?
그럴 리 없겠지만 김훈도 중앙일보도 시선을 한국 자본주의의의 구조적 모순으로 돌려야 한다. 이를테면 10원 한 푼 남에게 손해를 보게 한 일이 없다는 대통령 장모의 구속, 대통령 부인의 주가조작 혐의와 학력조작과 사기행각, 대통령 본인의 거짓말들의 원인들 역시 ‘내 새끼 지상주의’가 아니라 부의 천민성,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과 병폐에 있다. 9수 10수를 해서라도 권력을 얻어야 하고, 국민 세금으로 마련된 거액의 검찰총장 특활비를 사비인양 써버리는 파렴치함과 현 정권의 신북풍몰이, 국가권력사유화, 보복정치, 검찰독재, 법사무당정치, 반평화친일친미정치, 부자를위한정치, 서민에게폭력정치, 장애인차별정치, 노동자말살정치 등등 횡포의 원인 역시 내 새끼 지상주의가 아니다. 좀 더 근본적 원인을 말하라.
김훈 원작의 영화 ‘남한산성’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그대도, 나도, 그리고 우리가 세운 임금까지도 다 새로 바뀌어야 하오. 그게 내가 이 성에서 깨달은 바요.”
(김훈 선생과 친한 페친, 개인적으로 잘 아는 페친들 많은 줄로 안다. 이 글은 김훈 자신과 김훈의 문학을 위해서 김훈이 거대 언론의 정치적 야욕으로부터 1mm라도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에서 올린다.)
* 김훈 작가의 전두환 찬양기사와 내 새끼를 그리워하는 내 새끼 지상주의자 김주대의 음주 장면 함께 올린다.
김주대
2023년 8월 9일
< 만약에 - 김훈 비판 2>
“김주대의 글이 옳은지부터 (생각해 보라). 마음에 안 들면 씹어대는, 조국 얘기만 하면 짖어대는 자에 불과한 건 아닐까. 말만 그럴듯하다고 옳은 주장은 아니다. 중언부언 헛소리에 불과하다.” // “김주대의 김훈 비판글은 진영론에서 1mm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김주대는 조국 턱걸이할 때 동조하던 자다.” ..
일부의 이런 반응에 발끈해서가 아니라 한번 차분히 생각해 보자는 뜻으로 소설가 김훈을 다시 소환한다. 공교육의 죽음과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죽음의 원인을 ‘내 새끼 지상주의’로 파악하고 있는 김훈의 중앙일보 기고문을 비판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다음-
1. 공교육의 죽음과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죽음의 원인은 ‘내 새끼 지상주의’보다 더 근원적인 데 있다. 한국 자본주의의 기형적 발전과 폐해가 패악스러운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이 사태의 본질이다. “자본주의가 좀 더 인간적으로 된 것은 자산 소유자들의 경제적 자유를 제한할 수 있었던 덕분”이라는 장하준 교수의 말을 빌린다. 인간적 자본주의가 되려면 자산 소유자들의 경제적 자유를 제도적 법률적으로 제어하고 제한해야 하는데 제도적 맹점을 악용하며 법기술을 부려 자본주의를 패악스러운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세력이 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래도 어느 정도 기능하고 있던 사법시스템 국가시스템마저 망가뜨리고 있다.
거대 자산 소유자들을 감시하라고 세금 들여 맡겨놨더니 오히려 거대 자산 소유자들과 룸살롱에서 만나 신발에 술을 따라주고 호형호제하며 자산 소유자들과 결탁한 윤검사 세력, 제도적 맹점을 악용하여 부동산 가치를 불법적으로 상승시키고 사기를 치는 장모 세력, 피 같은 국민 세금으로 기획 계획 건설되는 국책사업인 고속도로마저 휘어지게 하는 마누라 세력, 거기에 아첨하는 세력... 이런 세력들이 국가를 장악하고 있다. 마침내 공교육은 그런 세력들의 이념을 뒷받침하고 심지어 미화하고 있다. 공교육은 죽은 것이 아니라 시퍼렇게 살아서 사회적 약자의 등을 처먹고 있다. 사회적 약자 노동자 농민 서민 평범한 교사 들의 등골을 고아 먹고 있다. 김훈의 ‘내 새끼 지상주의’라는 자극적 문학적 비유는 이런 공포스러운 문제를 말랑말랑한 서정으로 치환해버린다. 결국 김훈은 문제의 근원으로 향하는 비판적 시선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문제 해결을 막고 있다. 지구에 생명 탄생 이후 내 새끼 가진 어미가 내 새끼를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키우지 않은 생명체가 어디 있는가?
2. 김훈 기고문의 또 다른 문제는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엉뚱한 예를 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냥 간단히 말하자. 조국이, 조국이 왜 거기서 나와~아? 정순신이나 이동관이라면 몰라도.
3. 지난 91년 조선일보가 김지하의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통해 반정부 투쟁의 불길을 잠재웠던 것처럼 중앙일보는 김훈의 ‘내 새끼 지상주의’라는 기고문을 통해 현실의 사회 구조적 모순을 인간 정서적 모순으로 바꾸고, 교사들의 분노가 정권 혹은 자본주의 전체로 향하는 걸 막으려는 간사한 노력이 보인다.
4. 결론적으로 말한다. 김훈 비판을 진영론으로 몰고 가며 비아냥거리며 욕하는 이들이 만약 내 그림을 사겠다고 한다면, 만약 정말 간곡한 마음으로 사겠다고 한다면, 정말 팔기 싫은데 그래도 굳이 사겠다고 한다면,,,싸대기 한 대만 때리고,,
팔겠다, ㅎ^^
5. 교육이나 사회적 우월성으로 세대를 초월하여 이전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패악을 제도적 법률적으로 혹은 인간적 동정적 문학적 노력으로 수정할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유토피아 사회주의, 과학적 사회주의를 들여다보다가 든 생각이다. 머리가 아파서 문인화를 시작한다. 우리 모두 죽지 말고 살아서 부귀영화를 노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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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지은 김훈, 그의 붓이 부르는 슬픈 노래
김민웅 칼럼 민들레 광장 입력 2023.08.07 20:20 수정 2023.08.08 08:07
김민웅 전 경희대 교수/ 촛불행동 상임대표
중앙일보에 실린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이라는 김훈의 글은 교사들의 입장을 옹호하겠다고 쓴 칼럼으로 보인다. 그것도 ‘특별기고’라는 대접까지 받았다. 그런데 읽어 가다가 도중에 이게 뭐지? 하게 된다. 교사에 대한 갑질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조국을 난데없이 끌어들이고, 논지의 타당성이 전혀 정돈되지 못한 횡설수설이었다.
이런 수준이라면 중앙일보가 고료를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쓰지 말아야 했다. 자신없는 글을 쓴 셈이고. 부끄러운 매명(賣名)이 되었다. 김훈이라는 작가가 지닌 무게에 의문부호를 별로 달지 않는 한국사회인지라 이 칼럼을 사소하게 넘기기는 어렵다.
정작 파탄이 난 것은 김훈이 아닌가?
‘지 새끼만 끼고 돌기’가 교육 붕괴의 주범이라고 몰아세운 그의 눈에는 자본과 권력이 짜놓은 노예교육의 감옥은 보이지 않았고, 걸핏하면 경찰과 검찰을 사병(私兵)으로 동원해 폭력으로 정치를 하는 자들의 비열함도 보이지 않았다. “이 고통스러운 조문 행렬이 보여주는 탈정치, 무정치의 풍경은 정치의 부재, 정치의 실종을 느끼게 했다. 그토록 끓어 넘치는 정치는 다 어디로 갔는가”라는 그의 주장은 대체 누구를 겨냥한 것인가?
그의 글은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이 아니라 김훈이라는 지식인의 ‘파탄’을 드러냈다. 부제로 붙인 ‘공교육이 죽고 그가 죽었다’가 아니라, ‘김훈의 문학이 죽고 그가 죽었다’이다. 그런데 그의 문학은 이렇게 되기 전에 과연 온전하기는 했던가? 혹 그의 문학은 애초부터 이미 죽은 지 오래인데 우리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김훈이 쓴 중앙일보 칼럼은 그 연장선의 논지는 아니었을까?
<칼의 노래>는 무엇을 노래했는가?
“적의 칼과 임금의 칼 사이에 저 바다는 아득히 넓었고 나는 몸둘 곳 없었다.” 왜적의 거침없는 공격을 막아야 하는 임무는 조정(朝廷)의 미망(迷妄)으로 흔들리고 있었고, 그 사이에서 그는 쓰라리게 고독했다. 공적(功績)을 치하하기는커녕 시기심으로 자신을 베려고 한 임금이 야속했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두면 민중을 몰살할 적을 막아낼 기운을 스스로 꺾을 이유는 없었다. 이제 결전의 시각이 닥쳐온다. 하지만 막아내야 할 바다는 너무도 넓었다. 어찌 할 것인가.
<칼의 노래>에서 김훈의 그린 이순신 장군의 고뇌였다. 짧은 문장이나 그 안에 있어야 할 풍경을 담아낸 명문(名文)으로 읽힌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보면 이는 허망한 기교에 불과하고, 장엄한 운명 앞에 홀로 선 이순신의 내면을 도리어 황폐한 것으로 만든 셈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런 식이라면 마지막 전투가 되고 만 전장(戰場)에서 목숨을 잃게 된 이순신의 죽음이란 “나는 몸둘 곳 없었다”라며 어차피 승전의 기쁨을 누릴 수 없는 것이 예감된 자가 준비하고 자초한 자결(自決)을 향한 숨죽인 비명처럼 들리고 만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이순신의 독백이 김훈에게는 가능해진다.
“나는 각오되지 않은 죽음이 두려웠다. 내 생물적 죽음이 끝장나는 것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전쟁 중에 흉탄을 맞아 숨을 거둔 이의 최후는 현실의 모순 앞에서 어쩔 도리 없다고 비관한 자의 죽음이 되고 만다. 욕되다. 그건 세상을 온통 긴장시키는 칼의 노래가 아니라, 부러진 칼의 신음이다. 대장군은 군주제의 칼과 적의 칼 사이에서 몸둘 곳이 없다고 여긴 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죽을 자리는 분명했다. 사생관(死生觀)이 확고한 명장(名將)의 혼이 김훈의 손에서 염세주의자의 탄식이 되어버렸다. <칼의 노래>가 한성(漢城)의 지가(紙價)를 올렸을 때 불안 불안했던 이유다.
웅장한 역사를 사소하게 만드는 문재(文才)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진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 싶었다… 바다에서는 늘 먼 섬이 먼저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랐다.” <칼의 노래> 첫 대목으로 명성이 높은 문장이다.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풍치를 그려낸 듯하다.
그런데 그 안에 역사가 실종되어 있다. 기이하지 않은가? 역사소설에 역사의식이 먼저 소멸하고 다시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건 그에게 너무 멀리 있는 섬이었나보다. 가령,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이 첫줄 하나가 얼마나 놀라운 문장인가.
그 문재(文才)를 가지고 원래의 본문을 살려내면서 이렇게 이어냈다면 어땠을까? “섬이 버려졌다고 꽃마저 버려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피어나는 꽃들은 피어나면 누군가가 이내 짓밟고 또 짓밟고. 그래도 피어나기를 멈추지 않고 어느새 숲이 되었다. 숲이 된 꽃들은 결박된 사슬을 풀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 깊은 바다 속에서 매일 밤 울음을 삼킨 칼이 되고 있었다. 한산의 달빛은 점점 예리해져갔다”라든가. 이순신의 칼은 정치가 녹슬게 하고 있었으나 누구도 모르게 날을 벼리고 있었지 않은가?
김훈의 문학은 웅장한 역사를 사소하게 만드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굴절된 진실을 잡으려고 그랬겠지만, 그러다가 정작 잡아야 할 혼을 놓치고 있다. 안타깝게도,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이해도 의외로 짧다. 다양한 인간과 폭넓은 관점을 그려내야 하는 작가로서는 심각한 난관(難關)이다. 그가 쓴 칼럼도 다르지 않다. 세밀하게 보겠다고 나섰지만, 문제의 뿌리를 엉뚱한 곳에서 찾는다.
‘정치적 당파성의 오염’이라니?
중앙일보 기고에서 김훈은 현장을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행사를 진행하는 중견 교사는 참가자들에게 ‘배포된 피켓 이외의 구호를 외치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이날 집회가 정치적 당파성에 오염되는 사태를 교사들 스스로가 경계하고 있음을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
‘정치적 당파성에 오염되는 사태’라니? 정치를 말하는 교사는 오염된 교사라는 말인가? 그가 말하는 정치적 당파성이란 뭔가? 그저 낙인 아닌가?
교사들의 집회에서 배포된 피켓 이외의 구호를 외치지 말라는 요구는 상황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동의하기는 어렵다. 정치와 분리된 교육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사들이 정치 밖에 따로 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이상 문제의 본질적인 해법은 없을 것이다. 권력의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고 오늘날 교육을 제대로 세울 수 있는 길이 과연 있을까?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기보다는 오염 운운으로 끌고 가고 있는 김훈의 논법은 누구를 지탄하고 누구를 방어해주고 있는 것일까?
그 다음의 논리는 더더욱 끔찍한 것이었다.
“이날 교사들이 절규하는 고통은 실체가 분명했다. 요약하자면, 교육을 망치는 가장 큰 해악은 ‘악성 민원’이고 교육청, 교장, 교감 등 교육의 관리자들은 이 사태의 뒷전으로 물러서 있다는 말이다. 이날 집회에서 교사들은 ‘학부모’라는 익명의 거대 집단을 직접 겨냥해서 발언하지 않았고, 다만 ‘악성 민원’이라고, 에둘러가는 언어를 사용했다. 교사들의 조심스러운 태도에는 어쨌거나 학부모들이 교육의 과정을 함께 수행해 나가야 할 파트너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교사들이 자신들의 집회에서 정치적 당파성을 배제하고, ‘학부모’에 대해 거친 언사를 쓰지 않는 조심스러움에서 나는 교사들의 집단지성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악성 민원’은 학생들이 아니라 학부모들이 제기해 온 것이므로, 무대 조명 안으로 소환되지 않은 ‘학부모’라는 익명 집단은 이 사태의 핵심이며 배후였다.”
교사와 학부모는 서로 적대하는 집단이라는 것이며, 이 모든 사태의 핵심과 배후 또는 주범은 ‘학부모’라는 김훈의 대단히 난폭한 결론이다. 지금 교사들은 학부모와 전쟁을 벌이자는 것이 아니다. 교사의 존엄, 권위를 실질적인 권한으로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그건 비껴가고 학부모를 이 모든 사태의 배후로 설정하고 있으니 거기에서 ‘내 새끼 지상주의’의 논리가 등장하는 것이 하등 이상하지 않게 된다. 게다가 그에게는 학부모는 ‘익명의 집단’으로 취급되고 있다. 문제를 일으켜놓고 정체는 숨기고 있는 유령과도 같은 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이른바 ‘내 새끼 지상주의’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정순신 이동관은 빠지고 조국은 들어간‘내 새끼 지상주의’
“‘내 새끼 지상주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나의 자식이 겪게 되는 작은 불이익이나 훼손을 견디지 못하고 사회관계망 전체를 뒤흔들어 버린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아이들 사이의 사소한 다툼이 ‘내 자식’을 편드는 부모의 싸움으로 확전돼 교사를 괴롭히는 사례는 흔하고, ‘내 자식’을 편들며 달려드는 학부모의 태도는 울면서 떼를 쓰는 아이와 같다고 경험 많은 교사는 말했다. 이렇게 해서 ‘내 새끼 지상주의’는 자식을 명품 시계나 고가 핸드백처럼 물신화한다. 이것은 이제 이 난세의 생존술이고 이데올로기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계층의 차이가 없이 고루 퍼져 있지만, 부유층 밀집지역의 ‘악성 민원’이 더욱 잦고 사납고, 위압적이라는 일선 교사들의 고백은 이들을 행세하게 하는 부(富)의 천민성을 증언하고 있다.”
상대를 괴롭히는 진상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가 펼치는 논법 속에 “계층의 차이가 없이 고루 퍼져 있지만, 부유층 밀집지역의 ‘악성 민원’이 더욱 잦고 사납고, 위압적”이라는 지점에 가면 특권을 가진 세력의 갑질이 적나라하게 폭로되고 비판받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검찰출신 정순신의 경우도 그렇고 언론장악에 나선 이동관의 경우는 더더욱 김훈이 쓰는 문장의 칼로 도리질 당하지 않을까 하는데 이어지는 내용은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그들은 김훈의 명단에서 빠진다. 학폭과 그걸 무마하는 권세를 가진 자들은 이 정밀한 문장을 쓰는 작가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가 말한 정치적 당파성에 오염된 눈이 다름 아닌 여기에 있다.
“사실, 이 ‘내 새끼 지상주의’는 이 나라 수많은 권귀(權貴)들에 의해 완성됐다. 국회 인사청문회에 나온 고위 공직자 후보들은 너도나도 그 자식을 일류대학에 보내기 위해 실정법을 위반해 가며 학원 좋고 학군 좋은 동네로 거듭 위장 전입을 해왔는데, 이 정도 범죄는 매우 경미한 사안이다.” 라고 하더니 “아마도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지위에 오른 인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의 부인일 터인데”라고 느닷없이 조국과 그의 가족을 호출하고 ‘권귀의 대표’로 낙인찍는다.
조국 전 장관과 그의 가족들을 멸문의 고통으로 몰아놓은 정치검찰의 악행은 이로써 내 새끼 지상주의를 단죄한 정의로운 공적이 된다. 더군다나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지위’에 올랐다니? 그가 이 글을 쓴 정작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로써 드러나게 된다. 조국의 자녀들이 어떤 결단으로 세상을 살고자 하는지 그건 그가 알 바가 아닌 거다. 이건 글이 아니라 명백한 행패다. 그의 글은 그래서 교육의 현실에 대한 해법 모색의 노력이 부재중이다.
우리 함께 불러야 할 노래는 진실의 노래
그의 글은 이렇게 마친다.
“광화문 앞거리의 거대한 울음은 이 시대의 지층 맨 밑바닥까지 울려야 하는 울음이다. 숨진 여교사는 지금 이름도 없고 사진도 없다. 숨진 여교사가 이름 석 자와, 웃는 표정의 사진으로 돌아오기를 교사들은 바라고 있었다. ‘전국교사일동’은 8월 5일 토요일 광화문 앞거리에서 다시 모인다.”
이 시대의 밑바닥까지 울려야 하는 이 울음을 들어야 할 자들은 정작 따로 있다. 그러나 그들은 들을 생각도, 의지도, 이유도 없다. 그들에게는 교육이란 권력을 대잇기 하는 통로이자, 나머지 국민들을 노예로 기르는 장치일 뿐이다. 이런 현실에 무지하거나 외면한 한 지식인의 헛발질이 참으로 허무한 결론으로 마감됐다. 그래서 그의 붓은 비가(悲歌)가 되었다. 또는 김훈의 지식인으로서의 죽음에 대한 스스로의 애도(哀悼)가 되었다. 껍데기만 남은, 꽃을 피워내지 못하는 버려진 섬일까?
지식인의 몰락과 붕괴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가장 처참하게 겪고 있는 현실이다. 어차피 그럴 현실이라면 이렇게 속히 정체를 드러내고 퇴장당하는 것이 낫다. 이게 어디 김훈에게만 한정된 문제이겠는가? 현실과 치열한 격투를 벌이지 않는 모든 지식인은 죽은 자들이다. 죽은 자들이 뱉은 말과 쏟아내는 글은 교묘하나 결국 궤변(詭辯)이다.
우리가 부를 노래는 시대와 정면승부를 서슴지 않을 때 나온다. 진실은 그렇게 자라난다. 그 안에는 궤변에는 결코 없는 뜨거운 혈관(血管)이 흐른다.
출처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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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현
2023년 8월 7일
김훈 작가로 설왕설래,배심감 말들이 많고 분서갱유,그런 말도 많다. 서가를 보니 그의 책이 거의 없다. 다행이다. 본디부터 이상했다. 같은 일산 정발산 주민으로 여러번 만났다(상세 이야기는 안쓰겠다..). 이해 불능이 여럿. 그를 내려 놓은지 아주 오래전. 뒤늦은 배신감,그런 말은 하지말아야한다. 왜 작가의 문장 하나에 현혹되는가. 문장 하나만 가지고 나치스에 복무한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문학과 삶의 일치ㅡ고전주의 시대인가. 그는 그의 삶을 살을 뿐….독자들은 이번에야 깨닫는 순간이다.오히려 이번 ‘커밍아웃’에 고마워해야 한다.스스로 본 모습을 드러내어…..
왜 자신의 삶을 타인을 통하여 투영하는가. 작가는 작가의 언표를 했을 뿐. 작가나 독자나 각자 자신의 삶을 살 뿐. 김훈은 그의 삶이 있고 책을 많이 팔면 되고 그로인해 ‘불가침’의 아우라를 만들었다.감옥에 갇히고 가족이 도륙당하는 현실에 등 뒤에서 칼로 후비는 행위는 신림동,서현역 칼부림과 다를 바 있을까. 왜 느닷없이 조국 가족이 인간말종으로 이 마당에 등장해야 하는가. 조국 가족에게 미안하지도 않는가. 그의 글은 문법,문맥 자체도 맞지 않는다. 공격은 그 누구나 자유이지만,최소한 등 뒤에서 칼을 꽂으면 안되지요..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를 저버리고 무슨 문학인가…참 지랄같은 대한민국.세상이 이렇게 미쳐가고 있다.
참조로 김훈은 전두환과 MB를 지지. 그의 교묘한 수사법. “제가 찍은 사람이 대통령 된 게 처음입니다.도덕성에 대해 꺼림칙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살다보면 더럽혀지는 부분이 있는 것이지요.백지상태보다는 좋다고 생각합니다.이건 불순, 부도덕을 옹호하는 말은 아닙니다.”
주강현
2023년 8월 10일
아버지는 교수 박탈에 조사받고,어머니는 감옥에 가시고,아들은 대학원 석사 반납 당하고,딸은 의사 면허 빼앗기고 고졸로 만들었다가 마침내 기소하였다. 엊그제 김훈의 내새끼….비판을 진영논리로 비판하면서 적당히 감쌌던 사람들아. 이제 그 ’내새끼‘가 기소되어 후련하냐….왼팔 오른팔 다 내주었으니 이제 조국까지 잡아넣어야 해결되려나. 하이에나 검찰은 물론이고 기레기들아,여기까지 몰고왔으니 그래 너들 마음이 이제 행복하냐. 조국을 지지하건 반대하건 그런 문제를 벗어났다. 가족을 도륙내는 이 살벌한 풍경이 눈앞에서 벌어지건만 많은 이들이 애써 침묵하거나 양비론으로 짐짓 점쟎은척 조리돌림하는 블랙코메디 사회.한쪽에서는 정작 감옥가야할 인간들이 태평성대를 누리는 야누스사회. 3대를 멸하는 연좌제 악법이 21세기에 살아났다.망명하고픈 사회…..
*검찰, ‘입시비리’ 조국 딸 조민 불구속 기소
2023년 8월 10일 KBS 보도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7745399
'입시 비리 의혹'을 받는 조국 전 장관의 딸 조민 씨가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공소시효 만료일(8월 26일)을 약 2주 앞둔 시점입니다. 서울중앙지검 공판5부(부장검사 김민아)는 조 씨를 허위 작성 공문서 행사, 업무 방해, 위계 공무 집행 방해죄로 불구속 기소했다고 오늘(10일) 밝혔습니다.
■서울대 의전원에 허위 문서 제출 혐의
조 씨는 2013년 6월 서울대 의전원에 허위로 작성된 자기소개서와 서울대 법대 공익인권법센터장 명의의 인턴십 확인서, 동양대 총장 표창장 등을 제출한 혐의를 받습니다. 검찰은 조 씨가 허위 문서를 학교에 제출하면서, 평가위원들의 업무를 방해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검찰은 이 과정에서 아버지 조국 전 장관이 개입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조 전 장관은 지난 1월 유죄가 인정돼 징역 2년을 선고받았지만 항소하면서 2심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지난달 17일 열린 항소심 첫 재판에서 조 전 장관은 "입시 비리 의혹을 받는 자료 등이 허위인지 여부를 알지 못했다"며 자녀의 입시 비리 공모 혐의를 부인했습니다. 이후 지난달 23일 조 전 장관은 "2019년 이후 몇 차례에 걸쳐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하였지만,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국민 여러분께 송구하다는 말씀을 올린다"는 입장문을 냈습니다.
■부산대 의전원 '입학 비리' 의혹도…어머니는 유죄 확정
이와 별개로 조 씨는 어머니 정경심 씨와 공모해 2014년 6월 부산대 의전원에 허위로 작성된 입학원서와 자기소개서, 위조된 동양대 총장 표창장을 제출한 혐의도 받고 있습니다. 검찰은 어머니와 딸을 '부산대 입학 비리 의혹'의 공범으로 판단했습니다. 앞서 정 씨는 딸 조민 씨의 동양대 표창장을 위조하고 조 씨의 입시에 부정한 영향력을 행사한 혐의(업무방해 등) 혐의로 기소돼, 지난해 1월 대법원에서 징역 4년 형을 확정받았습니다. 최근 조 씨는 고려대와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 입학 취소 관련 소송을 취하하면서, 사실상 학위를 반납했습니다.
■검찰, 동생 '조원 입학비리'도 수사 중
한편 검찰은 조민 씨의 동생 조원 씨의 입학비리 의혹도 수사 중입니다. 조원 씨는 지난 2018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박사 통합과정에 지원하면서 가짜 인턴 활동 확인서를 낸 혐의를 받습니다. 현재 조원 씨 사건은 아버지 조국 전 장관의 재판이 진행됨에 따라, 공소시효가 중지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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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종
2023년 8월 7일
김훈이 또 글로 말썽을 부린 모양이다. 진중권이 그렇듯 결핍이 심한 사람들 가운데 꽤 많은 이들이 타인의 심사를 건드려 존재감을 얻는다. 그게 자기 축소이고, 자기 파괴인 줄 모른다. 결핍의 근원을 탐구하고 성찰해서 그 늪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럴만한 내면의 근육을 키우지 않았으니, 그들이 선택하는 것은 자기 파괴적인 오버, 타인의 심사를 불편하게 하는 자기 축소형 언사이다. 이는 중고등학교 일진이나 동네 양아치들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소란을 피우고, 일부러 말썽을 부리는 것과 일면 상통한다. 일진과 양아치는 엄청 후카시를 잡는다. 김훈도 문장마다 엄청 후카시 잡는다. 나는 그 후카시 때문에 김훈 소설을 읽지 못한다. 뭐랄까? 그의 소설은 아주 길게 쓴 에세이 같다. 나는 어느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소설가라기보다 에세이스트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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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오
2023년 8월 7일
유명작가의 어이없는 칼럼에 대한 공분이 페북을 뒤덮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럴 줄 몰랐다, 실망했다 하시네요. 구입했던 책들을 내다 버린다는 분들도 많습니다. 다행히도 저는 그의 책을 단 한권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저 글재주를 가지고 그때그때 시류에 맞게,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외면해 왔습니다. 그가 보수주의자나 자유주의자라는 말도 적당치 않아요. 그는 무슨 이념이나 사상을 확고하게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뚜렷한 역사의식을 가진 것도 물론 아니지요. 그래서 전두환에 대한 찬양도 할 수 있고, 여성혐오를 당당히 드러냅니다. 그러다가 세월호에 꽂히고 산업재해에 분노하지요. 그때마다 비난과 찬사가 교차합니다. 그러니 그는 전향했거나 변절한 것이 아니에요. 그 글도 분명히 의도적으로 썼을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에 대한 대중의 분노도 예상했고, 오히려 즐기고 있겠지요. 저는 자아도취에 빠진 글쟁이로 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애정도 기대도 없기에, 분노할 가치가 없어요. 곧 잊혀지고 말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무서운 형벌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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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종면
2023년 8월 8일
'김훈 칼럼'이 오래된 기억 하나를 들춰낸다. 2009년 3월, MB정권의 언론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 이동관이 청와대 대변인, 신재민이 문체부 차관으로 전위에서 활약(?)하던 시기. YTN 노조위원장이던 나는 사측으로부터 형사고발을 당하고, 이동관이 "다른 수단이 없지 않냐"고 공개적으로 두둔한 지 반년 만에 체포되어 유치장에 갇혔다.
그때 동료 중 누군가 건네 준 남한산성을 읽으며 유치장의 고약한 냄새를 견뎌보려 했다. 뿐만 아니라 책에 대한 감상을 옥중서신에 담기도 했다. 한참 뒤 저자가 MB 지지자였음을 알고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작가 김훈.
그는 MB가 당선된 직후인 2007년 12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찍은 사람이 대통령 된 게 처음입니다. 도덕성에 대해 꺼림칙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살다보면 더럽혀지는 부분이 있는 것이지요. 백지상태보다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불순, 부도덕을 옹호하는 말은 아닙니다." - 2007년 12월 26일, 경향신문 인터뷰
MB를 지지했던 사실 자체는 관심사가 아니다. MB의 흠에 대해서는 '살다보면 더렵혀지는 부분'으로 이해하고 '백지상태보다 좋다'고 했던 그가 사법적 도륙으로 멸문이라 불릴 화를 당하고 언론의 과장·왜곡으로 사회적 조리돌림까지 감내하고 있는 이를 어떻게 '영세불망의 지위'라며 조롱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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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수
2023년 8월 8일
“아마도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지위에 오른 인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의 부인일 터인데, 그는 아직도 자신의 소행이 사람들에게 안겨준 절망과 슬픔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일가가 관련된 재판의 과정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인연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미망(迷妄)일 수가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나 자신의 무명(無明)과 마주 대하고 있었다.“
마지막 만남이 10년 됐나? 더 되는가? 만나본 지 오래됐다. 사방에서 떠드니 “[김훈 특별기고]'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 공교육과 그가 죽었다” 중앙일보에 실린 글을 찾아 읽었다. 솔직히 충격을 받았다.
정보의 편향, 편취인가? 사실의 극히 파편만 보았지 진실과는 동떨어진 사례를 ‘조 국’ 실명으로 들고 나왔다. 종합적으로 전체를 보는 시야가 부재했다. 왜? 윤석열이 다단계 쿠데타를 일으키는 구실로 조국 일가를 잔인하게 린치를 가했는지? 본질을 직관하는 시야와 거리가 멀었다. 중앙일보에 ‘특별기고’하고 조선일보나 보고 살고 있는가?
“나 자신의 무명(無明)과 마주 대하고 있었다.“라고 하니 무명을 깨트리기 위해서라도 자기 눈을 먼저 찔러야 하겠다. “통렬한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는 정작 김훈에게 요구된다. 한편으로는 ‘잘 늙어가는 건 참으로 어렵다’라는 말이 새삼 실감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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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제
2023년 8월 8일
내 스승들에 관해 적은 책 <딸깍 열어주다>에 김훈이 들어 있다. 그러니까, 나는 김훈을 내 스승으로 여겨 글을 쓰고 책에 수록했다는 얘기다.
내 가까운 인척이 윤석열을 지지하고 조국을 비난한다고 해서 나는 인척과 연을 끊지는 않는다. 그거 하나만 빼면, 나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좋은 사람이다.
나에게는 김훈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우파마초' '보수주의자'라고 규정하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나올 법한 평가라고 본다. 그런 평가가 나오게끔 한 사람이 바로 김훈 본인이기 때문이다.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배우며, 감히 내 스승(이라기보다는 좋은 선배라는 말이 정확하다)이라고 책에 글까지 쓴 사람이 보기에, 김훈은 무슨 '주의자'로 규정하기에는 색깔이 너무 다양하다. 내가 아는 김훈은 보수도 진보 주의자도 아니고, 사안에 따라 자기 생각이 있는 사람이다. "야, 뒤집어졌냐?" 92년 대선 레이스 도중 짧은 한순간 DJ가 YS를 여론조사에서 제쳤을 때 사회부장 김훈이 좋아서 했던 말이다. 그건 내 기억에만 있을 뿐 인터뷰 따위로 기록되지 않았다. DJ를 찍었던 사람이 MB를 찍었다고 인터뷰에서 대놓고 말했었다. 사석에서나 공식 인터뷰에서나 그는 그렇게 자기 생각을 눈치 안 보고 가감없이 드러낸다. 그게 김훈이다. 그는 그런 리버럴리스트일 뿐이다. 남들의 손가락질이 두려워서, 남 눈치 보면서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김훈이 세상을 좀더 약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이번 글에서도, 조국 대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정순신이나 이동관 이름을 넣었더라면 그 글은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그런데 김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국을 거론하면 이쪽 편에서 어떤 비판과 비난이 나올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냥 썼다. 그게 김훈이고, 나는 그런 김훈이 좋다. 조국에 대한 생각은 나와 정반대이지만 다만 그뿐이다. 조국을 비난하여 조중동 독자들이 환호한다고 해서 그걸 좋아할 김훈이 아니다.
조국 대신 이동관 정순신 이름을 넣었더라면 칭송 받을 만한 글이었다. 조국 이름이 들어간 문장 하나를 뺐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냥 썼다. 자기 생각이니까. 그랬다고 하여, 과거 전두환 칭송 기사, 이명박에 대한 투표 행위 등까지 소환되고, 나아가 그의 문학과 인생 전체를 짓이겨대는 글들을 보며 나는 섬뜩하다. 일종의 광기를 느낀다. 전두환 기사를 어떻게 쓰게 됐는지, 우파 마초의 모습을 왜 드러냈는지, 그 배경을 알게 되면 쉽게 손가락질 못할 것이다. 그래도 손가락질을 하면, 그러는 당신은 얼마나 순결하게 살았나 하고 그저 묻고 싶다. 비난이 아니라.
멀리서 보면, 나는 한국 사회가 정말 무섭다. 그 무서움은 윤석열 무리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욕하면서 닮아가나? 그 반대편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생각을 김훈 식으로 드러내면 사냥을 해버린다. 사냥과 도륙의 차이를 나는 잘 모르겠다. 비판하는 건 얼마든 가능하다. 나도 김훈을 만나면 얼굴 붉히며 대들 수도 있다. "이건 김국이 진짜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하고. 그래도 나는 김훈이 내 편이고, 내가 김훈 편임을 믿는다. 생각과 색깔이 다양하고, 그걸 자기 검열없이 말을 하는 사람이라 그렇다.
그의 책을 버리든, 불태우든, 그의 책을 읽지 않은 걸 자랑으로 내세우든 뭘 하든 나로서는 비난, 비판할 생각도, 그렇게 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 그걸 있는 그대로 보고 존중한다. 하고 싶으면 그렇게들 하시라.
다만, 내 편이라고 믿고 있는 세상이 그를 극보수우파마초틀딱이라고 규정하고 욕하고 비난하고 사냥을 해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나는 그가 쓴 조국 관련 생각과 그것을 드러내는 방법에 대해서만 정확하게 타격하겠다. 내가 잘 아는 사람이, 수십년 동안 기사와 글로 자기를 드러낸 사람이, 최근 들어서는 산재로 죽는 사람들을 구제하려고 버둥버둥 애쓰는 사람이, 세월호 비극에 그렇게 깊이 공감하고 글을 쓴 사람이, 우리 편에서 저렇게 집단 다구리를 당하면서 배제되고 버려지는 것이 아까울 따름이다. 이쪽 편과도 저쪽 편과도 불화하는, 세상과 늘 불화하는 늙은 리버럴리스트가, 우리 편에서는 아예 버려지는 것 같아 아깝고 안타깝다는 얘기다. 버려지면 버려지는 거지, 뭐 어쩌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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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영
2023년 8월 8일
김훈 씨가 조국 가족과 관련된 사건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정경심씨와 조국 가족은 입시 문제와 관련하여 학부모로 가장 큰 처벌을 받은 경우가 아닌가 싶다. 그만큼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최소한 검찰과 법원과 언론은 그렇게 보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들 가족이 그러한 처벌을 받은 것보다 더욱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그렇게 중대한 범죄라면 왜 유사한 처벌 사례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설마 그것이 김훈씨가 말하는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의 지위에 오른” 유일한 사례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김훈씨는 대학 입시에 참여하지 않아 잘 모르시겠지만, 문제가 되는 표창장과 봉사 시간은 생활기록부와 자기소개서에 부지기수로 기재되어 있다. 그래서 동양대인지 서양대인지 그 사건 이전에는 이름도 알 수 없었던 대학의 총장 표창장 정도는 평가자 입장에서 보면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리고 적어도 100여 시간에서 2-300 시간에 이르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는 봉사 시간도 그런가 보다 할 정도이지 입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아니다. 그런데도 만일 그것이 그렇게 중대한 범죄라면 최소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이 조사를 받고 처벌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한 사례에 대하여만 처벌한 것은 과잉 처벌이기도 하지만 공정한 법 집행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그에 비하여 생활기록부에 학교 폭력과 관련된 사항이 기재되지 않게 한 것은 이름도 알지 못했던 대학의 표창장이나 봉사 시간 몇 시간과는 비교도 안되는 중대한 문제이다. 사실 입시에서는 장점도 보지만 감점 요인을 보며 후자가 훨씬 더 중대한 결정 요인이 된다. 학교 폭력 그것도 중대한 학교 폭력이 생활기록부에 기재되어 있는 경우 생활기록부를 검토하는 수시 입시를 통한 대학 입학 가능성은 제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활기록부에서 학교 폭력과 관련된 사항이 삭제되게 한 것은 표창장이나 봉사 시간 정도와는 비교도 안되는 중대한 입시 방해이다.
수만 명 혹은 수십 만 명의 유사한 사례에 대하여 단 한 명, 아니 단 한 가족만 처벌하고, 훨씬 더 심각한 학교 폭력 생활기록부 미기재라는 사실상의 공문서 변조에 대하여 유야무야 넘어가는 것은 공정도 정의도 아니다.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의 지위에 오른 인물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조국이 영세불망의 지위에 오른다면 자신이 한 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처벌과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지 권력적으로 무엇인가를 해서 그러한 것은 아니다. 내 새끼 지상주의를 진정으로 권력적으로 완성한 인물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으로 여전히 법의 처벌에서도 사회적 비난에서도 벗어나 유유자적 자신의 권력과 자기 자식들이 획득한 것을 향유하고 있다.
그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진정한 문제이자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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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혜
2023년 8월 8일
<영세불망-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함>
김훈은 중앙일보 칼럼에서 아주 장엄한 어조로 서이초 교사를 추모하고, 분노하는 교사들을 어루만지며, 교육의 백년대계에 대해 진심으로 걱정한다(하는 척한다). 그러다가 말미에 가서 "내새끼지상주의를 완성해서 영세불망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라고 하면서 조국 전 법무부장관을 슬쩍 소환한다. 원래 국어 문제가 어려운 이유가 제시된 문항이 완전히 거짓이 아니고 거짓과 참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다 맞는 문항 같지만 그중에서 거짓을 판별해야 한다. 결정적인 거짓을.
조국(죄송하지만 존칭 생략합니다)이 내새끼지상주의를 완성해서 영세불망의 지위에 올랐더냐? 조국을 치기 위해 언론과 검찰은 한국인의 치열한 내새끼지상주의를 자극했다. 부화뇌동한 사람들은 분노했고 이 전략은 목적한 것 이상의 소득, 백배 천배의 소득을 거두었다. 죽어가던 국힘당을 살려내고 윤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조국은 "영세불망의 지위"에 오른 것 맞다. 지금의 너덜너덜해진 상태가 지위라면 말이다. 영세불망이란 말도 맞다. 나는 2019년부터 이 일의 과정을 똑똑히 보았고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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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sung Kim
2023년 8월 8일
이번에 김훈 작가 때문에 조국 교수 일가 사건이 다시 주목을 받습니다만, 저는 조국 교수 일가 건을 국가폭력사건으로 봅니다. 국가폭력 사건 중 상당수는 재심을 하더라도 전부 무죄가 나오지 않습니다. 일부는 유죄로 유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국가폭력 피해자라는 것,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바뀌는 게 아닙니다. 그건 법원의 입장이기도 해서, 일부 유죄가 유지되었다는 이유로 국가배상이 기각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국 일가 사건 중 일부가 유죄로 인정되는지 여부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제가 조국 교수에 대한 부당한 평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또 있습니다. 이른바 “조만대장경” 비판입니다. 조국 교수는 사회 활동을 열심히 했고, SNS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 시사 현안에 대해 여러 의견을 냈습니다. 그런 의견들 중 상당수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조국 교수에 대한 비난의 이유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건이든 각각 맥락이 있기 마련이라, 문구만 보고 모순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설사 서로 모순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생각이 시간에 따라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조국 교수의 일관성을 비난하고 싶다면, 지금 제가 올린 이 건들에 대해서 침묵하는 이유부터 설명해야 합니다. 조국 교수는 개인 자격으로 자기 생각을 밝힌 것에 불과하지만, 이들은 정치적 책임을 지는 정치인으로서, 이런 식으로 정치활동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조만대장경” 운운하는 사람들 중 이런 모습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본 기억이 없습니다.그 분들, 조국 교수의 논리적 일관성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인티그리티를 돌아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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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태
2023년 8월 8일
소설가 김훈이 중앙일보에 실린 한 특별칼럼으로 사람들의 구설수에 올라 있다. 그는 일찍이 "남성은 여성보다 비할바없이 우월하다"는 여성 비하발언으로 유명세를 치르기 시작(그 발언으로 시사저널 편집장에서 물러나게 되었던 것 같다)할 때부터 <주목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번도 그를 <주목할만한>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2년 나의 첫번째 에세이집 "어른되기의 어려움"이 생각의 나무에서 나왔다. 동아일보 등에서 크게 보도를 해준 덕분에 제법 팔리기도 한 이 책을 낼 때 같은 출판사의 박광성 사장은 홍보를 위해 책 표지에 김훈의 발문을 얻어 수록해 주었다. 나는 고마웠지만 그가 뭐라고 썼던지는 지금도 뚜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박사장도 그 의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사실 절반은 자기가 임의로 고쳤노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는 김훈의 <칼의 노래>가 워낙 히트를 칠 때여서 출판사로서는 그 후광에 기대고 싶은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훈의 <칼의 노래>가 맹위를 떨친 배경에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풍운아로서 빠르게 등장하여 권좌에 올라섰다. 신년 청와대 기자 회견에서 그는 요즈음 무슨 책을 읽고 계십니까 하는 질문에 답하기로 되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읽고 있다고 답할 생각이었다. 그 때 젊은 담당 비서관이 이의를 제기했다.
"대통령님, <난중일기>도 좋습니다만 그 책은 박정희 대통령의 이미지와 너무 결합되어 있습니다. 꼭 이순신을 강조하고 싶으시다면 요즘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가 떠오르고 있으니 그 책으로 바꾸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노대통령은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여겨져 마침 그 책도 보았기 때문에 기꺼이 동의했고 그렇게 선택된 대안 <칼의 노래>는 독서계에 선풍을 일으켜 엄청나게(연간 수십억)팔렸고 출판사 생각의 나무도 고도 성장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김훈의 그 유려한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 지난 2021년에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를 낼 때 박사장은 내게 "이번에는 김훈 선생의 발문 같은 것은 싣지 않기로 했습니다." 하였다. 김훈에 대한 평가도 예전과는 다르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속으로 잘 되었다 싶었다. 김훈의 유려한 문체를 좋아하는 일부 마니어들은 김훈의 몇몇 문장을 외울 정도라지만 나는 한번도 그의 문장에 경도된 적이 없었다.
나는 <칼의 노래>의 비정상적 흥행이 어쩌면 김훈의 판단력을 망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남한산성 등 후속작들이 잇달아 히트를 친 것이 그 점을 짐작케 한다. 물론 흥행이 그렇게 만든 점도 있지만 그에게는 원래 그런 요소가 있었다. 먹고 살기 위해라는 이유로 전두환에 대한 용비어천가를 쓴 것도 그 선상에 있다. 이번 칼럼에서 난데없이 조국가족을 난타한 것은 내가 볼 때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소설가에게 있어서 돈을 번다는 것은 금기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공직생활이라도 얻어걸려 별다른 생활고를 겪지 않고 이 나이에 이른 나도 그간의 평온했던 삶을 가릴 수 없는 치욕으로 여긴다. 솔직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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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2023년 8월 9일
"아마도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지위에 오른 인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의 부인일 터인데, 그는 아직도 자신의 소행이 사람들에게 안겨준 절망과 슬픔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일가가 관련된 재판의 과정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인연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미망(迷妄)일 수가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나 자신의 무명(無明)과 마주 대하고 있었다."
난 김훈의 글을 좋아했다. 그의 문체를 따라 쓴 글(김훈이 쓴 줄 알았다는 평을 들은)도 몇 편있고, 그의 문체는 내 글에 어느새 스며들어있다. 내 책장에는 그의 책들이 가지런히 꽃혀있다.
그럼에도 그의 이번 글을 읽으며 '개새끼'라는 말이 순간적으로 나왔다. 그가 뜬금없이 조국을 소환해서는 아니다. 그의 시각이 다른 이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가 쓴 전두환 찬가는 이미 읽어봤다.
다만 '재판의 과정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인연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미망(迷妄)일 수가 있겠구나'라는 문구를 보며 욕이 터져나왔다. 어떤 해석을 하려해도 조국 가족 안에 부모와 자식의 고귀한 인연이 깨어졌다는 말 아닌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엄마는 감옥에서 고생하는데 딸은 잘먹고 잘 놀러다닌다는 말을 하고 싶나? 부인은 책임 지고 갇혀있는데 남편은 아무것도 몰랐다고 부인하고 있다는 건가?
조민의 모습을 보며 난 처절함을 느낀다. 그냥 끝내버리고 싶지만, 어떻게든 당당하게 살아가려는. 세상 앞에 어떻게든 나 안죽어라고 말하고 있는. 조국도 마찬가지다. 책을 쓰고 강연을 하고 사진 앞에 웃음을 보이지만, 그들 속마음은 어떻겠나. 매일이 지옥 아니겠나. 그런데 그 관계를 건드리다니.
살기위해 약해지고 살기위해 악해진다면 (김훈 그의 표현이다) 그는 악해지는 것을 선택했다. 최소한의 상식이 있다면 누구와 연대해야하는지, 누가 이 상황의 '악'인지 알 수 있다. 문장 하나로 세상이 베어지기를 원했다면, 그 문장으로 누구를 베어야하는지 알아야하지 않겠나. 조국 가족에서 누구 하나 죽어나가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걸까. 아니 누구 하나 죽어도 상관없다는 건가. 어찌 이리도 악독한가.
말할 가치도 이젠 없다. 사람이길 거부한 또 다른 작자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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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권
2023년 8월 9일
김훈 논란을 보며
작가 김훈의 중앙일보 칼럼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이라는 칼럼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는 거 같다. 나는 김훈이라는 보수적 세계관을 가진 작가의 행적, 특히 산업(노동)안전과 관련한 그의 집착과 따스함을 보면서 우호적으로 보고 있었다. 중앙일보의 칼럼 또한 그의 보수적 세계관이 깔려있지만 충분히 수긍하고 의미 있는 사회적 비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소위 조빠들이나 개딸 등의 세력이나 개인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난리를 피고 저주를 퍼붓는 거 같다(^^). 조국에 대한 그의 정밀타격이 그들의 분노를 자극한 듯하고. 김훈의 과거 행적이 나오고, 전두환 찬양이나 이명박 지지, 마초 행태에 대한 과거를 환기시키며 울분을 쏟아낸다.
가소롭고 또 가소롭다.
내가 아는, 지금 김훈에 분노를 터뜨리는 이들 중 태반이 김용균 사건이나 산업재해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비판과 연대 활동에 대해서는 극찬을 하던 이들이었다. 그때의 논리도, 제대로 된 보수파 그래도 인간미와 휴머니즘을 실천하는 보수주의자라고 지들 꼴리는 대로 규정하고 추앙을 하던 이들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저 모습을 보면 가소롭지 않겠는가...
나는 진보당 조봉암에 대한 재평가를 적극 지지하는 사람이다. 나아가서 한민당과 고려대, 동아일보의 설립자 김성수에 대해서도 친일파라는 딱지에 가려진 그의 진면목을 재평가하고 한국 현대사에서 의미 있는 인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 나는 한국 정치의 양대 거목이라고 불렸던 DJ와 YS에 대해서, DJ는 과잉평가되고 추앙되고 있는 반면 YS는 지나치게 과소평가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조봉암, 김성수, YS에 대해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게 내가 조봉암주의자, 김성수주의자 YS주의자가 되거나 그들의 세계관에 동의한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자도 공산주의에서 전향하고 한국적 사민주의를 정초한 조봉암에 대해서, 한국 보수야당의 원조이자 민족자본가 김성수에 대해서, 자유주의 혹은 보수적 민간정부를 탄생시킨 김영삼에 대해서 우호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걸 부정하거나 혼동하는 건 비극이 아니라 무지일 뿐이다. 이건 사회주의자니까 사회주의 내부의 어떤 인물 사건들에 대해서 무조건 결사옹호해야 한다는 어떤 행태들과 세계관의 거울 속 판박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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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
2023년 8월 9일·
[참전] 김훈 작가를 별로 안좋아한다. ‘칼의 노래’와 단편소설 몇 편 읽은게 다다. 그가 쓴 책은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시각은 좋다. 이른바 명사 중에서 노동자의 산재, 사고사망에 대해 깊이 천착한 사람은 우리사회에 거의 없다. 최근 논란이 된 글에 대한 문제제기는 왜 하필 조국 장관 가족만 끼어넣었는가인데, 비판의 배경에는 공권력이 과도하게 한 가족을 망쳐놓았는데 왜 또 소환했느냐는 거다.
조국 장관의 자녀 문제에 대해 나는 사건의 초기부터 일관된 의견이 있다. 이건 형사적으로 처벌할 대상이라기보다 도덕적인 문제였다고. 그래서 조국 장관 가족에게 들이댄 법의 잣대는 과잉이라고 판단한다.
김훈의 글 한편 때문에 조리돌림하고, 그의 책을 분서갱유한다는데, 그것도 과잉 아닌가. 공권력의 과잉에 분노하는 분들이 또다른 인물에게 사적으로 과잉대응하는 것을 보자니, 욕하면서 닮는 것인가? 다들 숙의하지 않고 괴물이 되어가는 것인가??
(추가) 도덕적으로 비난하고 힐난하고 끝나야 할 일이 왜 한국 사회를 두 조각 내는 이런 상황까지 왔는가?! 지지자는 지지자들대로, 비판하는 자는 비판하는대로 각자 옳다고 주장하고 믿을 것이다. 다만 검찰이 초기부터 과도한 정치개입을 했고 공권력이 남용되는 것을 왜 저지하지 못했는가?는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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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훈구
2023년 8월 9일
어제는 잠이 오지 않았다. 김훈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김훈 때문에 분노하고 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김훈이 변절했다고 속았다고 화내고, 김훈의 모든 책을 갖다버리고, 다시는 김훈을 읽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정념 때문이다.
그들이 김훈을 욕하는 건 김훈이 8월 4일 중앙일보에 기고한 칼럼 때문이다. 서이초 사건에 분노하는 교사들의 집회를 취재하고 우리 사회의 '내 새끼 지상주의'를 원인으로 지적하는 칼럼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두 문장 때문이다. "아마도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지위에 오른 인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의 부인일 터인데, 그는 아직도 자신의 소행이 사람들에게 안겨준 절망과 슬픔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일가가 관련된 재판의 과정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인연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미망(迷妄)일 수가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나 자신의 무명(無明)과 마주 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직도 또 조국 때문이다.
(저 두 문장의 맞고 틀림을 옳고 그름을 논하고 싶지 않다. 이제는 너무 지겨운 일이다.)
두 문장 때문에 SNS에서 작가의 기록말상형이 이뤄지고 있다. 저 두 문장만 없다면 칼럼을 자기 피드에 퍼날랐을 사람들이, 저 두 문장 때문에 김훈의 책을 가져다버리고 그 책만큼 빈 책장을 전시하고 있다. 김훈의 과거 행적과 지난 발언들을 끄집어내서 자신의 '캔슬'을 정당화하고 있다. "원래 김훈은 그랬어. 전두환 찬양 기사를 쓴 사람이야. 남성 우월주의자잖아. 그 사람 MB를 찍은 사람이야. 원래 그런 사람이야." 마치 역사를 몰랐던 것처럼, 순결한 피해자처럼, 확신에 차셔 야만을 행하고 있다. 김훈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을 때는, 시대의 양심이라 추켜올리던 사람들이, 김훈을 수구꼴통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문화예술에 대한 검열에 저항한다는 사람들이, 블랙리스트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내 새끼가 아니면 사지 않고 보지 않겠다는 자신들의 소비자 정념이 얼마나 열린 사회를 망치고 있는지 짐작조차 못하고 있다. 저 야만이, 저 광기가 나를 휩쌌던 시절이 떠올라서, 저 야만이 저 광기가 나를 향했던 과거가 떠올라서, 저 야만이 광기가 다음은 어디로 향할지 몰라 두려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들은 김훈을 사랑한 적이 없다. 김훈을 읽은 적이 없다. 오직 내 새끼 김훈만 사랑할 뿐이다. 내가 듣고 싶고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내 새끼 김훈만 읽었을 뿐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다. 책을 읽고 연극을 본 적이 없다. 오직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로 이뤄진 내가 믿는 세상을 살아갈 뿐이다. 자신의 교당을 무해하고 무균한 상태로 관리하느라 교당을 나서지 못하는 집사일 뿐이다. 사람이 얼마나 다중다양한지, 삶이 얼마나 교차되어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모순적인 사람인지 들여다볼 여지가, 용기가, 인간성이 없다. 내 새끼주의를 비판하는 김훈의 칼럼은 그 칼럼에 대한 세상의 반응으로 완성되고 있다.
나는 우리 나라에 좌우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있어야 한다면,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의 그 구절,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러운 역사를 모두 지워버리는 사회. 아니 마음에 들지 않는 역사를 모두 더러운 것으로 몰아 비워버리는 사회의 좌우명은 그것이 되어야 한다.
김훈은 아무리 더러운 김훈이라도 좋다.
마찬가지로, 조국도 아무리 더러운 조국이라도 좋다.
당신은 아무리 김훈 책을 갖다버리는 야만적인 당신이라도 좋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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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원재
2023년 8월 9일
김훈의 글을 읽고 부르르 떠는 사람은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게 좋다. 김훈은 익명 속에 숨은 학부모 집단(이라고 쓰고 '일부 진상 학부모'라고 읽는다)의 '내새끼 지상주의'가 이 사태의 근본 원인이라고 질타했다. 욕 먹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용기 있는 말이다.
이 지적에 대해 부르르 떨 사람은 '일부 진상 학부모'나 그 가족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사람은 부르르 떨 이유가 별로 없을 테니까. 이 말에 대해 부르르 떤 사람은 자신이 '진상 학부모'가 아닌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부르르 떨 가능성이 높은 또 다른 부류는 '조국 지지자들'이다. 김훈이 조국 부부의 행태를 '내새끼 지상주의'의 예로 들었기 때문이다. 조국을 비판하는 사람은 부르르 떨 이유가 별로 없다. 이 대목에서 부르르 떤 사람은 범법자를 두둔하는 자신을 먼저 돌아봐야 한다.
김훈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솔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 비판하는지 이유가 분명치 않고, 그저 "실망했다"는 게 전부다. 김훈이 "틀렸다"라기보다는 "싫다"는 것으로 보인다.
뭐 싫을 수도 있다. 내 은밀한 욕망을 파헤치고 내 우상을 끌어내리면 당연히 싫을 것이다. 그러니 "김훈이 우경화됐다"느니 "예전의 김훈이 아니다"느니 객적은 소리 말고, 차라리 솔직하게 "난 김훈이 싫다"고 말해라. 누가 뭐라겠는가?
김훈의 시선은 따뜻하면서도 날카롭다. 진영이고 권력이고 가리지 않고 면도날처럼 파고들어 핵심을 간파한다. 그리고 무고하게 고통받는 약자를 따뜻하게 감싸 안는다. 지가 싫다고 그 대상을 망가뜨리는 짓은 두고 볼 수가 없다. 침 뱉는 사람들이 있어서, 김훈의 글을 다시 소개한다. 아직 못 읽어본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하고, 군더더기 없이 간명한, 좋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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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 Yong Im
2023년 8월 9일
1980년 8월 24일, 김훈은 광주학살로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에 대한 특집 글을 상, 중, 하, 세 편으로 나눠서 <전두환장군 의지의 30년>을 쓴다. 미당 서정주는 전두환 생일에 축하시 한 편 써달라고 하니 '위대하신 민족의 영도자'라는 전두환 찬양시를 썼지만, 김훈이 전두환장군 찬양 글은 쓴 것은 순전히 자기 의지이다.
나는 2018년, 친일문학상 관련 글을 쓰면서 80년도 신문에 나온 전두환 찬양 기사들 중에서 김훈의 글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때, 난 이미 한국 최고의 문장가라는 김훈 소설가 이 사람 심각한 문제가 있구나 싶었다.
김훈 문장 좋다고 하는데, 그의 글을 영역이나 외국어로 번역해도 과연 그럴까? 세계문학으로 인정받는 문학은 문장(그건 언어가 다르므로)이 아닌 사상- 철학과 주제이다. 창작이 아닌 사회적 글이나 컬럼 같은 글은 내용 전달과 명확한 메세지가 생명이다. 그런데 김훈과 같이 말 가지고 언어로 재주부린다고 해서 결코 훌륭한 글이 될 수 없다.
-김훈의 글을 읽으며 떠오르는 것은 역시 그가 쓰고 말한 과거의 흔적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광주민주화항쟁의 피웅덩이를 딛고 전두환이 권좌에 오른 1980년 8월 24일 그가 한국일보 전면 기사로 쓴 것이다. 제목은 “전두환 장군 의지의 30년”(사진 1). 제 정신으로 썼든 억지로 썼던 역사적 부역의 글이다.
두 번째는 2000년 9월 27일 한겨레21 인터뷰에서 그가 떠들어댄 다음의 내용. “(재벌이 아들한테 회사 물려주는 거) 그거 한심하지만 불가피한 거라고. 나도 내집 아들한테 물려줄 판인데…. 우리 사회의 문제를 개선할려면 재벌이 자본을 인간화해 리더십을 보강하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고. 재벌이 무너지면 우리가 무너져. 노동자들이 무슨 연대를 해. 노동자가 우리 사회에서 제일 보수주의잖아. 무슨 신기술 도입하면 저항하고 구조조정에 저항하고… 노동자들이 제일 보수적이고 재벌 리더들이 가장 진보적이라고.” “나는 <조선일보>를 아주 좋아해서 평생을 보는데, 가장 우수한 신문이더만. <조선일보> 사설 같은 걸 보면 얼마나 글을 잘 쓰는지 소름이 쪽쪽 끼친다고. 우리 기자들보고 이것 좀 보고 배우라고 하지. 근래 들어 정권에 대해 가장 극렬하게 저항하고 있는 게 <조선일보> 아니야?”
한 인간이 인생의 20년 단위로 이런 글을 꾸준히 쓴다는 것은, 그의 세계관이 평생을 두고 큰 변화가 없다는 한 증좌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점에서 김훈이 그그저께 중앙일보에 올린 글도 (색깔과 주장의 지점이 조금 이동하기는 했어도)결국 수십년 간 변하지 않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나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얄팍하고 즉흥적인 마초주의. -프레시안뉴스통신, 김동규 컬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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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훈
2023년 8월 9일
상식적인 사람들이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것은 이익 앞에 충실하고 언론의 본분을 망각한 그들의 치우침이다. 한쪽은 눈감고 다른 한쪽은 도끼눈을 뜨고 침소봉대와 왜곡을 서슴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불편부당한 언론의 모습이 안 보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가 가지고 있는 잣대가 엿장수 가위질처럼 마음대로이기 때문에 비판을 하는 것이다.
내가 김훈을 비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훈이 쓴 '내 새끼 지상주의'의 글에서 그는 조선일보와 같은 전형적인 치우침을 보았기 때문이다.
김훈의 눈에는 왜 조국만 보였을까? 많은 정치인과 권력자들이 김훈의 글에 맞는 예가 많은데 왜 하필 조국 하나만 예일까? 그동안 언론에 언급되어 온 여러 인물들을 같이 예를 들면 안 되는 사정이 있단 말인가? 다른 거 없다. 조국이 쉬운 먹잇감이기 때문이다. 이미 그는 언론과 검찰 권력에 의해 난도질을 당해 너덜너덜해졌고 그 너덜너덜해진 상처에 칼 하나 더 꽂아도 티도 안 나고 스스로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내 새끼 의혹이 있는 한동훈이나 정순신, 이동관에게 칼을 꼽았을 때 오는 혹시 모를 불안감도 없기 때문아닐까? 나는 김훈의 문학을 논 할 실력도 그럴 능력도 없다. 그러나 인지상정은 있다. 김훈, 당신 참 비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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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열
2023년 8월 9일
김훈은 세상없는 마초고, 자기 할 말 다 하는 것 같아도, 조중동에 물든 늙은 하이에나에 불과하다. 쉬운 먹잇감을 덥썩 물고 살점을 뜯어내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흔드는 비겁한 늙은 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국적 파쇼의 한 축을 형성하는 괴벨스의 대리인들이 장악한 조중동에 무비판적인 지식인, 작가는 이 시대의 아이히만이거나 그 대리인에 불과하다. 김훈의 조국 비난이 최소한의 정당성을 얻으려면, 그가 지면을 통해 단 한번이라도 윤석열의 ‘내 마누라 지상주의’에 대한 엄혹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댔어야 한다. 조국의 가족이 대한민국에 무슨 피해를 주었는지 알기는 어렵지만, 윤석열의 처와 장모가 이 사회에 끼친 해악과 피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데 들보는 못 보고 티만 찾아내는 해태 눈깔을 가지고도 작가라고 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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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
2023년 8월 10일
김훈의 남한산성
조국 장관의 자녀사랑이 능지처참 수준의 죄가 된 마당에, 이를 김훈 작가는 ‘내새끼 지상주의’란 신조어를 탄생시키며 재차 가해.
김훈의 저서 <남한산성>을 쥔 그의 딸은 일약 피디계의 주목받는 시나리오 제공자로 부상하게 된 사실, 판권을 쥔 딸은 아버지를 잘 둔 천혜적 이익을 얻게 된다. 영화계에 일약 이름값 상승은 아버지가 유명 소설가, 원작자라는 배경. 내새끼 지상주의, 불공정의 사례라 할만 하다.
예를 들어 문학잡지를 내는 사장이 그의 자녀에게 몇장 꼭지를 내주면서 신인 데뷔를 시켜주는 것, 아버지 빽으로 작가 소리를 듣게 한 것은 공정에 위배 사례 아닌가. 이런 자기 잘못이나 불공정은 돌아보거나 헤아릴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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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구
2023년 8월 10일
김훈에 대한 나의 생각
1. 여러 포스팅을 읽으면서 내가 그에게 느낀 것은 조국 교수에 대한 그의 가차 없는 비열한 공격의 부당함이었다. 지난 수년을 거쳐, 우리 사회에서 조국 당시 장관과 그의 가족에 대한 윤석열 검찰의 노골적인 법적 몰매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민주국가의 법치를 담당하는 공권력기관 구성원들이 조국 교수 당사자만이 아니라 그의 아내, 딸, 아들, 부모, 형제, 주변인을 범죄 혐의자로 몰면서 그 가족이 지니고 있었던 지위, 희망, 관계, 그리고 사회 변혁에 대한 신념 모든 것을 박살을 내고 있다. 마치 한 가족을 모두 도륙하듯 한 사람 한 사람의 모든 사회적 관계를 공공연히 파괴하고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야만적인 공적 기관의 폭력이다. 나는 지금도 사람의 얼굴을 버린 검찰의 어두움을 보고 있다. 이 검찰은 마치 연좌제 법을 적용하듯 조국 교수 가족 구성원 모두를 사거리로 끌어내고, 증거 여부를 떠나 노골적인 "죽이기"에 몰두하고 있다. 민주사회의 법치적 절차에 따라, 증거에 의하여,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처벌하는 것이 아니다. 내게 몹시 괴롭게 보이며 다가오는, 이 현장을 김훈은 보지 못하는 것일까?
2. 민주사회의 한 구성원인 작가 김훈은 이런 현실을 정말 못 본 것일까? 아니면, 조국 가족이 윤석열 검찰에 의해 저렇게 온 가족이 도륙당할 만한 "제 자식 감싸기" 대역죄를 지었다고 그도 정말 믿고 있는 것일까? 국민이 맡긴 공권력을 거머쥔 검찰이 한 가족 구성원 모두에 대해 적대적으로 공공연한 법적 테러를 가할 때, 어느 누구도 이를 막지 않고 버려두었다.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그리고 집권당 여당도 나서지 않았다. 그들이 침묵할 때 윤석열 검찰의 부당한 행위에 대하여 침소봉대 환호하는 이들도 있었다. 부패 언론, 일상에서 그들의 정신적 사주를 받아 조·중·동의 논리를 확대 재생산하는 목사들과 조·중·동 독자들, 그리고 친북 좌파, 빨갱이, 공산당이라고 지목만 해도 마치 그들을 향한 공격 행위를 허락받은 것인 양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성과 합리성으로 설득할 수 없는 무리가 있었다. 이성과 합리성을 버린 집단의 싸움, 나는 그것이 진영싸움이라고 생각한다.
3. 나는 지난날 우파 정치 세력이 이 진영싸움의 먹잇감을 대준 공급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정치세력이 검찰을 사나운 사냥개로 키워왔다고 본다. 그리고 지금은 그 정치세력의 중심부에 마침내 사냥개들이 포진한 상태라고 본다. 검찰을 사냥개로 키워온 정치세력, 이들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좌파, 우파로 나누고 상대를 좌파, 빨갱이로 몰아 집단 학살까지 여기저기서 벌려온 장본인들이다. 이런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들에게 적대적 태도를 보였다가는 좌파 빨갱이로 몰려 온 집안이 화를 입을 것이라는 상징적 위협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런 불행한 정치적 풍토는 해방을 전후하여 친미 정치 세력이 정권 장악을 위해 기능적 효율성이 높은 친일 세력을 계속 기용하면서 형성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반 친미 세력을 악마화 하며 내전과 유사한 십자군 전쟁을 지속시킨 장본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십자군 전쟁 이데올로기에 빠지면 적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보지 못하고 악마나 사탄으로 보게 된다. 기독교인이 쉽게 걸리는 정신병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휩쓸려 다니는 것을 생래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 의지와 선택이 아닌 묘한 폭력성에 이끌려지는 공간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속한 학회 이외의 집단에서 공동작업을 한 경우가 거의 없다. 하지만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부당한 것이라고 주장한 적은 많다. 무슨 위대한 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자리에서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부정하는 더 큰 힘에 반대하여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한 소소한 싸움이다. 그러다 보니 힘을 가진 이들과 부딪히게 되면 그들은 곧장 나의 신분과 생계를 위협했다. 그 결과 다양한 불이익을 겪는 일도 적지 않았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내가 속했던 대학의 총장과 거의 평생을 동료로 지내던 보직교수들과 다투다가 3년의 긴 휴직을 강요받은 적이 있었다. 그 기간 나는 퀘이커들을 만났고, 홍콩중문대학, 타이난 대학, 필리핀 대학에서 강의하며 사람들을 사귀었다. 나를 위해하려 든 이들은 평소 페미니즘 옹호자, 교육 개혁론자, 그리고 종교 간 대화 프로그램의 전선에서 종교간의 평화를 위한 글을 쓰고 책을 읽던 이들이었다. 나는 이때 학문과 이익 관계, 그리고 도덕적 판단은 별개의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런 경우를 일러 학자로서 통전성이 없는 경우라고 여긴다. 이런 이들이 편집진으로 있는 잡지에서 기고해 주기를 요청했을 때 나는 거절했다.
4. 나는 사람의 통전성이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때와 장소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같은 무늬를 가지는 정직함을 지키려는 노력이 지속되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윤석열 정권은 정치적 진영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이들을 향해서는 공금 10만 원 사용한 것을 절대 비리인 양 호들갑을 떨더니, 정작 자신들이 영수증 없이 사용한 70여억 원의 혈세에 대해서는 무엇이 문제냐고 뻔뻔스럽게 되묻는 이를 법무부 장관으로 앉혔다. 정직하지 않는 인물들이 대거 각료가 된 나라다. 그리고 거리에서, 지하도에서, 공사판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고, 누군가의 통곡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김훈은 지금 어떤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는 이런 세상에서 스스로 목숨을 버린 한 초등학교 교사의 죽음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자신이 만든 "제 새끼 감싸기"에 빠져버렸다. 초등학교 교사의 죽음이 정말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에 가까운 "제 새끼 감싸기"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남편의 권력에 깃대 평소 야만적으로 살아온 어느 어머니의 권력형 관계 폭력, 교사 괴롭힘의 문제였던 것일까? 제 새끼 감싸기 일반에 빠진 김훈은 순간 야만적으로 한 젊은 여교사를 괴롭혀 온 사람을 놓아주고 뜬금없이 조국을 불러들여 그를 다시 발로 차고 있었다. 자기 자식 감싸는 것이 그에게는 용서 못할 대역죄라도 되는 것일까?
그런 그의 글을 읽고 여러 사람이 그에 대한 실망을 드러내며 나무랐다. 나무라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자신이 쓴 칼럼의 오류를 깨닫지 못하고 그를 비판하는 소리를 진영이 다른 이들로부터 몰매를 맞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제 세끼 감싸기에 조국을 끌어들여 탓을 하더니, 이번에는 진영 탓이다. 이 정도면 나는 김훈의 판단력은 심각하게 자기애에 오염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김훈이 이해가 간다면서, 혹은 김훈의 본시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면서, 김훈의 오류를 진영싸움의 논리 속에 묻어버리려는 소리도 나온다. 나도 김훈의 주장이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나의 그에 대한 비판이 진영논리로 취급되는 것은 더욱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조국과 그의 아내가 자기 새끼 감싸기를 한 것이 설령 다소 있을지라도 검찰이 주장하는 것처럼 범법 행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행위가 범법 행위라면 한동훈도 자기 새끼 감싸기를 요란하게 했으니, 감옥에 갔어야 하고, 음주 운전을 하며 고급 세단을 몰다가 사고를 친 아들을 둔 자도 조사해 감옥에 보냈어야 한다. 자식 학폭을 무마했다는 혐의가 있는 국토부 장관도 권력형 범죄자로 몰아 감옥에 보내야 했다. 아이러니는 바로 그렇게 제 자식 감싸기를 끔찍하게 하는 자들이 조국 교수 부부를 범죄자로 몰았다는 것이다. 이 괴이한 집단 폭력의 그림자가 김훈의 사고 속에서도 거침없이 유통되고 있었기에 그가 비판을 받은 것이 아닐까?
5. 김훈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지금의 논란을 마치 진영 흙탕물 싸움처럼 보며 진영 싸움에 빠지면 안 된다는 소리도 여기저기서 나온다. “김훈도 조국도 다 소중하다.” 겉으로는 옳은 말 같다. 하지만 여기에 누락된 것은 진영싸움이 아닌 정직한 비판의 시각이다. 김훈처럼 조국의 삶과 인격을 싸잡아 모독하는 비방은 하지 말자. 그러나 김훈과 조국을 다 잡겠다는 것은 스스로 내면에서 부딪치는 소리를 외면한 욕심이다. 집단 폭력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폭행은 못 본척하고 화해시키려는 것은 위선적인 짓이다. 그 소리는 “윤석열 검찰과 조국 모두 소중하다.” 라고 하는 것과 같이 보였던 전 대통령 소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성경에 여리고로 가는 길에서 강도를 만나 거반 죽어가는 이가 있다고 하였다. 강도들이 출현하던 길목에서 집단 폭력을 당하고 온갖 것을 빼앗긴 그를 돕다가는 자신도 강도 만나는 화를 당할까 하여 도망치듯 비껴가던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평소 거룩하고 품위 있게 살아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이라 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들에 의해 사회적으로 불순한 족속으로 여겨지던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측은지심에 이끌려 그 불리한 정황으로 들어가 강도 만난 사람을 구제했다고 하였다. 김훈은 그리고 그대는 여리고 길과 같은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누구를 닮은 것일까?
강도 만난 사람을 찾아가 강도 만날 짓을 했다고 다시 발로 차는 것이 사람이 할 짓일까? 많은 이들이 김훈의 글을 보고 진영논리를 따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작가의 명성을 가지고 글로써 바로 이런 못된 짓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조국 교수와 그의 딸을 비롯한 가족에게 정중히 사과할 수 있는 용기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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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훈...당신마저 곡학아세하려가?
유영안 칼럼
기사입력 2023-08-15
“선비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선비고, 가장 싫어하는 사람도 선비다.”란 말이 있다. 여기서 ‘선비’란 책 좀 읽거나 글 좀 쓰는 사람을 말하는데, 지식인으로 통칭하면 되겠다. 그런데 왜 지식인들은 서로 존경하지 않은 버릇이 있을까? 위의 말에는 지식인의 자존심, 올곧음, 시기심 등이 동시에 함축되어 있다.
조선시대 이황과 이이는 자타가 인정하는 대학자로, 나이는 차이가 났지만 서로를 존경하기도 하고 은연중 서로 시기하기도 하였다. 이황과 이이의 사상은 너무 깊어 여기서 논할 바가 아니고, 다만 두 학자의 우정과 선비적 태도는 배울 만하다.
현대작가는 과연 지식인일까?
현대 작가를 지식인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별도로 논의하더라도 그들이 독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부인할 수 없다. 이문열, 김주영, 김훈은 자타가 인정하는 유명 작가들이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고, 김주영의 <객주>도 기념비적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김훈의 <칼의 노래>, <남한산성>, <하얼빈>도 모두 베스트셀러가 된 유명 작품이다. 그런데 이 세 작가에겐 묘한 공통점이 있다.
작가는 보통 시대와 타협하기보다 거대 기득권과 싸우는 경향이 짙은데, 세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작가 특유의 저항 기질은 부족해 보인다.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벗어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역적 한계 때문일까? 아니면 자기만의 어떤 콤플렉스 때문일까?
이문열의 레드 콤플렉스
이문열은 경북 영양 출신으로 서울대 사범대를 다니다 중퇴하고 작가의 길을 걸었다. 데뷔작 <세한도>는 명작의 반열에 올랐고, 그후 나온 <사람의 아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영화로 나올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다. 하지만 이문열은 부친이 서울대 농대 교수를 하다가 6.25때 북한으로 납치되어 평생 ‘레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래서인지 그는 차츰 인식이 보수화되었고, 급기야 한나라당(국힘당 전신) 때 공천 심사위원을 맡아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자 분노한 독자들이 이문열의 저술을 모아놓고 불살라버린 사건이 벌어져 충격을 주었다. 이문열은 이후 ‘북악문원’에 파묻혀 한동안 세상과 등지고 살았다. 하지만 그후로도 극우 중 극우인 황교안을 지지하고, 간혹 언론에 인터뷰하며 극우적 발언을 서슴없이 해 그동안 자신의 책을 사준 독자들을 분노케 하였다. 작가에게 자신의 책이 불태워지는 일만큼 더 큰 치욕이 또 있을까. 이문열은 경북 영양에 있는 생가가 불타는 아픔까지 겪었다.
이문열 작품 전반에 나타나 있는 것은 ‘허무 의식’으로 엄석대가 나중에 기차에서 형사에게 체포되는 장면이나, 현역 군인이 제대 군인에게 얻어맞는 장면이나, 폭풍우를 만난 배 안에서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편하게 잠을 자고 있는 돼지의 모습엔 작가의 짙은 허무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세상이 아무리 혼란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식인, 그 돼지는 바로 이문열 자신이 아니었을까.
4대강 칭송한 작가 김주영
작가 김주영은 <객주>로 널리 알려진 원로 작가(1939년 생, 85세)이다. 그의 고향에는 ‘청송 문학관’이 건립되어 있고, 지자체의 지원으로 말년을 편하게 살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가 이명박 정부 때 추진한 4대강 개발을 칭송하며 언론에 자주 나와 인터뷰하였다는 점이다. 유명 작가 중 4대강 개발을 칭송한 작가는 거의 없다. 김주영은 노무현 대통령을 일컬어 “패거리 정치“ 운운하기도 하였다. 고향이 경북이어서 그런지 인식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조국 가족 비판한 김훈
우리들에게 <칼의 노래>, <남한산성>, <하얼빈>이란 소설로 친숙한 작가 김훈이 최근 조국 가족을 비판한 글을 수구 언론에 실어 논란이다. 그 소식이 알려지자 민주당 강성 지지층들이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일부 독자들은 벌써부터 “김훈 책을 갖다 버리겠다.”라고 울분을 토했다. 일부에선 “제2의 이문열이 나타났다.”라고 성토했다.
한때 ‘김훈체’ 라 할 정도로 문장 하면 김훈으로 통할 정도로 독특한 문체를 구사해 각광을 받았던 작가 김훈이 살 만해져서 그런지 보수적 색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출신인 김훈은 소설 외 주옥 같은 산문도 여러 편 썼다. 필자 역시 그의 주요 작품은 모두 읽었다. 특히 자전거를 타고 숲 여행을 하는 산문은 가히 일품이다.
작가의 작품과 그의 사생활은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나 작가의 글이 독자나 그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때 그건 이미 사생활의 영역이 아니다. 세상엔 ‘보편타당’이란 말이 있다. 그래, 누가 봐도 그런 것 같아, 이것이 보편타당이다. 그러나 조국 가족에 대한 그의 비판은 편견이 가득해 보인다.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
작가 김훈은 4일자 중앙일보 1면에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공교육과 그가 죽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기고했다. 최근 발생한 서울 서이초 교사의 자살을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으로 본 것이다. 이는 학생인권조교례가 교권을 침해했다고 보는 보수들의 시각과 맥이 통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 여교사를 지속적으로 괴롭힌 소위 ‘똥깨나 뀌고 사는 학부모’가 문제이지, 학생인권조례가 교권을 침해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다. 물론 작가 김훈도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논란이 된 것은 그 글에 조국 가족을 슬쩍 집어넣은 점이다. 작가 김훈은 그 글에서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지위에 오른 인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의 부인이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소행이 사람들에게 안겨준 절망과 슬픔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해서 공동체의 가치는 파괴됐고, 공적 제도와 질서는 빈 껍데기가 됐다”라고 성토했다.
결론은 조국 죽이기?
작가 김훈의 기고 글은 겉이 서이초 교사의 죽음이라면 속은 조국 가족 비판인 것 같다. 수구 언론들은 ‘김훈 작가가 말한 단 두 줄 때문에 개딸이 분노했다’라고 보도했지만, 사실상 그 두 줄에 그 글을 쓴 의도가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글이 실려 있는 언론 매체도 중앙일보다. 중앙일보가 작가에게 원고를 청탁했는지 작가 스스로 써서 보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국 남은 것은 조국 가족 상처내기로 보인다.
조국 교수는 자타가 인정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서울대 법대 교수로, 그동안 그가 발표한 논문은 가장 인용이 많을 정도로 유명하다. 조국 교수는 법철학에도 조예가 깊어 이미 많은 베스트셀러를 냈고, 최근에도 <조국 법고전 산책>이란 책을 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다.
작가 김훈이 조국 교수의 저술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같은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자신의 소설 <하얼빈>보다 조국 교수의 <조국 법고전 산책>이 더 많이 나간 것에 심기가 불편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선비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선비고, 가장 싫어하는 사람도 선비다.”란 말이 증명된 셈이다. 하지만 김훈의 기고 글이 그런 하찮은 질투가 아니길 빈다.
작가로서 측은직심도 없나?
우리 민족의 정서는 측은지심이다. 법도 가족이 모두 범죄 혐의에 연루되었을 때 부모나 자녀 중 하나에는 관대한 것이 관례였다. 정경심 교수는 표창장을 위조했다는 죄로 4년 선고를 받아 지금 복역 중이다. 조국 교수도 재판 중이다. 그런데 검찰이 이미 고졸로 만들어버린 조민 양을 기소하고 아들도 기소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적어도 이 땅의 양심 있는 작가라면 윤석열 정권의 선택적 정의와 수사에 대해 비판하면서 수십 가지나 되는 본부장 비리 수사를 촉구하고 조국 가족을 비판해야 된다. 하지만 작가 김훈은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이란 자극적인 말로 현 교육계를 진단하고, 거기에 슬쩍 조국 가족을 삽입한 얍삽함까지 보였다.
작가 김훈에게 묻는다. 조국 가족이 전부 구속되어야 편하겠는가? 공정과 상식이라는 거짓 구호로 국민을 기만한 윤석열 정권보다 이미 멸문지하를 당한 조국 가족을 또 상처내고 싶은가? 그대는 윤석열 정권의 굴욕적 대일외교, 빈손 한미외교, 경제파탄, 노조탄압, 언론탄압, 야당탄압, 수십 가지나 되는 ‘본부장 비리 혐의’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는가? 이제 필자도 김훈의 독자임을 거부한다. 이황과 이이의 시대가 차라리 그립다.
출처 http://m.kookminnews.com/7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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