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10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앞에 장문의 대자보가 나붙었다.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학생은 전지 3장 분량의 대자보에서 끊임없는 경쟁과 불안감을 조성하는 대학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그 한 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믿음으로.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25년 동안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친구들을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가는 친구들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채찍질 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 서서 이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다시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 질주가 시작될 것이다. 이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이제 나의 적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이다. 국가는 의무 교육의 이름으로 대학의 하청 업체가 되고,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에 '인간 제품'을 조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하청 업체가 되었다. 기업은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 이 변화 빠른 시대에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돌입한다.
'세계를 무대로 너의 능력만큼 자유하리라'는 넘치는 자유의 시대는 곧 자격증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졸업장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격증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학습된 두려움과 불안은 다시 우리를 그 앞에 무릎 꿇린다.
생각할 틈도, 돌아볼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또 다른 거짓 희망이 날아든다. 교육이 문제다, 대학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생각있는 이들조차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공해서 세상을 바꾸는 '룰러'가 되어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너희의 권리를 주장해. 짱돌이라도 들고 나서!" 그리고 칼날처럼 덧붙여지는 한 줄,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없는 대학에서, 우리들 20대는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는 '적자세대'가 되어 부모 앞에 죄송하다. 젊은 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살이 되어서도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이대로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우리 젊음이 서글프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리고 대학에서 답을 찾으라는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그러나 동시에 이 체제를 떠받쳐 온 내 작은 탓을 묻는다. 이 시대에 가장 위악한 것 중에 하나가 졸업장 인생인 나, 나 자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덕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
이계삼 선생의 글, 한겨레신문에서
“이제 대학과 자본의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떡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대학생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의 글을 읽는다. 숨죽이며 읽고 또 읽는다. 나는 그의 글이 한편의 기다란 시라는 생각이 든다. 유신 치하에 숨막히던 이들에게 던져진 김지하의 시가 그러했을까. 나는 하루종일 그의 글이 준 감동과 충격 속에 있었다.
김예슬씨는 “스무 살이 되어서도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고 그랬다. 대학생이 된 아이들이 찾아와 풀어놓는 대학의 풍경은 듣다 보면 하나같이 눈물이 날 것처럼 가슴이 꽉 막히는 이야기들이었다. 초·중·고 12년을 대학 하나만 바라보고 내리닫게 채찍질을 했다. 그렇게 진입한 ‘약속의 땅’이었건만, 그들을 정신적 백치가 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는 굴레 속으로 다시 밀어넣는다. 그렇게 4년을 내달리게 하고서도 끝내 그들을 청년실업자로, 비정규직으로, 신용불량자로, 나이 서른이 다 되어도 제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른아이’로 빚어내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인재 양성 과정’이 아닌가.
8년 동안 교원 임용고사를 본 사람을 알고 있다. 70 대 1의 경쟁을 뚫고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졸업생 아이의 수험 체험담을 들은 적이 있다. 네번째 치른 임용고사에서 결국 떨어지고 ‘벌집’이라 부르는 고시원을 나와 노량진 거리를 걷는데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유행가에 눈물이 흘러서 선 채로 울었다는 사범대 졸업생의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김예슬씨의 글을 읽기 전까지 며칠 동안 나는 최근 들어 <녹색평론>에 자주 소개되는 ‘사회신용론’과 ‘기본소득’에 관한 글을 읽고 있었다. 밑줄 긋고 공책에 옮겨 적으며 나는 사뭇 진지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은 ‘돈’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학이 이 모양인 줄 알면서도 왜 대학을 가기 위해 이 난리들인가. 대학을 통과해서 기업에 고용되지 않고서는 ‘돈’에 접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은 어디에 있는가. 돈은 은행에만 있고, 서울에만 있고, 상위 2%에게만 있다. 오늘날 돈은 분명 과잉인데도 국가도 기업도 돈이 모자라 끝없이 돈을 빌리고,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몸부림치고, 결국 사람 몫으로 돌아갈 돈을 가로챈다. 그래서 정규직은 비정규직이 되고, 비정규직은 구조조정된다. 돈이 필요한 곳에 돈이 가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돈’의 노예이다. 그러나 사회신용론은 이 문장을 수정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모두 ‘은행권’의 노예라고. 그러므로 공공통화를 발행하여 은행을 통하지 않고 모두에게 기본적인 필요를 충당할 권리 증서를 나눠주자는 것이 사회신용론의 결론이다. 가장 나중에 온 포도원 일꾼에게도 똑같은 삯을 나누어준다는 예수의 비유처럼, 누구에게나 기본적 필요를 충당할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는 자본가와 창의적인 몇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협력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자연의 선물이며 인류의 축적된 유산이기 때문이다.
김예슬씨가 앞으로 어떤 인생길을 걸어갈지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그는 바로 지금 숨이 막힐 것 같은 이 시절, “쓸모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길을 잃는다”는 강렬하고 아름다운 인간 선언의 주체로 남았다. 그의 결기가 한순간의 치기로 전락하지 않게 하는 것은 김예슬씨가 져야 할 책임이 아니다.
이계삼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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