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언어는 내용과 조형, 즉 텍스트와 이미지가 한 몸이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 시대 서예를 보면 지나치게 문자의 조형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뒤집어 말하면 내용이 부차적이거나 무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예가가 직접 자기의 생각이나 생활 경험을 시나 문장으로 지어낸 작품은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서예가 현실적인 힘을 잃었거나 심하게는 죽었다고 하는 것은 작품 내용에서 동시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바람직한 서예가는 세계의 궁극적인 질서를 문자라는 시각언어로 구현해내는 미술작가인 동시에 말언어로 드러내는 시인이기도 하다.
듣건대 무릇 불법의 참된 경계는 심오하고/ 깨달음의 세계는 아득하고 아득하니/ 맑기가 푸른 바다와 같고 아득하기가 하늘과 같으니/ 지혜의 배로 어찌 그 물가에 이를 것인가/ 또한 지혜의 수레로도 그 끝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聞夫 眞境希夷 玄津杳渺 澄如滄海 邈若太虛 智舟何以達其涯 慧駕莫能尋其際)
배(舟), 바다(海), 나루(津)를 통해 수행자가 무한한 부처님의 깨달음 세계에 이르는 것을 비유해내고 있다. 그 과정과 세계가 너무 거대하고 생생하다. 이 구절은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명(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의 첫 머리인데 이 탑비의 주인공인 낭공대사 행적(行寂, 832~917)의 깨달음과 사람됨의 경지를 창해와 태허에 견주고 있다. 행적은 24세 때인 신라 문성왕 17년에 복천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경문왕 11년에 당나라에 가서 주유천하하며 선현(禪玄)의 이치를 깨친 인물이다. 통일신라 말기 효공왕과 신덕왕의 스승을 지낸 그가 85세로 석남사에서 입적하자 경명왕은 낭공이란 시호와 백월서운이란 탑명을 내리고 최치원, 최승우와 함께 삼최(三崔)로 문명과 필명을 날린 최인연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태자사비는 2500여 글자를 김생의 해서·행서 중에서도 소자(小字) 중심으로 발췌했다. 이 정도의 글자를 찾아내자면 모집단은 이보다 몇 십배가 넘는 규모여야 하고 그러자면 김생이 일생에 걸쳐 써낸 글씨를 대상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방대한 예산과 대규모 집단작업이 불가피하다. 사경(寫經)에서 ‘일자삼배(一字三拜)’하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8세기 김생의 글씨는 이미 9, 10세기 나말여초의 시대서풍과도 차이가 있다. 이미 이 시대는 하대신라의 혼란을 지나 고려왕조 개창 이래 구양순, 구양통 계통의 도끼로 찍은 듯한 삼엄한 필맛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왜 김생의 글씨였을까.
먼저 탑비가 50년 늦게 세워진 사연부터 살펴보자. 세상이 뒤집히는 왕조 말기, 왕사의 탑비마저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긴박한 정황은 이 탑비 뒤 ‘당신라석남산국사비후기(唐新羅石南山國師碑後記)‘에 남아있다. “(비문을 지었으나) 세상은 복잡하고 인심은 교활하여 뜻 있는 일을 하기에는 더욱 어려운 시대였다. 후고려가 사군을 평정하고 삼한이 정정됨에 이르러서 현덕원년 7월15일에 태자산에 이 큰비를 세우게 되었으니 참으로 좋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世雜人猾 難爲盛事 至後高麗國平四郡 鼎正三韓 以顯德元年七月十五日 樹此碑於太子山者 良有良緣者乎)”
왜 김생 글씨를 집자했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으나 서예의 근본정신에 비춰 유추해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명필, 명적은 내용과 조형, 즉 텍스트와 이미지가 한 몸이 되어야 구현될 수 있다. 김생체는 고박한 삼국 글씨를 토대로 운치의 남조풍 왕법(王法)과 남북조의 미감을 두루 갖춘 엄정한 당법(唐法)을 하나로 녹여낸 화엄불국의 원융무애를 구현했다. 이 때문에 낭공대사 행적과 같은 선승을 만나 창해와 태허 같은 경계 없는 선필로 현현될 수 있었다.
김생의 글씨는 퇴계 이황과 같은 조선시대 도학자를 만나 엄정단아하고 거경궁리하는 선비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 또 고려의 탄연이나 조선의 한호, 김정희 같은 거장들의 길라잡이가 되면서 중국과 같고도 다른 한국서예 궤적의 토대가 되었다. 내용과 형식의 일치라는 맥락에서 현재 경복궁에 있는 태자사비는 수 백년 유전의 역사를 끝내고 본래 자리인 경북 봉화 청량산 자락의 태자사로 되돌아와야 한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2071903275&code=96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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