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4일 화요일

[책과 삶]책을 읽는 것, 문학이 어떻게 혁명이 될 수 있나? “넓은 의미의 문학은 세계를 읽고 다시 쓰기 때문”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저자 사사키 아타루 · 박성준 길담서원 대표 대담

박성준 길담서원 대표는 지난해 여름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렸다. 서울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주변 임대료가 폭등하면서 길담서원 건물주가 나가달라고 하던 무렵이었다. 체중이 10㎏가량 줄었고 갑자기 쓰러져 두 번 응급실로 실려갔다. 마음도 약해졌다. 일흔다섯의 나이. “이제 끝나나 보다”란 생각을 했다. 그 와중에 집어든 책이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송태욱 옮김·자음과모음)이었다. 박 대표의 표현대로라면 ‘참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책을 읽은 뒤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지면서 몸도 마음도 살아난 것이다. 책, 문학, 텍스트를 읽고 쓰는 게 혁명이라는 주장을 담은 이 책이 위기에 빠진 지식공동체 길담서원과 박 대표에게 힘을 불어넣은 것이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길담서원을 옥인동으로 옮겨 다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준 저자에게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마침 길담서원 창립 6주년이었다. 

저자 사사키 아타루는 일본 평단에서 각광받는 비평가이자 철학자다. ‘읽기’와 ‘쓰기’의 통념을 전복시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팬은 한국에도 제법 있다. 사사키는 부처·예수·무함마드가 남긴 성전(聖典), 루터의 성경 읽기와 번역 그리고 쓰기를 예로 들며 인류의 혁명은 곧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고쳐 쓰는 데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책이 곧 혁명’이라는 것이다. 

지난달 24일 방한한 사사키는 25·26일 저녁 각각 길담서원과 정동 산다미아노 북카페에서 회원과 일반인을 상대로 강연을 가졌다. 이틀에 걸친 강연은 ‘책과 삶’ ‘책과 혁명’에 관한 것이었다. 사사키는 “위대한 철학자는 단순한 부분에서 시작해 놀라운 결론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이들은 일상적인 일을 기묘하게 쓰는 재주가 있다. 이게 진정한 철학자”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규정한 위대하고 진정한 철학자들의 방법론을 따르는 듯했다. 박 대표와 사사키는 따로 대담을 가졌다. 박 대표는 언뜻 종교 모독이나 반종교로 비치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섬뜩한 책 제목에 관한 질문으로 대담을 시작했다. 

사사키 아타루(오른쪽)와 박성준 대표가 26일 오전 길담서원에서 만났다. 사사키의 헌팅 캡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형처럼 친하게 지내던 래퍼가 “헌팅 캡을 쓴 유일한 래퍼가 최근 은퇴해 공백이 생겼으니 네가 헌팅 캡의 전통을 이어받으라”고 강권했다고 한다. 사사키는 “나는 래퍼가 아닌데요”라고 잠깐 거부하다 결국 쓰고 다니기 시작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 부처·예수·무함마드 등 세상을 변혁하려는 이들이
사후에 남긴 것은 위대한 책


▲ 지식의 자본가들이 내가 모든 것을 알고
남들에 제공한다 여기는 건 정신병리학적인 병


▲ 근거없는 반지성적 경향이 일본과 한국의 평화에
폐를 일으키려 해 우려


박성준 = 제목이 자극적이다. 길담서원에 이 책을 놓았는데 기독교인들은 깜짝 놀라고는 책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어떤 뜻인가.

사사키 = 파울 첼란의 시 구절을 인용했다. 원문을 번역한 걸 낭독해보겠다. (어조를 높이며) ‘잘라라 그 기도하는 손을/ 하늘에서 허공에서/ 눈의 가위로/ 그 손가락을 잘라라 너의 입술의 가위로/ 이렇게 접혀진 것이 숨을 삼키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다.’ 종교적 경멸, 폭력을 담은 건 아니다. 무엇으로 잘라내는가. 바로 ‘눈의 가위’와 ‘당신의 입술’이다. 입맞춤으로 잘라낸다는 것이다. 격정적인 부분이 있다. 간단히 말할 수 있는 폭력이 아니라 한번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격렬함이다. 접혀 있는 것은 책을 뜻한다. 책은 여러 번 접고 재단해서 만든다. 종교는 라틴어로 ‘religio’(렐리기오)다. 부처, 예수, 무함마드가 라틴어를 알 리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했던 일이 종교라는 걸 알 턱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했나. 이 세상의 부정을 끊는 행동이었다. 세상을 더 좋게 변혁하려 한 이들이 살아간 이후에 어떤 것들이 남았나. 위대한 책(성전)이 남았다. 

박성준 = 당신은 책 속에서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체’라고 했다. 한국 사람은 혁명이라고 하면 폭력을 연상한다. 책을 읽는 것, 문학이 어떻게 혁명이 될 수 있나.

사사키 = 폭력혁명은 수없이 많은 혁명 중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근대의 많은 혁명을 살펴보길 바란다. 프랑스혁명의 경우 짧은 기간에 헌법이 바뀌었다. 어떤 혁명이라도 단순한 폭력으로 안 끝나려면 사회의 규율이랄 수 있는 법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 혁명의 유럽적 개념은 기존 교회법을 다시 쓴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2세기 혁명으로 불리는 이때 근대법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루터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성경을 인식하는 방법이라든가 신학을 쓰는 방법의 변혁이 왔다. 혁명은 폭력이 아니다. 폭력혁명은 유럽에서 200년밖에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주장하는 혁명은 과격하지 않고 온건한 것이냐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런 생각을 가진 분들은 폭력의 향락이나 쾌감에 더럽혀져 있는 상태다. 무함마드나 예수, 부처, 루터가 행했던 게 과격하지 않았던 것일까.

박성준 = 한국은 인문학 붐이다. 여러 강의를 듣고 많이 배우지만, 한편으로 지식을 독점한 지배자처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말을 거칠게 할 때 곤혹스럽고 갈등이 느껴지기도 한다. 사사키 선생의 강의는 그런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편안하다. 지식의 자본가가 빈털터리 가난뱅이에게 ‘너희는 모르지’ 하고 가르치는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사사키 = (오래 침묵하며) 어려운 질문이다. ‘너는 왜 그렇게 하느냐’는 ‘왜 그렇게 사사키 아타루냐’라는 질문이기 때문이다(웃음). 자신에 관한 것은 모르는 법이라 답하기 가장 어렵다.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정신의학자 나카이 히사오란 분이 놀랄 만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정신분열증이나 망상을 지루하고 평범한 것이라고 했다. 망상은 ‘오버한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여러분도 ‘돈이 많으면 좋겠다’ ‘잘생긴 사람과 사귀면 좋겠다’ 같은 망상에 빠진 일이 있을 것이다. 나카이 선생이 왜 망상이 지루하고 평범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냐면, 바로 그것이 일종의 권력욕이기 때문이다. 내가 모든 것을 알고 남들에게 뭔가 제공한다고 여기는 것은 정신병리학적인 병이다. 한국, 일본, 프랑스에도 이런 지식인의 유형이 있다. 주로 도심의 돈 많은 부잣집에서 태어나 명문 초·중·고와 대학을 나온 사람이다. 이들의 친구 중엔 꼭 미디어, 정치 쪽 관계자가 끼어 있다. 주변인들이 국가의 주요 지위를 독점한 듯 여기고, 자신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건 병에 걸린 거나 마찬가지다.

박성준 = 내가 책을 읽고 ‘책은 혁명의 씨앗이다. 읽어라. 책 읽기가 혁명이다. 발명에 준하는 이 놀라운 선언의 충격’이라고 썼다. 문학이 혁명이라는 발상은 어떻게 얻었나. 

사사키 = 여러분도, 일본 지식인도 그렇지만, 문학이나 혁명이란 말을 자신의 작은 신장, 작은 몸집에 맞추고 집어넣어 생각하는 듯하다. 넓은 의미의 문학이란 미나 예술을 위한 것도 아니고 쾌락이나 기쁨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니다. 읽고 쓰는 일반적인 것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크도, 흄도, 뉴턴도 그 시대의 문학자로 불렸다. 뉴턴은 자연을 관찰했다. 자연을 읽었다는 말이다. 자연의 법칙을 만들었다. 자연법칙을 썼다는 것이다. 읽는 것, 쓰는 것이 탁월한 사람들이었다. 세계를 읽고 다시 쓰는 게 문학이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박성준 = 다양한 매체들이 발달한 시대에 책을 읽는 것만이 혁명일까. 

사사키 = 무엇을 읽을 것인가, 어떻게 읽을 것인가, 어디에다 쓸 것인가, 무엇으로 쓸 것인가, 무엇을 쓸 것인가 정말 무한한 방법이 탄생할 수 있다.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르장드르는 유엔 관료 신분으로 아프리카에 갔다가, 백인 관료들이 ‘춤추고 노는 게으른 흑인들이 춤을 멈춘다면 산업사회로 들어갈 수 있을 텐데’라고 하는 말을 듣곤 화가 많이 나 사표를 냈다. 르장드르는 우리의 스승이 아프리카인이라고 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춤추고 노래하는 것은 단순한 오락이나 예술이 아니다. 그들의 노래는 말하자면 신화다. 자기들의 법이나 규율을 만들어내는 신화를 스스로 몸에 걸친 것이다. 수천년에 걸쳐 그 신화, 즉 춤과 춤출 때 걸치는 액세서리를 조금씩 바꿔온 것이다. 한 사회를 운영하고 갱신하고 통치하는 데는 다양한 쓰기 방식, 읽기 방식이 가능하다. 그래서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든가, 혁명은 끝났다든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뮤지션 중에 ‘음악이 끝났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옷을 만드는 분 중에 ‘옷이 끝났다’고 할 분은 없다. 뭐가 끝났다고 말하는 이는 문학자밖에 없다. 바보스러운 일이다. 15세기 한반도에서는 위대한 한글이 발명됐다. 혁명적인 일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아직까지 역사가 5000년밖에 안된 문학은 애송이다. 문학은 이제부터다. 



사사키는 두 차례 강연에서 청중과의 질의응답을 진행했다. 

청중 = 현재 종교는 폐쇄적이고 부분적이다. 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사사키 = 종교를 몰랐던 예수, 부처, 무함마드 등이 했던 행위는 정치적 혁명이다. 루터도 마찬가지다. 제가 지금 번역하는 책에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종교라고 생각하는 종교가에게 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적혀 있다. 종교를 좋아하면 마틴 루터 킹 같은 그런 행동을 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마틴 루터 킹이 자신의 종교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정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분연히 일어섰을 뿐이다.

청중 = 책과 혁명을 이야기했는데 어떤 변혁된 세계를 그리고 있나.

사사키 = 그런 생각은 망상으로 이어질 때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굳이 말하면, 사사키 아타루라는 인간이 쓴 것이 필요 없어지는 세계면 좋겠다. 제 사고방식은 흔한 사고방식이고, 제가 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는 미래가 바람직하다.

청중 =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사사키 = 지금도 은폐되고 있을 뿐이지 전 세계에서 원전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방사능을 실은 배가 한국과 일본의 바다를 오간다. 원전 사고가 일본 민족만의 비극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보다 바람직한 세계로 변화하기 위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의 공통 과제다. 근거가 없어진다면 새로운 근거를 만들면 된다. 

사사키는 여러 차례 니체, 푸코 등 철학자의 사상을 인용하며 “혁명은 근거와 토대를 다시 세우는 것”이라고도 했다. “대지가 다 파괴되었다면 그 위에 새롭게 생을 영위할 수 있는 대지를 만들어야 한다.” 예수, 부처, 무함마드도 바로 성전이라는 텍스트, 근거를 만들어낸 혁명가였다. 세잔, 고흐 같은 예술가도 시대와 시대를 구분하는 근거를 마련한 위대한 사람들이었다. 

사사키는 원전 사고 이후 일부 일본인들이 미신이나 음모론 같은 근거 없는 반지성주의에 빠져들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아베 등 ‘이상한 정치인’을 언급하면서 “근거 없는 반지성주의 현상이 일본 열도와 한반도의 평화에 폐를 일으키는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사사키는 한국의 과거와 현재를 자주 이야기했다. 그는 원전 반대 집회뿐만 아니라 재일 한국인 차별 반대 집회에도 나갔다. ‘어리석은 극우 남성’으로부터 “조센징아,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는 웃으며 “명예로운 일이죠”라고 응대했다고 한다.

‘양심적 일본 지식인’으로 분류되는 사사키는 일본 최북단 아오모리, 옛날 스가루라고 불리던 지역에서 태어났다. 일본 중앙정권으로 이어진 야마토 정권에 마지막으로 저항한, 사사키가 ‘야만족’이라고 표현한 에조 민족이 살던 곳이다. 그는 강연 때마다 “일본열도의 변경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서, ‘야만족’ 출신이라고 해서 부끄러움을 면하고, 말할 자격이 주어지는 건 아니겠지만 감히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다”며 “한·일 공통의 우정의 오리진(기원)을 만드는 게 과연 불가능한 것인가요. 그것은 잘못된 생각일까요”라고 한국 청중에게 되물었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2281918095&code=9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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