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통음식인 떡볶이는 귀한 음식이었다. 오죽 귀한 음식이면 궁중떡볶이라고 불렸을까. 지금이야 떡볶이가 길거리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는 음식이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엄명으로 4대악 중에 하나인 불량식품의 대명사가 되었다.
귀한 음식이었던 떡볶이가 흔하디흔한 음식으로 전락하게 된 것은 밀가루 수입과 깊은 연관이 있다. 떡볶이는 전통 조리방식에 따르면 쌀로 만든 떡과 소고기에 간장양념으로 만든 음식이다. 쌀과 소고기는 예로부터 귀한 음식재료였고 명절과 양반집 제삿날에만 구경할 수 있는 음식이다.
현대 떡볶이에서 떡은 밀가루로 대체됐고 소고기는 오뎅(난 어묵보다 오뎅이 더 맞는 표현이라 생각한다. 외래어로 정착됐다고 보기 때문이다.)으로, 간장 양념대신 빨간 고추장 양념으로 바뀌어 배고픈 서민과 어린 학생들을 유혹하는 음식으로 변화했고 한때 농림축산식품부에서는 한식 세계화라는 거창한 프로젝트를 내세우며 떡볶이를 한식 세계화의 첨병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밀가루로 만든 떡볶이의 시대가 가고 이제는 쌀로 만든 떡볶이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가끔 옛 추억을 되살리는 복고 마케팅으로 밀가루 떡볶이를 파는 곳도 있다.
명절과 제사에서만 볼 수 있었던 떡이 어느 순간에는 지하철 역사 가판대에서도 흔하게 팔리기 시작했고 박정희가 쌀 부족을 염려해 금지시켰던 쌀 막걸리가 이제는 막걸리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 거기에다 한때 유행했던 쌀로별이라는 쌀로 만든 과자까지.
한국 쌀 개방의 역사
대한민국의 벼농사 기술이 발달해 쌀이 남아돌아 떡과 막걸리에 과자까지 만들게 됐을까? 1992년 한국은 우루과이 라운드(UR)라는 듣도 보도 못한 무역협상에 봉착하게 되면서 농산물 전면 개방이라는 시련을 겪게 된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대통령직을 걸고서라도 쌀 개방만큼은 막겠다고 농민들에게 큰소리쳤지만 결국 협상 결과 흰소리가 됐고 김영삼은 임기를 채웠다.
1994년 우루과이 라운드에서 한국은 개도국 지위를 얻었으며 쌀 이외 농산물에 대해서는 관세화, 즉 시장을 개방하게 되어 그 비싼 바나나를 싸게 먹게 됐으며 오륀지가 범람하고 농업은 본격적인 하락세를 걷게 된다.
당시 UR 협상에 대한 평가는 외국 언론보도가 가장 정확하게 했다. 외국 언론에서는 ‘한국이 UR 협상에서 가장 실패한 나라 중의 하나’라고 보도했다. 당시 공무원들은 협상장에서 영어가 되지 않았고 엄청나게 많은 협상 용어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협상을 했으니 제대로 된 협상을 할 리가 없었다.
관세화라는 말은 예전에는 아예 농산물이 국내로 수입될 수 없었지만(국내법으로 금지) UR 협상 이후 쌀을 제외한 모든 농산물은 관세만 내면 수입할 수 있게 된 걸 말하며 정확한 표현은 수입개방이다.
쌀은 관세화 유예, 즉 수입개방을 10년 뒤에 하는 대신 의무적으로 쌀을 일정량 수입하는 단서조항을 달게 된다. 이에 김영삼 정부는 쌀 개방을 막았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최소시장접근물량(MMA)이 국내로 수입됐기 때문에 대통령직을 사퇴했어야 한다.
그나마 김영삼 정부는 최소시장접근물량으로 수입되는 쌀을 밥상용이 아닌 가공용으로 돌리는 조치를 해서 시장격리를 하게 된다. 쉽게 말하면 수입된 쌀은 모두 떡, 막걸리 등의 가공용으로만 사용하게 했다.
저가의 가공용 쌀이 국내에 들어오자 이를 소화하기 위해 쌀 막걸리가 나왔고 쌀 과자가 판매되기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지하철이나 시장 통에서도 한 팩에 천 원 하는 떡이 판매됐다. 농산물 개방이 우리의 밥상, 식문화는 별 상관없어 보이지만 보이지 않게 작용되고 있거나 실제로 많은 걸 바꾸고 있다.
또다시 무늬만 쌀 개방 유예
UR 협상 이후 유예받은 10년이 된 2004년 한국은 쌀 관세화 유예에 대한 재협상이 진행되면서 다시 쌀 관세화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이 벌어진 이유는 당시 농림부가 쌀개방 유예에 대한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농림부는 UR 협상에서 받은 쌀 관세화 유예는 10년이기 때문에 유예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협상을 하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관세화 유예 조치가 끝나고 관세화, 즉 개방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진보적 농업학자들과 농민단체들은 UR 이후 새롭게 진행된 DDA(도하 Doha 협상)이 끝나야 한국의 쌀 관세화 유예에 대한 재협상이 성립된다고 주장했다.
DDA(Doha Development Agenda)협상은 2001년 11월 14일 카타르 도하 각료회의에서 합의된 세계무역기구(WTO) 제4차 다자간 무역협상이다. 1995년 1월 WTO가 출범한 뒤, 1998년 5월 제네바 각료회의에서 무역자유화를 위한 뉴라운드를 출범시키기로 합의하고, 이듬해 12월 시애틀 3차 각료회의를 거쳐 2001년 11월에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서 열린 제4차 각료회의에서 합의된 다자간 무역협상이다.
이 DDA 협상은 1999년 미국에서 시애틀 투쟁이 벌어지면서 주춤하다가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한국의 농민 이경해 열사가 자결하면서 반대투쟁이 거세졌다. DDA는 미국의 수출보조금과 EU의 높은 관세에 대한 논란에다가 브라질, 인도 등 신흥 농산물 수출국가가 서로 의견을 달리하면서 현재는 지리멸렬한 상태이다.
만약 2004년 정부가 재협상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쌀 관세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2004년 재협상에서는 다시 10년간 개방을 유예하는 대신 1988~1990년의 쌀 소비량 평균의 8%까지 최소시장접근물량(MMA)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며, 관세화가 되더라도 8%는 저율관세(TRQ)인 5%로 영구적으로 반입하기로 합의했고 여기에다가 가공용 쌀이 아닌 시판용 밥쌀까지 수입하기로 했다.
시판용 밥쌀은 우리가 흔히 먹는 자포니카 계열의 쌀로, 미국의 칼로스 쌀과 중국 동북3성에서 재배되는 쌀이 가공용이 아니라 밥을 해먹을 수 있게 들어온다는 것이다.
2005년 한국에는 1984년 북한이 원조해준 쌀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밥쌀이 들어오게 됐다. 물론 미국 PX를 통해 강남의 부자들은 90년대 이미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생산된 맛 좋기로 유명한 칼로스쌀을 먹기는 했지만 엄연한 불법이었다. 그래도 잡혀간 사람은 없다.
2005년 2만3천 톤의 밥쌀이 수입돼 매년 늘어나 2014년에는 12만3천 톤을 수입해야 한다. 올해도 12만3천 톤의 쌀이 들어왔다. 농협경제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수입된 밥쌀은 식당과 단체급식업체에 69%가 팔리고 17%가 김밥과 떡으로 판매된다고 한다. 수입쌀을 사고 싶으면 X마켓, XX번지에 가서 수입쌀만 쳐보면 된다. 미국산 칼로스쌀이 20Kg에 3만 원대에 팔리고 있다. (한국 쌀은 20Kg에 5,6만원대)
2000년 초반에 한국에는 아주 유명한 음식점 브랜드가 만들어진다. 바로 김밥X국이다. 이를 시작으로 한국에는 어디를 가나 김밥집이 들어서 있다. 그 이유는 명확한 인관관계는 없지만 수입산 밥쌀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특히나 중국이 WTO에 가입하고 나서 한국에 엄청난 농산물 개방 압력을 넣었고 그 대표적인 사례가 한중마늘파동이다. WTO에 가입 전에는 중국은 한국에 농산물을 수출할 수 없었지만 중국이 WTO에 가입하면서 엄청난 농산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때 땅을 치고 후회한 사람들이 농림부 관계자들이다. UR협상을 워낙 미숙하게 해서 온갖 틈새를 만들어 농산물이 수입됐다. 마늘은 의무수입물량이 아니면 300~400% 이상의 높은 관세를 내야 하기에 관세+운송비+마진을 합치면 국내가격과 비슷해져 수입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깐마늘은 가공품으로 분류돼서 고율 관세를 내지 않고 들어오기 때문에 중국산 마늘이 엄청나게 수입이 돼 마늘가격이 폭락하자 2003년 결국 한국 정부는 세이프가드(SG)를 발동하게 된다.
중국은 당연히 WTO에 제소를 하게 되고 중국과 협상에 들어간 한국은 삼성의 핸드폰과 한국의 마늘을 맞바꿨다는 비판을 받는 협상결과를 가지고 한국에 온다. 당시 과일류 수입에 대한 이면합의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마늘만 그랬을까? 고추는 냉동고추로, 쌀은 찐쌀로 들어오게 된다. 이 찐쌀은 김밥집으로 유입되고 우리는 한 줄에 천 원 하는 김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 중국이 없으면 한국은 굶어죽는다는 말이 점점 현실화 돼 가고 있다. <2부에서 계속>
출처 http://www.redian.org/archive/60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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