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문명의 변천사는 인간의 인지능력 확장의 역사다. 칼에서 붓으로, 다시 키보드로 도구가 바뀌는 것은 결국 저장하고 전달해야 할 정보의 양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바일 기기나 유비쿼터스 IT환경이 지배하는 키보드의 ‘치기’ 이후 또 다른 도구의 발명이 가져올 문자문명이 궁금해진다.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이하 다라니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다. 물론 그 판하본(版下本)은 사람이 직접 붓으로 쓴 것이지만 쓴 것을 토대로 찍어냈다는 점에서 이미 우리 시대 키보드의 치기와 맥락을 같이한다. 그 결과 일일이 불경을 필사하던 것과 달리 정보전달의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또 인쇄술이 없을 때의 필사한 책마다 다른 글자가 아니라 표준화된 글자로 복제된다는 점에서 지금의 문자 치기와 다르지 않다. 다만 지금의 기계 자판은 표준글자를 개인이 다시 소유하는 시대가 된 것이 다르다.
그런데 이런 우격다짐이나 흠집 내기를 넘어 다라니경의 명성에 의구심이 들게 하는 일이 2005년 일어났다. 다라니경을 석가탑 안에 넣었다고 기록한 1024년(고려 현종 15년)의 중수기문이 사계 전문가들에 의해 판독된 것이다. 1966년에 발견된 이후 40여년 만이다. 결락된 글자나 종이가 찢겨져 나간 부분을 감안해서 해당 기사 부분을 보자. “대금도 한 묶음과 구리에 도금한 ○, ○칼 한 묶음, 무구정광다라니경…, 금으로 만든 병 하나, 수금대 하나, 사리 8○, 수금도 한 묶음, 두루마리로 된 무구정광다라니경 한 권, 수금대 하나 등을 이 탑에 안치하옵니다.(○○矣臺錦刀冬音一銅鍍金○...○刀冬音一无垢淨光○羅尼[經]九偏全金甁一隨[錦]一舍利八○..○金○一隨錦刀冬音一无垢淨光○羅尼經一卷隨[錦]一右之安藏爲白置...)” 요컨대 1024년 석가탑 중수 때 여러 부장품과 함께 다라니경을 안치하였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다라니경이 통일신라 때가 아니라 고려시대에 만들어져 탑 속에 넣었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구심은 탑을 창건할 때 넣었던 다라니경을 고려 때 보수하면서 도로 집어넣었다는 사실을 적은 것으로 보면 어느 정도 풀린다. 더구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신라 때 탑에서만 발견되며 고려로 넘어오면 ‘보협인다라니경’으로 완전히 대체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은 이를 뒷받침한다. 실제 다라니경이 발굴된 신라 탑은 10여기에 이르지만 고려 탑에서는 발굴된 예가 없다. 또 1007년 간행된 보협인다라니경은 정교한 인쇄기술로 제작된 반면 다라니경은 초보 수준이다. 인쇄기술로 봐도 다라니경이 보협인다라니경보다 나중에 제작됐을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관련 학계에서 등한시하는 부분은 글자의 제작연대를 판정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글자 자체의 구조나 서풍이다. 글자는 내용은 물론 같은 서체 안에서도 점과 획, 글자의 짜임새로 결정되는 조형미감에서 시대 및 지역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다라니경의 서체 조형이나 글자구조는 이미 당나라 해서가 통일신라에 들어와 소화된 지 길게는 100여년이 지난 지점이다. 그래서 글자의 기본 골격은 응당 전형적이면서도 8세기 중반 당시 중국에서 유행한 글씨미감과는 차이가 난다. 다라니경은 안진경체도 아니고 초당 때 유행한 구양순체도 아니다. 사경이라서 북위서와 비교할 수도 있지만 이미 시기적으로 한참 후다. 고졸, 한가하면서도 강철같이 강한 고신라 글씨의 미감이 진하게 배어 있는 필획이다. 해서의 전형 속에서도 다양한 변화의 비정형 구조를 띠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다라니경은 중국글씨와 맛이 다르다. 굳이 명명한다면 해동서성 ‘김생체’라 하듯 그냥 ‘무구정광대다라니경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바야흐로 지금 우리는 디지털시대 키보드 치기의 한가운데를 살면서 점점 더 기계문자의 기성품 ‘치기’에 함몰되고 있다. 사람마다 다르고 시대, 지역마다 다른 ‘쓰기’라는 글씨미학에서 더욱 문맹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세계 IT문명을 주도하는 우리가 1300여년 전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앞에 놓고 오늘날 디지털 문자문명의 씨앗과 뿌리가 어디이고 기계 글자에 인간의 체온을 담은 글씨미학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절실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2212045025&code=96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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