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28일 월요일

후쿠시마 사태와 일본사회--동질사회와 관료체제, 그리고 낙하산인사

지난 3월 11일. 이 날은 여러 모로 기억에 남을 만한 날인 듯싶다.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난 날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정기용 선생의 부음을 듣고 마음 깊이 슬픔이 밀려옴을 느꼈던 날이기도 하다. 아무튼 두 주일 가량 일본의 대지진과 정기용 선생과 관련된 일이 내 머리와 몸을 무겁게 하였다.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이 두 가지 사안이 내 마음 한 구석에서 조우하는 지점이 있었다. 그것을 무어라고 할수 있을까. 오늘 아주 작은 에세이 한 편을 잃고 '그런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그 에세이의 제목은 'The good and bad of Japan on display'.(2011년 3월 21일) 글쓴이는 클라이드 프레스토비츠라는 사람으로 미국경제전략연구소 소장이라 한다.(1989년 한국에 김석희 씨가 번역한 책 <왜 미국은 일본에 추월당했나>가 나온 바가 있음.) 

클라이드 프레스토비츠 씨는 일본인과 일본사회가 말을 잃을 정도의 비극을 당했음에도 인내와 용기, 양보와 예절을 잃지 않은 점을 칭찬한다. 약탈도 폭동도 없었다. 몇 안 되는 식료품을 구하기 위해 긴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일본인의 모습은 정말이지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난다. 이에 대해 프레스토비츠 씨는 "이것은 극단적으로 동질성(homogeneity)을 존중해 사회적 마찰을 피해 온 일본 사회의 긴 역사의 산물"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곧 이어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대참사에 대한 대응을 지켜보면서, 도대체 일본사회가 이러한 위기상황을 대처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럴 만도 하다. 보도에 따르면, 후쿠시마 원전 사태에 대해서는 도쿄전력을 물론이고 일본 정부도 초기 대응에 실패한 것으로 보이며, 이 실패에는 분명 위험사회, 리더십, 정보의 유통과 은폐에 관련된 갖가지 생각거리가 포함되어 있다.

이에 대해 클라이드 씨는 "내가 놀란 것은 보다 많은, 보다 중요한 정보의 제공을 요구하는 여론의 압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미디어 중에는 불만과 정보공개를 요구하는 소리가 소용돌이치고 있지만, 적어도 다른 민주국가와 비교하면 본격적인 여론의 고조와 정치적인 압력은 소극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한다.

왜 그런가? 이 부분에서 클라이드 씨의 통찰이 엿보인다. "이것은 동질 사회의 산물이다. 일본에서는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 없는 상태가 될 때까지, 부하가 윗사람에게 사태의 악화를 보고하지 않을 만큼 마찰을 피하는 경향이 강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 구조의 기반이 되고 있는 '낙하산 인사(天下り, amakudari)'  시스템이다. 이 '아마쿠다리' 시스템과 관련하여 클라이드 씨는 3가지를 언급한다.

첫째, "가장 먼저 이해 해야 할 것은 진짜 일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국민이 선택한 정치가가 아니라 관료라는 것. 국회 의원에게는 비서의 수나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이 적어서 강력한 관료 기구를 조사 · 감독하는 권한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으며,  관료는 자신들이 일본을 지킨다고 자부해서 정치가들을 업신여겨 왔다"는 것. 둘째, 도쿄전력의 감독 부처가 전후의 기적적인 경제 부흥을 견인해 온 경제산업성(당시의 통상산업성)이라고 하는 점. 셋째, 일본의 관료는 보통 50~55세에 퇴직하는 데, 공복으로서 그들의 급료는 결코 높지 않지만 각 부처는 다대한 노력을 기울여 자신들이 관할하는 기업이나 업계 단체에 낙하산 인사를 위한 일터를 찾아낸다는 것.

'아마쿠다리' 즉 낙하산 인사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들이 정치가나 국민을 무시하는 것에 익숙하며 질문에 답하는 것보다 명령을 내리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사태를 맞아 일본이 직면한 큰 과제는 이 위기를 지렛대로 해서 일본의 정치와 관료기구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와서 정부와 산업 규제의 투명성을 최대한으로 담보하는 강력한 감시기관을 만들 수 있는가 하는 문제라고 클라이드 씨는 지적한다. 또 하나의 큰 문제는 동질사회 일본의 구성을 어떻게 바꾸어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 한다. 일본은 동질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사회조화를 강조함으로써 이민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해왔다는 것이다.

물론 클라이드 프레스토비츠 씨의 견해를 전적으로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당 부분 나는 그의 견해에 동감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제기한 의제가 일본의 것일 뿐만 아니라 한국의 것이기도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일 양국이 '아마쿠다리' 즉 낙하산 인사의 문제라는 면에서는 너무나 흡사한 사회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번 사태의 이면을 자꾸만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또 하나, 일본의 네티즌 사이에서는 언론과 원자력 산업 사이에 어떤 유착 관계가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사진이 계속 퍼져나가고 있다. 왜 일본의 언론이 원자력 산업의 문제나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물질과 관련된 정보의 진실을 회피하고 있는가를 이 사진은 사태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언론이나 원자력산업을 지배하는 사람들이 사실상 '그 사람이 그 사람'(낙하산인사)이기 때문에 제대로 보도가 되지 않을 뿐더러 일본 시민들이 알아야 할 진실도 은폐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구심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논리에 비약이 있을 것이겠지만, 이런 문제와 정기용 선생님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가. 정기용 선생님이 생애의 말기에 노력해온 부분이 바로 '공공건축의 올바른 프로세스'를 사회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정 선생을 이를 '거버넌스의 건축'이라고 명명했다. 공공건축과 관련해서 우리 사회는 좀더 깊은 관심을 쏟아야 할 시점이 되었다는 정기용 선생은 판단했던 것이다.

공공건축의 입찰 과정을 보면, 담당 공무원들은 감사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일을 진척시킨다. 하지만 그 과정 자체가 '좋은 공공건축'을 생산해내지는 못한다. 또한 공정한 듯이 보이는 입찰 과정 속에서도 끊임없이 '비리'는 생산된다.(얼마나 많은 시장과 군수들이 공공건축과 관련한 비리로 '낙마'했는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하는 고민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시민을 위한 공공건축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여기에는 클라이드 프레스토비츠 씨가 묻고 있는 지점과 분명히 맞닿아 있다. 클라이드 씨는 "이 위기를 지렛대로 해서 일본의 정치와 관료기구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와서 정부와 산업 규제의 투명성을 최대한으로 담보하는 강력한 감시기관을 만들 수 있는가 하는 문제"라고 말했지만, 일본 내에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은 사람이 많지 않을 거라는 데 더욱 문제가 있지 않을까. 왜냐면 그것은 거의 사회의 혁명적인 변화를 요구하는데 일본은 그런 변화를 꺼리는 사회다.  원자력이 안전하다고 앵무새처럼 되뇌이는 언론이 만들어내는 거짓된 신화와 함께, 일본사회는 동질하다고 믿는 거짓된 신화까지 혁명적인 사회변화를 거부하는 기제는 너무나 두껍지 않은가. 또한 과연 감독기관만이 능사일까 하는 생각도 가능하다.  나의 문제의식은 이런 문제가 일본의 것일 뿐 아니라 바로 한국의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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