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억했어야 할 이름들.8 강진국
by인문학콘텐츠연구소 2022년 7월 19일(Jul 19. 2022)
8. 강진국
1945년 해방 이후 우리 민족은 혼란의 나날이었다. 특히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 혼란은 더욱 심각해졌다.
1905년 경남 동래에서 태어난 강진국은 그 혼란의 역사의 한 가운데 있었다. 애초에 법률가를 꿈꾸던 그는 일본 니혼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유학 당시 농촌갱생과 협동조합 운동 등을 접하며 우리 농촌의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이후 조선에 돌아온 그는 '경성부립도서관(현 남산도서관)'에서 일을 했다. 이 당시 그는 '조선도서관연구회(이후 한국도서관협회)'에도 가입하여 이사직을 맡았으며, '농촌문고'에 대한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조국의 농촌에 대한 그의 관심은 계속 이어졌고, 1936년에는 <동아일보>에 '농촌문고 창설의 급무', 이듬해에는 '농촌문고 경영론' 등을 기고하였다.
여기서 강진국이 이야기한 '농촌문고'는 단순한 도서관이 아닌 농사와 생활, 교육과 의료가 병행되는 하나의 통합 인프라였다. 물론 조선총독부에서 이것을 허락할리는 없었기에 강진국은 조선총독부의 농촌과 교육에 대한 정책에 날선 비난을 던지기도 했다. 이로 인해 조선총독부의 눈 밖에 나게 되어 '조선도서관연구회'의 기관지가 폐간 당하고, '조선도서관연구회' 역시 조선총독부의 산하 단체로 전환되었다.
이후 삼척탄광에 머물며 조선총독부의 눈을 피하던 강진국은 조선이 해방되며 다시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된다. 1946년 '조선산업건설협의회'에 참여하였으며, 1947년에는 '조선산업재건협의회'에 참여했고,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되자 '민족자주연맹'에도 관여하였고, '산업경제연구소'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농림부장관이었던 조봉암에게 발탁되어 초대 농지국장이 되는 데, 그의 진짜 업적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강진국은 농지개혁팀을 이끌었는데, 이들은 수 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소작제도'를 철폐하려 했다.
그는 이른바 '암행'을 통해 밤낮없이 농민들을 만나고 다니며 농촌의 실태를 파악하고, 농민이 원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조봉암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신변에 위험이 있어서 신분을 속였습니다. 시골에도 공산분자가 숨어 있어서 정부 농지국장이라고 하면 그냥 놔두지 않을 것 같고, 토지개혁에 반대하는 지주 쪽도 방해할 것 같아 신문기자라고 속였습니다. 농민들에게 당신들의 말을 신문에 싣겠다고 했는데 대꾸조차 안 합니다. 땅을 나눠달라 하면 자칫 빨갱이로 몰리고, 지주에게 미움을 사서 소작을 뺏길지 몰라서입니다. 게다가 악질 지주들이 소작인들에게 '토지개혁은 어렵다. 당신에게는 싸게 팔 테니 어서 사라' 하며 강제로 사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농민들 불쌍합니다. 온종일 죽어라 일하는데 일본 군인들이 입다가 버리고 간 군복을 누더기처럼 기워서 입고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삽니다. 바로 소작으로 착취당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험란한 과정을 거쳐 강진국은 농지 개혁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농민들에게만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시안을 접한 조봉암이 "지주도 살아야 할 것 아니오?"라고 말하면서 농민의 바람과 지주의 입장을 고려하는 절충안을 만든 것이다.
이로써 강진국은 좌에도 우에도 치우치지 않는 농지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49년 4월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이 '농지개혁법'이 통과되었다. 물론 정부 기획처와 국회 본회의를 거치며 일부 수정되긴 했지만 그 사상만은 강진국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민주노동당의 정책위원장이었던 주대환은 이 토지개혁을 "세계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토지 혁명"으로 인정했다.
농민은 소출의 30%를 내며 5년 간 일하면 '자기 땅'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지주에게 지급하는 소작료가 50%에 가까웠기에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가뭄에 단비와 같았다. 지주들 역시 정부에서 채권을 발행해주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하여 이 채권은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래서 더 빠르게 평등한 사회로 나갈 수 있었다.
농지개혁은 수 천년 간 이 땅에서 이루어져 내려온 소작제를 철폐하며 수많은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탈바꿈 시킨 혁명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의 농민들은 희망이란 씨앗을 품게 된 것이다.
<조봉암 평전>에서 이원규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토지 균등성을 빠른 속도로 이룩해냈다. 농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줘 혁명을 포기하게 만들었고 1950년 나라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을 막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 토지소유자가 된 농민들의 저력이 자녀 교육으로 집중됐고 이것은 지금 우리가 누리는 비약적인 경제성장의 동력이 되었다."
실제로 <2003년 세계은행 정책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토지 분배가 평등할수록 장기적인 경제성장률이 높았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 타이완, 한국, 중국, 일본의 경제성장률이 유난히 높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후 1950년, 윤영선이 새로운 농림부 장관에 오르며 강진국도 농지국장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농지개혁팀도 와해되었다. 일부는 월북했고, 일부는 납북 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조봉암의 신당 창당과 함께 정치계에 뛰어들었으나 이승만 정권에 의해 조봉암은 사형 당했고, 강진국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번번히 낙선하며 차츰 사람들에게 잊혀져 갔다. 그리고 그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일제 강점기부터 농촌과 도서관을 사랑하며 조국을 개혁시키려 노력하고, 마침내 소작농 제도를 철폐하는 개혁까지 성공 시켰던 인물의 말로가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출처: https://brunch.co.kr/@275008ff0c9742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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