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시간 어떤 회의에 참석하고 왔습니다. 사무처로 돌아오니 여러 가지 우편물 가운데 수경 스님(삼각산 화계사/ 불경환경연대)께서 보내주신 오체투지 발원문을 사진집으로 만든 작은 책자가 있었습니다.
이 책자에는 짧지만 간절한 글이 두 꼭지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오체투지', 또 하나는 '만사가 기도여야 합니다'입니다. '만사가 기도여야 합니다'를 여러분과 함께 읽고 싶어서 잠시 짬을 내어 타자를 쳐서 옮겨놓습니다.
수경 스님과 문규현 전종훈 신부님, 지관 스님 등이 3월 28일(토요일) 공주 신원사 중악단을 출발하여 6월 15일 묘향산 상악에서 회향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봄 오체투지 순례단이 이 땅의 바닥을 다시 입맞춤하려 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내서 이 오체투지 순례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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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가 '기도'여야 합니다
수경 스님
도반 여러분!
지난 몇년간은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혼돈의 시간이었습니다. 한반도 대운한 논란 속에서 정권이 바뀌었고, 광우병 파동으로 촉발된 촛불집회는 한국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인 듯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소통거부로 인해 좌절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혼돈의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저는 한반도대운하 백지화를 위한 순례를 나섰고, 촛불 이후에는 지리산에서 계룡산까지 오체투지로 이 땅의 품에 안기는 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거창한 명분이나 목표가 아니라,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신 사람으로서 마땅히 가야 할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나 자신을 살피는 일이 절실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땅이 저에게 들려주고 일깨워 준 바가 적지 않습니다. 해서 그것에 대한 소회를 조금 밝혀 보고자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곳을 이를 때 '땅바닥'이라는 말을 가져다 씁니다.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졌다'느니 하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땅바닥을 기어 보니 생명과 세계의실상이 뚜렷해지더군요. 범과 성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고, 유정과 무정의 경계 또한 본래 없는 것이었습니다. '지렁이'와 '사람'이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을 해 왔지만 사실은 이성적 사리 분별의 소산이었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지렁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나와 지렁이의 경계는 무의미했습니다. 땅바닥이라는 무정이 일체 유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정물'에도 불성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돌멩이 하나에도 불성이 깃들어 있다' 하셨습니다. 생명 없는 것들에서 '생명'의 가치를 발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위대한 통찰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아주 평범하고 쉬운 가르침입니다. 화두 타파하듯이 깨쳐 알아야 할 일도 아니고, 선방에서 몇 안거를 해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보십시오. 엄동에 우리는 지켜주는 것은 차디찬 콘크리트 더미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어떤 난방 시설도 소용이 없습니다. 생명 없는 것이 생명을 지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생명 아닌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실상입니다. '주'와 '객'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뜻대로 함부로 다루어도 되는 것이나 마음대로 파헤쳐도 좋을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산과 강을 멋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땅을 기면서 나는, 한 생명체로서 나의 생각과 행위가 '기도'로 귀결돼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기도는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바, 배운 바를 지켜나가는 길이자 자신의 행위를 생명의 실상에 계합시키는 일입니다. 불자라면 모름지기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기도가 되게 해야 합니다. 사회적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 것도, 자연을 보살피고 지켜나가는 것도 기도입니다. 생명의 실상에 비추어 왜곡된 현상을 원상으로 되돌려 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도반 여러분.
환경운동의 말석에서 작으나마 구실을 하면서 자주 듣게 되는 소리가 '인간중심주의'입니다. '인간'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옳은 말입니다. 자연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 그 자체가 문제이지요. 그런데 우리에게 더 큰 문제는 죽는 날까지 인간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환경운동을 포함한 불교의 사회적 실천이 좀 더 인간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결코 역설적인 얘기가 아닙니다. 인간을 둘러싼 1차적인 환경은 인간입니다. 당장 우리의 근현대사를 보십시오. 이승만 정부에서 현재의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집권 세력의 성격에 따라서 삶의 환경은 달랐습니다. 심각한 왜곡이 거듭됐고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는 상황에 부딪치면 대중이 떨치고 일어났습니다. 대중의 저항과 희생으로 이 정도로나마 세상을 지켜온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의 질서'를 되찾는 일이었습니다. 불교의 사회적 실천이 지향해야 할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불교의 모든 사회적 실천은 '기도'여야 한고 '신행'이어야 합니다. 삶과 믿음이 분리될 수 없듯이, 불교의 사회적 실천과 신행은 불리될 수 없습니다. 육바라밀이어야 하고, 팔정도여야 합니다. 사람살이를 생명의 질서에 계합시키는 일이어야 합니다.
가령 우리가 물을 아껴 쓴다고 할 때, 그것은 나보다 더 물이 필요한 사람을 위한 '보시'일 수 있습니다. 자연 속에서 내 멋대로 하지 않는 것이 '인욕'이고 한반도대운하 같은 거대한 파괴의 구상을 묵과하지 않은 것은 '지계'입니다. 함부로 허물지 않는 것이 '정진'이고, 자연과 사람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진정 행복을 느낄 줄 아는 것이 '선정'입니다. 당장 편하자고 미래의 자원을 고갈시키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개인 차원의 신행이든 사회적 실천이든 불자로서 추구하는 가치와 행위는 기도여야 하고 귀의여야 합니다. 제불보살을 염하는 일이고 부처님처럼 살겠다는 다짐이어야 합니다.
미국의 금융파탄으로 야기된 세계경제의 위기가 우리의 실물 경제에도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서민들은 그 어느 때보다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기 위한 외투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기득권층과 집권 세력은 경기회복을 구실로 무분별한 대형 개발 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과거의 경험으로 보듯이 개발 이득은 '빈부 양극화'의 간격을 더 벌려 놓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거리에 넘치는 노숙자들을 못 본 척 하는 것으로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볼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나눔'이라는 말도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모자랍니다. '같이 쓴다'는 태도가 자비입니다.
거듭 말씀드리건대 불자로서 모든 행위는 수행과 기도, 귀의와 염불이어야 합니다. 현실의 모순을 바로잡고, 인간관계의 건강성을 회복시키고,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보살행이어야 합니다.
다시 오체투지의 길을 떠나면서
화계사 주지 수경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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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찬수 마르코 입력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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