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9일(월요일) 오늘 서천에 다녀왔습니다. 서천의 도서관문화 조성에 대한 정책 제안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서천군의 도서관문화에 대해서는 어느 기회엔가 말씀 드릴 때가 있겠죠.) 새벽부터 서천으로 향할 때 손에 들고 간 책이 <일본의 재구성>이라는 책입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트리뷴의 아시아판 편집을 담당했다는 패트릭 스미스 씨가 쓴 책입니다. 휴게소에서 차를 한잔 마시면서, 이 책의 한대목을 오늘 서천 일정을 함께한 어희재 연구위원에게 읽어주었습니다. '일본인되기'라는 장에서 "교육 열풍이 만들어낸 시험 지옥"을 말하는 대목입니다.
"시험 지옥과 함께 여러 가지 특이한 현상도 생겨났다. 일본에는 자식의 성공에 집착하는 '교육엄마'가 존재한다. 그리고 로닌(낭인: 원래는 섬길 주인이 없어 떠도는 무사를 일컬음)이라 불리는 수만 명의 재수생이 대입시험을 실패하고 다음 기회를 노린다.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일단 대학교에 붙으면 학생은 대학에 다니는 동안 거의 공부하지 않는다. 대학에서 무엇을 성취하느냐와 관계없이 사회에 나갔을 때 할 일이 정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졸업 후 입사하면 기업이 이들을 사회인으로 완성시켜준다. 대학생활은 학문을 배우는 기간이 아니라 시험 지옥에서 살아남은 것에 대한 보상 내지는 자유를 맛볼 마지막 기회로 간주된다. 주쿠(숙)라 불리는 입시준비 학원도 희한하다. 졸업장을 주는 정식 학교와 나란히 공존하되 정식 학교만큼이나 중요하다. 초중학교 학생의 70퍼센트가 입식학원에 다니고 개인과외를 받는 고등학생은 80퍼센트에 이른다. 주쿠는 일본에서 수지맞는 사업이다. 수업료가 1년에 수천 달러에 달한다. 일본은 교육 예산이 낮다고 칭찬받는 나라로 선진국 중에서 최저 수준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교육에 엄청나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균적인 가정에서 교육비가 수입의 25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대학교육 이전에 들어가는 비용의 반 이상이 입시학원비와 기타 관련 비용으로 지출된다."
이 인용 대목에서 몇 가지 수치, 그리고 로닌이라는 일본식 표현을 제외한다면, 도대체 한국과 일본은 어느 만큼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특히 교육과 관련해서 거의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한국의 재구성>이라고 생각하며 읽게 됩니다.
집에 돌아와 몇 군데 검색을 하다가, '한겨레21'(09.03.05, 제750호)이 커버이야기로 학원-사교육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연 학원-사교육 없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 수 있을까요? 그런 꿈이 가능할까요?
*그림출처: www.hankyung.com/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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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4466.html
학원 없이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 [2009.03.06 제750호] | |||||||||||||
선행학습·과도한 숙제·공포 자극, 허구적 욕망을 부풀리는 학원의 기술…
사교육 경쟁은 ‘죄수의 딜레마’다.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승자도 없는 ‘옆집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둘 다 안 하는 게 좋을 테지만, ‘내가 더 하자’는 생각으로 각자 달리면 엉뚱하게도 학원들만 돈을 번다. 대한민국 한 가구 사교육비 지출액은 10여년 만에 3배 이상 늘었다. 1997년, 가구당 사교육비 지출은 8만원에서 2008년 21만원으로 훌쩍 뛰었다. 때문에 가계 지갑은 나날이 얇아지고, 가족들의 삶의 질은 더 척박해지고 있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이면 학원을 둘러싼 부모들의 고민은 복잡해진다. ‘영어학원은 어디로 보낼까’ ‘수학은 학원으로 보낼까, 과외를 시킬까’ ‘학원은 몇 군데나 보낼까’ ‘얼마짜리 학원에 보낼까’.
고민을 바꿔보자. 학교에서 8시간, 학원에서 6시간, 다시 집에서 과외 2시간으로 하루를 지새우는 내 아이는 과연 행복할까. 학원에서 대량으로 일러주는 지식만을 풀어내는 데 바쁜 아이들은 정말 학습 능력이 향상되는 걸까. 아이의 행복한 삶과 아이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학습 능력의 증진을 동시에 고민하며 ‘학원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한 부모와 아이들이 있다. 이들은 더 많은 학부모들의 참여로 ‘죄수의 딜레마’를 끝장내길 원한다. 편집자
가구 월평균 소득이 580여만원인 이아무개(38·서울 서초구 방배동)씨. 그의 둘째딸은 한 달에 130만원 하는 영어유치원에 다닌다. 큰아들 영어학원비에도 20여만원을 쓴다. 검도·피아노 등 취미 관련 학원까지 더하면 두 아이의 사교육 비용으로 월 200여만원이 들어간다. 가구소득의 34%가 아이들 사교육비다. 어디 이씨만의 일일까.
‘명문 학원’일수록 숙제가 많다
20조9천억원. 지난 한 해 한국의 학부모들이 사교육에 쏟아부은 돈이다. 2월27일 통계청이 발표한 ‘사교육비 실태조사’를 보면, 사교육비는 지난해보다 4.3% 늘어났다. 지난해 4/4분기 전국 가구 실질소득은 2007년 대비 2.1% 감소했다. 소득은 줄었는데도 사교육 시장은 여전히 호황이다.
부모들은 왜 사교육을 할까? 통계청 자료를 보면, 학부모들은 사교육을 시키는 원인으로 선행학습(59.9%)과 학교 수업 보충(52.3%)을 가장 많이 꼽았다. 그 밖에도 불안 심리(33.1%), 진학 준비(32%) 등이 사교육의 이유였다. 맞벌이 등으로 어쩔 수 없이 아이를 학원에 맡겨야 하는 경우, 즉 보육 목적은 3%에 불과했다. 결국 내 아이가 ‘더 좋은 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남보다 더 실력을 갖추게 하고 싶다는 ‘욕망’이 사교육 시장의 자양분이다.
학원들은 진작에 이 사실을 알아차렸다. 한국 사교육 시장의 ‘수요’는 실제적인 학습 능력의 향상 여부가 아니라 부모들의 허구적 욕망의 크기에 비례한다. 학원은 아이들의 실력을 높이는 방법보다 부모의 욕망에 호소하는 기법을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학원이 아이와 그 부모를 속이고 있다는 뜻이다.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을 둔 금아무개(41)씨는 이른바 ‘잘나가는 학원’으로 통하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 ㅈ학원에 아이를 보냈다가 혀를 내둘렀다. 특목고 대비 학원인 ㅈ학원은 영어 교육을 잘하는 곳으로 소문이 나 있다. 그런데 밤을 지새우며 학원 숙제에 매달려도 아이는 그걸 끝내지 못했다. 어려운 것은 둘째 치고 숙제 분량이 ‘가공할’ 수준이었다. 금씨는 “우리 아이가 머리가 뛰어난 건 아니지만 불성실한 편은 아닌데, 정말 밤을 꼬박 새워도 감당하지 못할 분량과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아이를 혹사시키는 것 같아 학원을 그만두게 했지만, 학원에서 계속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님, 그걸 견뎌야 합니다.”
부모의 공포를 자극하는 것은 학원 수요를 창출하는 핵심 고리다. 어린이영어 전문학원에서 10년간 강사 생활을 하다 업계를 떠난 김채현(42)씨는 “그게 ㅈ학원을 비롯한 학원들의 수법”이라고 말했다. 많은 숙제를 떠맡겨 아이들이 계속 책상 앞에 앉아 있도록만 하면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만족하기 때문에 이른바 ‘명문 학원’일수록 더 많은 숙제를 내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학습 능력이 향상될까? 내 아이는 공부를 더 잘하게 되는 걸까?
‘선행학습-많은 과제-잦은 시험’의 6시간
김씨는 “부모들의 생각과 달리 과도한 숙제는 아이들의 실력 향상과 반비례한다”고 말했다. 숙제가 많을수록 그리고 어려울수록 아이는 부모에게 도움을 청한다. ‘밤새워가며’ 공부한다 해도 대부분은 부모의 조언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밤새우는 일 자체가 자발적이지도 않다. 결국 스스로 공부하는 능력은 퇴화한다. ‘자기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에게 학원 숙제는 다시 압박이 되고, 이젠 숙제를 위해 또 다른 사교육이 등장한다. 김씨는 “숙제 등 학원 커리큘럼을 따라가기 위해 다시 과외 강사를 붙이는 경우도 많다”며 “사교육이 사교육을 낳으며 서로 시장을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선행학습도 마찬가지다. 수학으로 유명한 학원체인인 ㅍ학원은 수강생들에게 적어도 1년 이상의 교과과정을 먼저 공부하게 한다. 아이들을 ‘타임머신’에 태워 1년 뒤로 보내는 것도 학원의 상술이다. 서울 양천구 목동에서 ㅎ학원을 운영하는 김대성 원장은 “학원은 ‘복습’으로는 장사가 안 되는 곳”이라고 말했다. “부모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초등학생에게는 중1 과정을, 중학생에게는 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치며 아이를 항상 발빠르게 공부시킨다는 인상을 줘야 하거든요. 그걸 ‘선행(학습)’이라고 부르죠.”
그러나 이런 종류의 선행학습도 아이들의 실력 향상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공부의 갈래를 놓치기 십상이다. 김대성 원장은 “수학은 정말 특출난 아이들이 아니면 미리 공부하는 선행보다 자기가 하고 있는 과정을 심화해 이해시키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는 “학원들이 서로 과당 경쟁하느라 선행학습 커리큘럼 위주로 운영하면서, 아이들은 학교 수업 따라가랴, 학원 수업 따라가랴 바쁜 와중에 정작 아무것도 제대로 하는 게 없게 된다”고 강조했다.
대부분의 학원은 ‘3시간 수업-3시간 자습’ 시스템으로 학교 일과를 재탕하며 아이들을 묶어둔다. 6시간을 채우는 것은 ‘선행학습-많은 과제-잦은 시험’의 교육과정이다. 아이들은 학원 수업을 따라잡기 위해 주말엔 학원 수업 보충용 과외를 곁들인다. 스스로 생각하고 공부할 수 있는 시간들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아이들은 그저 문제 푸는 기계가 되기 십상이다.
사교육은 학생들의 자기주도적인 학습능력을 망친다. 성인의 평생교육과 관련해 이야기되던 ‘자기주도적 학습 능력’ 개념은 1980년대 중반에 국내에도 도입됐다. 이는 스스로 자기 시간을 관리·평가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으로, 삶을 운영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성기선 가톨릭대 교육대학원 교수(교육사회학)는 “2003년 대학생 2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사교육을 많이 받은 학생일수록 의존적이고 시키는 것만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소개했다. 양명희씨의 서울대 교육학과 박사논문에서도 자기조절 학습 능력이 있는 아이가 지능이 높은 아이보다 성적이 더 높다는 결론이 나왔다.
신을진 한국사이버대 상담학부 교수(교육상담)는 “서울대에서 학생 상담을 할 때 ‘시험은 정말 잘 보는데 스스로 공부를 못하겠다’며 시험 불안과 우울을 토로하는 학생들이 많았다”며 “어린 시절에는 당장 떠먹여주는 학습 방법이 성적으로 연결되기도 하지만, 점차 학년이 올라가면서 공부의 분량이 많아지고 수준이 높아지면 스스로 헤쳐나갈 능력을 기르지 못한 아이들은 좌절하거나 불안증을 호소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만큼 스스로 공부하는 ‘자기주도 학습 능력’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학원만 갔다 오면 울었던 아이
그래서 학원에 보내지 않는 것은 단순히 사교육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학습’을 시키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학원의 악순환 고리를 끊으려 ‘학원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다. 안혜용(43·서울 종로구 명륜동)씨도 그 가운데 하나다. 안씨 역시 원래는 11살짜리 딸을 영어 프랜차이즈 학원에 보냈었다. 영화를 보면서 영어 공부를 재미있게 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달랐다. 학원은 매일 받아쓰기 시험과 단어 시험을 쳤다. 아이 수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렵고 빠른 일반 영어 애니메이션 등을 틀어줬다. 영화에 나오는 단어는 아이가 이해할 만한 수준보다 훨씬 높았다. 하나도 들리지 않는 영어를 들으며 시험만 치니 딸의 스트레스만 커졌다. 아이는 학원만 갔다 오면 울었다.
안씨는 “처음엔 옆집 엄마 말에 혹해서 아이를 보냈다가 괜히 아이에게 스트레스만 줬다”며 “아이가 스트레스 받지 않고 행복하게 공부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게 필요할 것 같아 학원을 안 보내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학원 안 가기’를 한 달째 실험 중인 안씨는 우선 아이와 충분한 대화를 통해 학원 대신 할 공부를 찾았다. 1년 전에 사두고 안 쓰던 영어책과 테이프를 일주일에 하나씩 반복해서 듣는다. 주말에는 엄마가 낸 시험을 본다. 안씨는 “학원이 일방적으로 정한 프로그램이나 내용이 아니라 아이와 이야기하면서 같이 정한 것이기 때문에 비교적 거부감 없이 따라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학원 안 가는 삶’이 전업주부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공부시키는 것은 둘째 치고 우선 아이를 맡겨둘 곳이 간절한 맞벌이 부부에게도 ‘학원-프리’는 가능하다. 김관순(43)씨 부부는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함께 김밥가게를 운영한다. 부부는 오전 10시부터 저녁 8~9시까지 꼬박 가게에 묶여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학원에 가지 않는다. “생각하는 능력을 빼앗는 학원에 아이들을 보내기 싫어서” 아이들과 의논한 뒤 학원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
대신 세 아이는 매일 규칙적으로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한다. 올해 중학교 2학년이 되는 맏딸은 하루 정해둔 분량의 수학 문제지를 풀고, 영어 읽기 사이트에서 영어를 듣고 읽는다. 나머지 시간엔 주로 책을 읽는다. 초등학교 5학년과 3학년이 되는 두 동생도 언니와 비슷한 방식으로 자기 공부를 한다. 학원에 가지 않지만 큰딸은 성적도 좋다. 초등학교 때도 늘 반장과 부반장을 했고, 지금도 시험을 치면 전교 상위 12% 정도의 성적이라고 한다. 김관순씨는 “엄마가 아이의 실력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너무 욕심 부리지 않으면, 아이도 엄마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쉬는 시간에는 세 아이와 함께 텔레비전을 본다. 방송에서는 주로 영어가 나온다. 김관순씨는 “지상파 방송을 빼고는 영어만 나오는 위성방송 프로그램을 신청했다”며 “학원을 가지 않더라도, 영어를 많이 듣게 해주는 환경을 만들어주면 좋을 것 같아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텔레비전 아래에는 흰 도화지가 붙어 있다. 자막 가리개용이다. 아이들은 점차 자막 없이도 내용을 이해하는 폭이 커지고 있다.
왜 김씨네 아이들은 ‘감시’ 없이도 공부를 잘하는 걸까? 아이들이 유별나게 착하거나 특별해서라기보다 엄마와 아이들 간에 신뢰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저는 학원보다 우리 아이들을 믿어요. 아이들이 할 일을 제가 일방적으로 정하지 않고 아이들 스스로 정하게 하고요.” 공부량, 시험 때 도달할 목표, 심지어 용돈까지 모두 직접 정하게 한다. 그렇게 평소 생활습관부터 자율적으로 길러내기 때문에 아이들이 공부도 자율적으로 잘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물론 적절한 점검과 함께 상벌도 준다. 아이들이 목표에 도달하면 가족이 같이 외식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자유를 규제한다.
사교육비로 해외여행을
학원에 보내지 않는 대신 자기주도적 학습으로 아이를 키워낸 경험을 <솔빛 엄마의 부모 내공 키우기>(민들레 펴냄)로 엮어낸 ‘학원-프리’ 1세대 이남수씨는 “자기주도 학습은 아이가 스스로 공부할 이유를 찾고, 계획하고, 실천하도록 돕는 것이지 부모가 아이를 붙들고 앉아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들에게도 고민과 걱정이 있다. 초·중·고교생 10명 중 7.5명이 사교육을 받는 ‘학원공화국’에서 ‘학원을 안 보내는 엄마’는 엄마 사회에서 ‘왕따’되기 십상이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성인이 된 이후 학력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곳이다. 김관순씨도 “친구들이 ‘너 그렇게 애한테 무관심하다가 대학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말할 때면 내가 아이를 잘못 가르치는 건지 혼란스럽기도 하다”고 말했다. 정말 학원을 안 가면 아이들의 삶은 불행해질까?
진종석(52·경기 과천시)씨는 “무엇이 진짜 행복한 길인지를 잘 생각해보면 된다”고 답한다. 진씨는 사교육 없이 두 딸을 키워낸 아빠다. 진씨가 한 특별한 교육이라면 아이들 사교육비에 해당하는 돈을 모아 가족이 분기마다 여행을 다닌 것이다. 큰딸이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는 큰딸과 3살 차이 나는 작은딸 둘만 9박10일짜리 일본 여행을 보냈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해 다시 기차를 타고 도쿄에 갔다오는 코스였다.
진씨는 “그전에 아이들과 일본 여행을 두어 번 다녀왔기 때문에 아이들의 힘만으로 다녀올 수 있다고 믿었다”며 “학원에서 새들이 모이 받아먹듯 지식을 얻는 것보다 직접 함께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 훨씬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두 딸들은 그 뒤 인도 자원봉사 여행 등 스스로 여행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진씨의 큰딸은 수도권 대학 특수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대안학교에서 특수교사로 일하고 있다. 둘째딸도 한 대학의 식품영양학과에 다니고 있다. 최고 명문대는 아닐지 몰라도 두 딸의 삶은 여전히 행복하다.
굳이 명문대를 보내고 싶다 해도 학원에 보낼 필요는 없다. 서울대 법대, 고려대 법대, 경찰대 등에 동시 합격한 김경후(21)씨는 단 한 차례도 학원에 다니지 않았다. 김씨의 아버지 김호씨는 “아이 교육을 위해 중학교 때부터 산간 벽지에 있는 학교를 찾아다니며 도시와 다른 환경을 만들어주려고 애썼다”고 말했다. 김씨는 “학원이 꼭 자동차 길 안내를 해주는 내비게이션 같다”고 말했다. “어른들도 내비게이션만 따라가다 보면, 나중에 가본 길도 다시 못 가잖아요. 애들을 학원에 맡겨버리고, 스스로 배우는 능력까지 갖추라고 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에요.”
학원을 ‘이용’하라
송인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대표는 “아이들에게 전 과목을 가르치며 성적 올리기를 목표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량의 내용을 주입하는 입시 사교육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피아노·바이올린 등 악기나 각종 스포츠는 학교 교육으로 쉽게 채워주기 힘든 부분이다. 또 중·고등학교에 진학한 아이들이 학교 수업에서 부족한 부분이 생긴다면 그 부분만 2~3개월 정도 학원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 수준에 한해 학원을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식의 ‘치고 빠지는 학원 수강’은 학원업계에서 싫어한다.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교육이 사교육을 부르는 학원 시장의 메커니즘에서 학부모들은 곧잘 유혹에 빠진다. ‘학원-프리’를 구체적으로 실천할 지침이 절실한 이유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오는 4월부터 학부모들의 토론을 통해 사교육의 적절한 활용법과 범위 등에 대한 실천적 가이드라인을 만들어갈 계획이다.
대한민국 사교육비 대놓고 불공정 경쟁
2월27일 통계청이 발표한 ‘사교육비 실태조사’를 보면, 사교육 시장 규모와 사교육의 빈부 격차는 더욱 커졌다. 2008년 사교육비 규모는 20조9천억원으로 2008년보다 4% 정도 불어났다. 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23만3천원으로 2007년보다 5% 늘었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엄청나다(그래프 참조). 사교육비 통계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2007년부터여서 2006년 이전의 사교육비 규모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이를 위해선 ‘가계수지 동향’에서 잡히는 보충교육비와 교재비를 합한 ‘유사사교육비’로 규모를 파악해야 한다. 유사사교육비 통계를 보면, 1997년 가구당 사교육비는 8만원이었지만 지난해는 21만7천여원으로 3배 가까이 뛰었다. 사교육비 증가율은 2007년과 2008년 사이가 가장 높다.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이 사교육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월급 봉투는 얇아져도 국민들은 사교육비 지출을 멈출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이번 통계청 조사를 보면, 사교육은 소득수준에 따라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월평균 소득수준이 700만원 이상인 가구의 아이들은 91%가 사교육을 받는 반면, 100만원 미만인 경우는 34.3%에 그쳤다. 사교육비 지출액도 당연히 차이가 크다. 월평균 소득이 100만원 미만인 가구의 사교육비는 학생 1인당 평균 5만4천원이지만, 700만원 이상인 가구의 사교육비는 학생 1인당 평균 47만4천원이다. 무려 8.8배 차이가 난다. 소득에 따른 사교육비 지출 차이는 상급학교로 갈수록 더 벌어져 일반계 고등학교에서는 소득수준이 700만원 이상인 가구의 사교육비가 100만원 미만인 가구의 사교육비보다 11배 더 많았다.
부모의 학력 수준도 사교육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부모가 대학 이상을 졸업한 경우 아이들의 사교육 참여율은 80%를 넘어선 반면, 부모가 중학교 졸업 이하의 학력을 가진 아이들의 사교육 참여율은 44.8%였다. 서울과 지역의 차이도 컸다. 서울에서는 전체 가구의 17.9%에서 매달 50만원 이상의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반면, 읍·면 지역에서 50만원 이상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가구는 1.7%에 불과했다.
송경원 진보신당 정책연구위원은 “사교육으로 경쟁하게 되면, 결국 소득에 따른 불공정 경쟁이 될 수밖에 없다”며 “이렇게 국민의 고통지수를 늘리는 사교육이라면 차라리 법적으로 금지하는 것도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위한 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등대지기 학교 학원 프리 ‘소수자’의 연대
자녀를 학원에 안 보내는 부모들은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 ‘소수자’다. 그래서 이들은 연대가 필요하다. 교육적 소신을 나눌 수 있는 모임도 필요하다. 김관순씨나 안혜용씨가 그렇게 찾은 곳이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등대지기 학교다.
지난해 9월 시작된 등대지기 학교는 오는 4월7일 두 번째 개강을 앞두고 있다. ‘사교육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사교육 없이도 잘 교육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모임이다. 두 달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인터넷 스타 강사 출신 이범씨,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 등이 나와 ‘사교육 공포 쓰나미에서 살아남기’ ‘입시지옥 탈출 방법’ 등의 주제로 강의를 하고, 학부모·교사 등으로 이뤄진 다양한 참가자들이 그에 관해 토론을 벌인다.
김관순씨는 큰딸 지예양이 ‘수학이 모자라 학원에 가보는 게 어떨까’ 고민을 상담해와 인터넷에서 ‘사교육’을 검색했다가 거꾸로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알게 됐다. 여섯 달 전 이야기다. 김씨는 “다른 모임에서는 내 교육 방침을 이야기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아 말이 안 통하곤 하는데, 같은 고민을 하는 곳이어서 마음이 편하다”며 “등대지기 학교는 무조건 사교육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사교육을 하면서 아이를 건강하게 키울 것인지 고민하는 모임”이라고 말했다.
이곳 회원으로 초등학교 4학년과 5학년 두 아이를 둔 최성순(43)씨도 “주변에 너무나 당연하게 학원 보내는 엄마들이 많아 나도 언제나 ‘특목고 대비학원’ ‘영어학원’ 등을 두고 고민하던 찰나에 이곳을 알게 돼 고민을 나눌 수 있었다”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엄마가 욕심을 조금 버리면 학원을 보내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생긴다”고 말했다. (문의 www.noworry.kr, 02-797-4045).
‘학원 프리주의자’의 노하우 쌍방 합의에서 자기 주도로
학원에 의존하지 않고 아이들을 키우려면 어떤 ‘노하우’가 필요할까. ‘학원으로부터의 자유’를 미리 선언한 선배 엄마·아빠의 노하우를 들어봤다.
두 배의 느낌으로 답하라
“올해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4학년이 되는 딸과 아들이 있다. 맞벌이 부부인 우리는 아이와 몇 가지 약속을 한다. 그중에 하나가 책 한 권을 정해주고 읽은 느낌을 쓰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빠는 그 두 배의 느낌을 써주기로 약속한다. 피드백에서는 아이의 어떤 표현이 뛰어나다고 칭찬을 하거나, 아이의 감상 내용과 관련한 ‘아빠의 또 다른 경험’을 써주거나, 아이가 감상문에서 다룬 부분에 대한 아빠의 생각을 써줄 수 있다. 칭찬·논쟁·격려 등을 주고받는 것이다. 아이는 아빠의 피드백을 기대하며 정말 열심히 책을 읽는다. 책 읽는 속도도 빨라지고, 책 읽는 것을 재미없어하던 아이의 집중도도 높아졌다. 가끔이라도 시간이 허락한다면 아빠가 같이 책을 읽어줘도 좋겠다.” - 송인수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 대표
텔레비전·컴퓨터를 흥정 말라 “아이들을 유혹하는 가장 큰 적은 두 가지다. 텔레비전과 컴퓨터. 이 두 가지와는 타협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컴퓨터는 일단 마루로 빼고 게임은 할 시간을 정해두고 하게 한다. 다른 일을 잘한 보상으로 ‘게임 1시간’ ‘게임 30분’을 주는 것은 좋지 않다. 게임에 대한 ‘선호도’를 높일 뿐이다. 우리 집은 텔레비전 앞에 책을 쌓아뒀다. 처음엔 저항이 거셌지만, 점차 텔레비전을 보지 않게 됐다. 이것은 부모에게도 상당한 희생을 요하는 대목이다. 부모가 먼저 TV와 멀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 신을진 한국사이버대 상담학부 교수
아이들을 협상 파트너로 인정하라 “공부뿐만 아니라 생활 곳곳에서 아이들이 자기주도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집은 점심 설거지는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하고, 자기 양말과 속옷은 아이들이 직접 빨게 한다. 초등학교 3학년짜리 막내아들도 스스로 빨래를 한다. 어떤 것도 부모가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 용돈 협상이 대표적이다. 아이들에게 가계부를 쓰게 하고 매달 말에 점검한다. 아이들에게 가계 수입이 어떻게 쓰이고, 또 부모가 아이들에게 쓴 돈이 얼마인지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매년 1월은 용돈 협상의 달이다. 아이들이 원하는 용돈 인상액과 이유를 써서 내면 엄마·아빠가 보고 합리적인 선에서 결정한다. A4 용지 한 장 가득 논리적으로 잘 쓴다. 경제관념은 물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능력, 자기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능력 등 모든 측면에서 도움이 되는 것 같다.” - 김관순 주부
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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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기사입니다. 김규항, 송호창, 우석훈, 노회찬 등 네 분이 '학원금지'를 이야기합니다.그런데 이 개별 인터뷰에 대한 김규항 씨의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규항넷에서 김규항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언급한 한겨레21 기사들. 기자에게서 연락이 왔기에 들어가 한참 읽어보았다. 실사구시하게 만들어진 기사지만, 우리의 비루한 삶과 이중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진다. 기사 아래 달린 댓글들엔 386 운동권 출신들의 사교육 장사에 대한 증오심이 가득하다. 이 쪽팔림을 대체 어찌할 것인가? 이걸 뭉게고 무슨 놈의 이명박 반대란 말인가? 처절하게 깨지고 또 반성할 일임을 거듭 확인한다. 그나저나.. 우석훈 씨는 참 특이한 사람이다.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기보단 공산주의자에 가깝다고 말하는 이가 왜 관점은 언제나 계급이 아니라 국가(혹은 세대) 단위일까? 생태주의자라고 하는데 글에선 국외자의 냄새보다는 '생각이 깬 엘리트 관료' 혹은 '체제 내 정책 조언가'의 냄새가 나는 연유는 무엇일까?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라 정말 궁금하다."(원문출처: http://gyuhang.net/) --------------------------------------------------------------------------------------
한 사회를 끝장내는 교육
■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한 사회를 끝장내는 가장 완전한 방법은 무엇일까? 역사 속에서 실행된 적극적인 방법은 학살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또한 학살만으로 한 사회를 끝장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히틀러는 유대인을 박멸하기 위해 가스실까지 동원했지만 지금 유대인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없던 나라까지 만들어 죄없는 팔레스타인 인민들을 학살하고 있지 않은가. 제노사이드는 유대인의 수를 일시적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지만 그들의 결속력은 오히려 더 강화했다. 한 사회를 끝장내는 가장 완전한 방법은 바로 그 사회 성원들의 결속력을 파괴하는 것, 즉 모든 사람을 오로지 자기만 아는 인간으로 만들어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아귀다툼을 벌이는 사회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그 사회는 설사 지금 제아무리 휘황하다 해도 이미 끝장난 사회다. 인류 역사에서 지배계급에 굴종하는 인간을 길러낸다거나 국가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은 존재했다. 그러나 어떤 가치관에서든 사회적 결속력을 거스르는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이 이루어진 경우는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이젠 엄연히 존재한다.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이다.
오늘 한국이 절체절명의 사회인 건 물론 모든 사람이 말하듯 경제 문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이 사회가 아이들을 ‘나쁜 인간’으로 길러내는 일에 이념과 계급을 불문하고 온 힘을 모으고 있다는 데 있다. 한국은 아이들을 이기적이고 경쟁적이며 물질적 풍요를 인생의 목표로 삼으며 소박함의 아름다움과 정신적 충만을 우습게 여기는 인간으로 키우는 걸 교육이라 믿는 사회이며, 어떻게 하면 그런 교육을 더 효율화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걸 교육 문제라 말하는 사회다
그리고 그 아귀다툼의 중심에 학원이 있다. 한국에서도 본디 학원은 정규 교육기관인 학교를 보조하는 교육 수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에서 사람 꼴을 갖추는 이런저런 덕목과 가치들을 배우는 일이 사라지고, 국·수·사·과니 영어니 하는 학과 점수가 유일하고 전적인 가치가 되면서 학원은 학교를 제치고 가장 주요한 교육기관이 되었다. 한국에서 여전히 벌어지는, 일반학교가 어떻고 특목고와 자립형 사립고와의 격차가 어떻고 하는 논란들은 실은 다 그냥 겉치레 말들이다. 학교보다 주요한 교육기관으로서 학원은 이미 지급하는 금액에 따라 엄격하게 서열화돼 있으며 누구도 그 ‘금액에 따른 격차’에 항의하지 않는다.
학원의 권위는 보수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 이를테면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는 조·중·동 애독자에 국한하지 않는다. 진보적이라는 사람, 심지어 진보적 교육을 고민하고 실천한다는 사람들도 감히 제 아이를 학원에서 자유롭게 하진 못한다. 광장에서 “이명박이 우리 아이들 다 죽인다!”고 외치던 사람들도 자정이 되면 눈동자가 풀려 휴대전화로 아이가 학원에 다녀왔는지 확인한다. 오늘 외국 자본 투자까지 들어오는 거대한 학원 산업의 주인공들은 모조리 ‘개혁적인’ 386들이다.
그리하여 오늘 한국에서 학원은 단지 학원이 아니다. 학원은 오늘 우리 아이들과 우리가 사는 사회와 우리의 인간성을 망가트리는 자본의 가치관의 결정체이자, 마몬의 성전이다. 학원의 존재를 부인하는 노력은 우리 아이들과 우리가 사는 사회를 살리는 첫걸음이다. 학원을 없애자. 우리 아이들이 그들의 학교에서 공부하게 하자.
2000년 위헌결정을 다시 생각한다 ■ 송호창 변호사
예전엔 공교육을 보호하기 위해 사교육에도 여러 가지 법률적 제약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실효성 있는 모든 제한이 해체되고 학생과 학부모는 각자의 재산에 따라 사교육에만 매달리게 됐다. 이 모든 사태의 시작은 2000년 헌법재판소가 내린 ‘과외금지 위헌결정’부터다.
당시 위헌 이유는 부모의 교육권은 다른 교육 주체보다 원칙적으로 우위에 있고, 학교 밖의 교육 영역에선 더욱 부모가 우선하므로 법으로 과외를 금지하는 것은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육 문제의 모든 책임을 헌재에 지울 수는 없지만, 이로부터 사교육 시장은 아무 거리낌 없이 뻥 뚫린 대로를 무한 질주할 수 있었고, ‘수단·방법 가릴 것 없이 성적만 올려라’ 주의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지상 최대의 선이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오해가 있다. 당시 헌재는 상당히 심각하게 교육 현실을 고민하면서 공교육의 가치와 부모의 교육권을 저울질한 가운데 어렵게 결정을 내렸다. 사교육 제한이 무조건 위헌이란 말이 아닌 것이다. 법이 사교육 금지를 원칙으로 하고 또 형사처벌까지 부가하는 것은 공교육의 가치를 지키는 수단이라곤 하지만 과도한 규제라는 취지였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허용하되 예외를 넓혀 금지하고, 형사제재가 아닌 행정규제 등의 방법으로 완화한다면 합헌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당시 교육부가 헌재에 ‘과외는 학생들에게 자주적 학습태도를 결여시키고, 신체적·정서적 성장을 막으며, 경쟁의식으로 인해 공동체 의식을 키울 수 없으며, 학교 교육을 황폐화해 학생들의 사고력·창의력 발달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과외를 금지해야 한다는 법률의견을 냈다는 사실을 지금의 교육과학기술부는 알기나 할까. 과거에 비해 아이들의 신체와 정서는 더욱 심각하게 왜곡되고, 교육 현장에서는 온갖 부작용이 터져나오는데도 왜 교육당국의 정책은 10년 전보다 못하게 거꾸로 가는 걸까.
헌재 결정 당시 ‘위헌 판단은 과외를 무제한 허용하자는 것이 아니다. 교육이 붕괴되고 있는 처지에서 대입수능 정책의 개혁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했던 소수의견에 더욱 귀기울여야 한다. 구호처럼 유행하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란 영화가 나온 것이 1989년이다. 그 뒤로 아이들은 더욱 치열하게 행복을 성적과 맞바꾸고 있다. 교육당국은 언제까지 이 상태를 방치할 건가. 공교육 보호와 사교육 억제를 위해 과외 금지가 처음 생긴 것이 1981년이다. 전두환 정권 때도 교육당국은 지금처럼 무책임하고 파렴치하지는 않았다.
가장 쉬운 경제위기 해결책 ■ 우석훈 연세대 강사
한국은 아주 짧지만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까지 간 적이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하여간 한국에 주어진 모든 자본을 총동원하다시피 해서 공식적으로 2만달러 경제를 만들기는 했다. 이 순간을 정점으로 한국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시작했다. 정치학자들은 이걸 “이명박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 같다. 그럴 수도 있다. 정치적 구호는 늘 그렇게 생겨나고, 사람들은 그렇게 흐름을 보기는 한다.
그러나 같은 사건을 교육이라는 눈으로 보자. 한국은 경제적으로 망했는데, 사교육을 담당하던 학원이 코스닥에 상장을 하고 드디어 제대로 된 투자 가능 기업이 된 순간, 그 순간부터 망했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한국 경제의 전개 과정을 보면 그렇기는 하다. 사교육이 진정한 의미의 기업이 된 순간, 한국 경제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사교육과 공교육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철학적으로 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고, 또 그럴 마음도 없다. 나는 이것을 국내 시장 위축과 80%에 달하는 해외 경제 의존도의 진정한 요소로 분석할 뿐이다. 한국에서 자식을 둔 부모들은 늘 가난하다. 중산층을 기준으로 볼 때, 한국에서 사교육은 대체로 가처분소득의 3분의 1 혹은 그 이상을 요구한다. 그게 싫으면 자식을 조기유학의 형태로 외국으로 보낸다. 총소득 수준만 보면 정상적인 선진국의 소득·소비 분포가 형성되는 것이 당연한데, 한국에선 그 돈을 사교육에 지출하고 있으니까, 정상적인 내수 산업 구조가 생기기 어려운 것이다.
이 정도면 국민경제의 정상적인 운용이 힘들 정도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는 학벌 구조 속에서는 누구도 이 게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 게임의 너무 쉬운 해법은 사교육 금지라는 점에 아마도 국민의 절반 이상은 쉽게 동의할 것이다. 정부가 개개인들의 가처분소득을 더 높이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그를 통해 내수시장을 복원하려고 한다면, 이를 위한 가장 쉬운 조치가 사교육 금지가 아니겠는가. 어차피 경쟁은 피할 수 없다 하더라도, 사교육이 있는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 두 가지 중에서 사교육이 없는 상태가 국민경제의 운용을 위해서는 훨씬 유리할 것이다. 그러나 2000년 헌법재판소의 과외 금지에 대한 위헌결정 이후, 이런 선택은 논의 자체가 막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지금과 같이 국민경제가 사교육으로 인해 위험하게 된 상황은, ‘경제 민주화 조항’이라고 불리는 헌법 119조 2항(‘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이 적용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선택의 문제를 행정적으로 헌법적 질서에 맞게 풀 수 있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이른바 이해당사자인 누군가가 다시 헌법재판소에 법률적 결정을 청구하거나, 아니면 사실상 헌법에 준하는 권한을 갖는 국민투표를 통해 이 사회 전체가 합의할 수 있는 원칙을 세우는 일이다. 좀더 합리적이고 타당한 절차는 국민투표를 통하는 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한국의 현행 헌법은 국민투표 부의권을 대통령에게 독점적으로 주고 있지만, 국민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국민경제에 중대한 문제가 되는 이 정도 사안이라면 대중적 청원 과정을 통해 국민투표까지 가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이러한 법리적·정치적·사회적 논의 절차가 아니라, 이미 누구도 제어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져버린 사교육이라는 특수한 경제 부문을 어떤 방식으로 연착륙시킬 수 있을 것인가다. 이미 사교육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대부분의 국민들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음에도, 국민적인 대변인이라고 할 수 있는 가수 신해철마저 끌어들일 정도로 사교육은 엄연한 하나의 산업이 되어버렸다.
대체로 지금의 사교육은 내부적으로는 완벽한 양극화 구조이며, 1억원 이상의 연소득을 올리는 일부 스타 강사와 2천만원 미만의 소득을 올리는 비정규직 강사들로 양분돼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부드럽게 지금의 사교육에 전도된 한국의 교육을 정상화하며 사회적 저항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 지금의 사교육 인력을 공교육으로 흡수하는 방식이 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교육대학원 등을 활용해 사교육 인력의 상당 부분을 공교육으로 흡수하면, 공교육의 교사 대 학생 비율을 획기적으로 낮추면서 사교육 폐지의 충격을 줄이고 공교육의 질을 더욱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교육 폐지만으로 학벌사회의 문제와 그 밖에 우리가 늘 ‘교육의 문제’라고 얘기하는 온갖 문제가 해결될까?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대학 등록금, 국립대학 사이의 연계, 사립대학에 대한 정부 지원 등 남아 있는 문제는 여전히 많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경제적 위기 속에서 가장 쉬운 해결책의 출발점 하나를 손에 들고 있는 셈이다. 이게 풀리면, 공교육 그리고 사회적 교육이라는 틀 속에서 많은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출발점으로 내가 바라는 정책적 요구는 간단한 하나의 문장이다. “사교육 금지를 국민투표에 부치자.” 그것이 가결되든 부결되든, 이것은 민주주의 절차 내에서 가능한 일이고 그 단순한 조치에서 많은 것들을 얻어낼 수 있으며, 국민경제 회생까지 걸려 있는 일이 아닐까 한다.
국민투표를 제안한다 ■ 노회찬 진보신당 공동대표
한국 사교육비의 대부분은 좋은 대학 들어가는 데 쓰인다. 아이들의 진정한 실력을 높이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입시 경쟁에서 앞선 순위를 받는 데 쓰일 뿐이다. 대학입시를 위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교육비를 지출하면서도 대학의 학문 경쟁력이 최하위권에 머무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다른 나라에서는 거의 지출되지 않는 대학 입학 경쟁 비용으로 한 해 수십조원의 지출이 계속되는 이 바보 같은 일을 우리는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나?
이명박 정부는 사교육비를 반으로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말과 행동은 거꾸로 가고 있다. 영어몰입 교육, 대입 자율화, 고교 다양화, 일제고사 강행, 국제중 설립 등 사교육비를 한 푼이라도 더 지출하게 하는 온갖 방안이 시행되고 있다. 저소득층까지 가계 지출 중 교육비 비율이 계속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사교육비를 한 푼이라도 더 쓴 학생이 입시 경쟁에서 유리한 만큼,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은 기회 균등을 통해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부가 세습되고 가난이 승계되는 부익부 빈익빈을 재생산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
사교육비를 줄이는 방법은 우선 사교육의 필요성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즉, 고질적인 학벌 체제를 타파하고 대학의 상향 평준화를 추진해야 한다. 이른바 ‘좋은 대학’이 적기 때문에 입시 경쟁이 치열하고 경쟁 비용이 늘어난다면 ‘좋은 대학’을 늘리는 길부터 찾아야 한다. 국공립대학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로 이들을 모두 서울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일부터 해야 한다.
공급을 대체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방과후 학교를 늘려 사교육을 줄이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까지의 통계에 따르면, 방과후 학교가 늘어남에도 학원 및 개인 교습비는 더 높은 비율로 늘어나는 것이 확인됐다. 방과후 학교를 통해 사교육비를 반으로 줄이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대책은 실패가 확정적이라 할 수 있다.
공교육을 바꿔서 사교육이 필요 없도록 하는 게 정답이긴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공교육에서 경쟁과 서열을 최소화하고, 사교육 종사자를 학교와 공공서비스로 흡수하고, 학생의 창의력과 자율성을 신장시키는 학생중심주의 학교로 바꾸는 것이 정답이긴 하지만, 시간도 필요하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따라서 사교육에 대한 공급 차원의 통제정책이 적극 모색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입시와 관련된 사교육을 금지하는 국민투표를 제안한다. 입시와 직접 연관된 사교육만 제한한다면 위헌 소지도 없앨 수 있다. 우리 모두, 경쟁을 하더라도 공정하게 하자는 사회적 합의를 하자. 이런 합의를 바탕으로 새로운 교육체제를 만드는 여정을 시작하자. 핀란드의 교육개혁은 1963년 의회에서 결정을 내리고, 1968년에 법을 만들고, 197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충분히 논의하고 합의한 다음 학교를 바꿔나갔다. 그리고 지금 핀란드는 세계 모든 나라가 본받고 싶어하는 학교를 가진 나라가 됐다. 개혁을 늦춘다면 우리는 강자만이 살아남는 ‘동물의 왕국’을 계속 유지해야만 한다. 교육을 바꾸지 않는 한 이 나라에 희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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