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3일 월요일

수많은 저항의 현장에서 철학은 무엇이란 말인가

한 주를 여는 생각

“살아가겠다”
고병권 지음
삶창 펴냄 

“살아가겠다.” 겹따옴표로 인용되어, 수많은 누군가가 지금 바로 여기서 내지르는 음성임을 드러내는 이 말은 이 책의 제목인 동시에, 이 사회 갈등 현장의 복판에서 철학 함이 무엇이며 앎이 무엇인지를 궁구해온 ‘현장 철학자’ 고병권씨가 말하는 절망의 인문학이다. 
“해고는 살인이다”(쌍용차), “여기 사람이 있다”(용산), “지금 이대로만 살다 죽고 싶다”(밀양), “(시설이 아니라) 여기에서 함께 살고 싶다”(장애인 공동행동), “내 밭을 가꾸며 여기서 살아가고 또 싸워가겠다.”(두물머리 철거지역 농부) 2010년대 한국 사회에서 ‘삶’ 그 자체가 지금 체제가 요구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저항의 슬로건이 되고 있다.
<“살아가겠다”>는 2009~2013년 서울 대한문 앞 농성촌에서부터 핵발전소 송전탑을 거부한 밀양의 할머니·할아버지, 장애인들의 노들야학, 그리고 가난과 앎을 배제시킨 한국 대학, 미국 뉴욕의 점령하라 운동까지, 그 현장에서 고씨가 만난 사람들이 들려준 말의 기록이다. 지은이는 말한다. 이 사회가 밀양 주민과 장애인들을 삶터에서 추방했다면, 대학은 철학과 앎과 가난한 자를 추방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밀양, 장애인들의 투쟁은 자기 터전에서 추방당한 자들의 “살아가겠다”는 맞섬이다. 이들의 육성을 전하면서 고씨는 ‘다르게 살기’를 얘기한다. “삶의 다른 형식을 창안하는 것이 권력과 자본에 대한 중요한 저항”이라 말한다. 그것은 용산의 카페 레아, 홍대앞 두리반, 밀양의 움막, 두물머리 강변에서 움텄던 일종의 해방구, 그 코뮌을 사회 곳곳에 확산시키는 일일 테지만, 그에 앞서 그는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가기와 투쟁하기가 결합된 새 삶의 방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말한다. 그것은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가 말한 용기, 또한 디오게네스가 말한 용기다. 고씨는 “철학은 본래 용기이다”라고 말한다.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장애는 불가능성의 체험이다. “장애를 가졌기에 활동을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이런저런 활동을 할 수 없는 현실에서 우리는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이 이 사회 온갖 턱들을 폭로하는 순간을 기록하면서 고병권은 그 불가능성 앞에서 ‘포기’를 강요하는 현실에 맞서 싸워야 한다 말한다. 사진은 그(마이크 든 이)가 2008년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노들야학 학생들과 철학 강좌를 하는 모습. 삶창 제공
어느 날 플라톤이 길거리에서 식사를 위해 직접 샐러드(채소)를 씻고 있는 디오게네스를 보았다. 디오게네스가 시칠리아의 왕(디오니시우스)에게 어떤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한 일이 있은 뒤였다. 또한 플라톤이 시칠리아 왕을 세 차례나 만나며 시도했던 철학 하는 왕 프로젝트가 무위로 돌아간 맥락에서 디오게네스 학파 쪽에서 빚어낸 것으로 짐작되는 일화다.
플라톤이 디오게네스에게 말했다. “왕에게 조금만 더 공손했더라면 너는 샐러드를 직접 씻을 필요가 없었을 거다.”
디오게네스가 답했다. “샐러드를 직접 씻는 법을 배운다면 너는 왕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다.”
철학자 고병권의 <“살아가겠다”>(삶창 펴냄)는 지금 여기, 삶과 앎의 용기에 관한 책이다. “희망을 내일에 거느니 오늘에 걸고, 희망을 거기에 거느니 여기에 걸겠다”고 그는 쓴다. 연구공동체 수유너머 아르(R)의 일원으로서, 장애인들의 공동체 겸 학교 노들야학의 철학교사로 2007년부터 일해왔으며, 노동조합과 한국 곳곳의 시민단체(인권연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나아가 교도소 재소자에게 철학을 읽어온 그가 책 첫머리에서 고대 그리스의 두 철학자를 언급하는 까닭을 알아내기에 앞서, 그가 체험했던, 자크 랑시에르가 “프롤레타리아의 시간”이라 했던 밤, 노들야학의 밤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한 학기 동안 허공에다 혼자 소리를 질러야 할까. 막막했다.’ 고병권은 2010년 봄, 노들야학 중등 과정인 ‘불수레 반’에서, 프리드리히 니체의 책 <자라투스트라>를 읽던 첫 시간을 이렇게 체험했다. 그 강의를 듣는 10명 남짓 학생은 더러 20대와 30대, 절반가량은 40대 중후반. 두셋을 빼고는 말하는 데 어려움이 큰 중증장애인들이었다. 이들은 그의 말을 “성의껏 들어주었”지만, “강의실엔 내 목소리만 울리는 것 같았다”.
철학 한다는 건 무엇일까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 철학자가 묻고 답변했다
철학은 살아가는 기술이다
용기있게 행할 줄 아는 지혜다
자기를 가꾸고 타인을 품는 것이다
철학적 사명과 정치적 사명은
그런 점에서 하나로 묶여야 한다
 
그러나 그 세번째 시간, “마침내 하나의 불꽃이 일었”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를 읽는 순간이었다. 자라투스트라가 “우리 안에 맹수들이 살고 있다”는 말을 할 때였다. “갑자기 학생들이 동시에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소리를 지르고 손을 휘젓고 휠체어를 들썩였다. 비(B)는 급작스레 근육 강직이 일었고, 시(C)는 자기를 손으로 가리켰으며, 디(D)는 ‘내가 그렇다’고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그 책을 여러 번 읽었고 여기저기서 강의도 많이 했지만, 그 대목, 불쑥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삼켜버리는 충동·욕망을 맹수에 비유하는 대목을 예전에 그는 정신 중심의 서양철학 전통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읽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대목을 중증장애인들, 누구보다 신체 때문에 차별적 시선을 겪었고 스스로 자기 신체를 ‘경멸’했던 이들 앞에서 읽는 순간, 책은 그 이상의 의미를 낳고 있었다. “그 순간, … 내 눈엔 학생들 모두가 정글에서 살아온 맹수같이 보였다.”
그 순간을 고병권은 ‘책을 읽어주던 남자’란 제목의 글로 기록하고 있거니와, 그 순간은 고병권이 책의 다른 글 ‘밤에 열린 어느 장애인 학교’에서 언급하고 있는 ‘혁명 이전의 혁명’의 순간, 존재의 각성이 불꽃처럼 튀는 순간에 해당할 것이다. “배움 이전의 배움, 운동 이전의 운동이 있는 곳에선 교과서를 읽는 것만으로 변혁의 몸짓이 시작된다.”
권력자를 변화시켜 세상을 바꾸려 했던 플라톤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 속에서 노년의 플라톤은 앎을 이렇게 비유했다. 오랜 사귐과 공동생활을 통해 “튀는 불꽃에서 댕겨진 불빛처럼 혼 안에서 생겨나 스스로를 길러낼 것”이라고.
이 책은 한국 사회 곳곳 ‘불꽃’이 튀는 현장에서 지은이가 행한 강연과 그가 만나 인터뷰한 사람 얘기를 모은 글이지만, 한 철학자가 그 ‘길거리’에서 철학 함이란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치열하게 물으면서, 나아가 책을 읽을 많은 독자에게 앎이란, 삶이란 무엇인지 집요하게 답을 요구하는 질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철학은 무엇인가. 지은이는 용기라고 말한다. 플라톤과 디오게네스는 공히 철학이란 삶으로 입증되는 것이라 보았다. 철학은 “살아가는 기술”이며, “앎의 대상이라기보다 행함의 지혜, 결국 행함으로 드러나는 지혜”이며 철학자는 “자기 삶으로 철학을 입증하는 사람이다”.
디오게네스는 “채소를 직접 씻는 법을 배우라”며 왕 권력에 기대어 사회를 바꾸려던 플라톤을 조롱했다. 서양 철학사에서 ‘견유(=키니코스, 개 같은 선비)주의’의 스승이라 불리는 디오게네스는 “만물은 만물 안에 있다”고 했다. 고병권은 그것에서 ‘평등’과 ‘연대’의 원리를 끄집어낸다. 만물은 각자 만물을 품고 있으므로, 그 자체로 평등하다. 인간끼리는 물론 그 이외 존재들도 법 없이도, 법 이전에 평등하다. 또한 만물이 만물 안에 있다는 것은 내 안에 네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이다. 디오게네스 철학의 연대는 이해관계, 사회계약에 우선한다. 그것은 우리 존재 자체가 타인들로, 연대로 이뤄졌다는 깨달음이다. 이는 전태일이 말했던 “나를 아는 모든 나”, “나를 모르는 모든 나”와 상통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고병권은 디오게네스가 채소를 씻던 ‘철학의 장소’에 주목한다. 그 장소는 ‘길’이었다. 길은 ‘공적인 장소’이니 철학은 “공공연함, 기꺼이 발가벗음”이다. 그 길에서 디오게네스는 두려움 없는 개처럼 “(권력자의) 탐욕에 대한 정찰병”이 되어 권력자들을 고발하고 짖고 물어뜯었다.
디오게네스의 ‘공적인 것’의 의미는 여러 세기를 가로질러 이마누엘 칸트의 계몽 정신에서 재발견할 수 있다. 칸트는 계몽을 지성(지식)이 아닌 용기에서 찾았다. 지적으로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계처럼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것(이성의 사적인 사용)이 아니라, 이성의 공적인 사용으로 보았다. 곧 “학자처럼, 저자처럼” 익명의 사람들에게 자기 의견을 공공연히 드러내 문제를 공적으로 제기하는 용기다. 그것은 “‘감히 알려고 하라!’이다”.
플라톤이 대중(인민)을 양떼로 생각했다면, 디오게네스에게 대중은 사자였다. “목자가 양을 키우는 건 양을 잡아먹기 위해서지만, 사자에게 누군가 먹이를 갖다주는 건 사자가 무섭기 때문이다.”
고병권은 여기서 “철학의 목표와 정치의 목표”가 하나로 겹쳐진다고 말한다. 플라톤 식의 전제주의적 진리에 반대하는 철학적 사명과, 전제주의적 권력에 반대하는 정치적 사명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기 삶을 잘 가꾸고, 그 속에서 또한 타인에 대한 돌봄을 깨닫는 것, 다시 말해 삶의 연대, 이를 위한 투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철학 한다는 것”의 의미라고 그는 말한다.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출처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2229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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