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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중항쟁을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1985·풀빛)의 집필·제작에 참여했던 이들이 최근 광주 동구 금남로 고전음악감상실 베토벤에 모여 <넘어 넘어> 증보판 간행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상집·최평지·전용호·정용화·정상용·이재의·조봉훈·조양훈씨. 최성욱 다큐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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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쏙] 29년만에 집필자들이 밝힌 ‘넘어넘어’ 출판 비화
진실이 재갈 물린 살얼음판 같았던 시절,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광주의 역사’를 모았다. 80년 5월 열흘의 항쟁을 담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많은 사람들의 용기와 희생으로 탄생됐다. <넘어 넘어>로 불렸던 ‘오월의 고전’을 만든 당사자들이 29년 만에 한자리에 모여 처음으로 자료 수집과 제작, 집필 경위를 소상하게 밝혔다.
겉면에 1985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에 있던 옛 ㈜화니백화점의 85년 업무일지였다. 빛바랜 노트를 펼치자 1980년 5월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5·18 항쟁에 참가한 사람들의 기억을 꼼꼼하게 기록한 취재 내용이 적혀 있었다. ‘도청’, ‘마이크 준비’, ‘궐기대회’, ‘투쟁위원회’, ‘무기 탈취’, ‘공수부대’ 등의 단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항쟁 마지막날 새벽, 죽음 앞에 던져졌던 이들이 했던 말도 취재수첩에 남았다. ‘총을 쏠 수가 없었다. 물체가 보이지 않았다’, ‘방 안에 있는 폭도들 전부 총을 버려. 일곱 셀 동안 안 나오면 수류탄을 던진다.’
“경찰에 잡혀가도 모르게 하려고 취재한 이들의 성을 쓰지 않고 이름도 앞뒤를 바꿨어요.” 지난달 29일 광주 동구 금남로 고전음악감상실 베토벤에서 만난 이재의(58) 전남나노바이오연구원 원장은 5·18 민중항쟁 참여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적었던 노트를 언론사 가운데선 <한겨레>에 처음 공개했다. 이 원장은 황석영 작가가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1985·풀빛)의 집필자이다. <넘어 넘어>로 불리던 이 책은 80년 광주에서 일어난 10일간의 상황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최초의 공식 출판물로 꼽힌다. 업무일지 갈피 속엔 ‘광주민중민주항쟁사 기술상의 유념사항’ 37가지 등이 적힌 종이 3장도 꽂혀 있었다. “어? 내 글씨네. 야, 이게 아직도 남아 있네.” 조양훈(58) 우리식물연구소 소장이 노트를 펼쳐 보며 웃었다. 이 원장 등은 이날 80년 5월 당시 시민군 투쟁위원회 외무 담당 부위원장이었던 정상용(64) 전 국회의원, 정용화(61)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상임대표, 조봉훈(62) 전 광주시의원, 최평지(62) 장애인생산품판매지원협회 사업본부장, 전용호(56) 광주전남소설가협회 회장, 김상집(58) 전 광주서구의원 등과 만나 책 증보판 추진 문제를 논의했다.
광주항쟁 기록한 책 ‘죽음을 넘어…’
실제 집필은 황석영씨가 아니었다
항쟁 참여하거나 민주화운동하던
이재의·조봉훈·정용화씨 등이 주도
인터뷰·자료수집뒤 출판 나서자
황씨가 기록자로 ‘방패막이’ 수락
1985년 우여곡절 끝 책 나오자
날개단듯 팔렸지만 압수·구속 수난
“몇해전부터 5·18정신 훼손 도 넘어”
시민 힘모아 내년 5월 증보판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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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월 <넘어 넘어> 집필을 시작했던 이재의씨가 5·18 관련자들을 만나 취재했던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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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20일 풀빛출판사를 통해 세상에 나온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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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 인근 신안동 제 자취방이 아지트였지요.” 전남대 재학중 유신체제에 맞서 교육 민주화를 촉구한 ‘전남대 교육지표 사건’(1978)으로 투옥됐던 조봉훈 전 시의원은 “80년 11월 석방된 뒤 항쟁의 진실을 알리려고 책을 내기로 하고 자료 수집에 나섰다”고 회고했다. 5·18 관련 혐의로 구속됐다가 80년 10월 풀려난 정용화 대표도 별도로 자료를 모아 조 전 시의원과 서로 교환했다. 자료 정리는 한국외국어대 학생이던 소준섭(55·국회도서관 조사관) 박사가 맡았다. 대학생들의 대규모 민주화 시위였던 ‘서울의 봄’(1980) 사건으로 수배중이던 소 박사는 79년 성동구치소에서 만났던 조 전 시의원을 찾아 광주에 피신하던 중이었다. 이들은 80년 11월부터 81년 7월 초까지 7개월 남짓 5·18 관련자들과 가족 등의 구술, 목격담, 일기, 수기, 성명서, 병원 진료기록, 판결문, 공소장, 사진 등을 모았다. 김상집 전 구의원은 “5월 당시 상황일지를 정리해뒀다. 81년 출소했더니 봉훈 형(조봉훈 전 시의원)이 5월 자료를 정리한다고 해 감옥에서 정리한 자료를 건넸고 항쟁 당시 상황도 구술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유언론>이라는 지하 유인물을 통해 5·18 진상규명을 촉구하던 조봉훈씨, 정의행(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평화위원장)씨 등 10여명이 구속되면서 책 출판이 벽에 부딪혔다. 정용화 대표는 피신하기 전 사과 상자 6개 분량의 원본 자료를 광주일고 선배였던 박영규(당시 광주지방국세청 근무)씨에게 맡겼다. 소 박사는 원고와 자료들을 가지고 서울로 몸을 숨겼다.
소 박사는 82년 초 고 김근태 의원이 살던 인천 구월동에서 아파트 한 칸을 얻고는 광주에서 정리했던 원고(500쪽)를 지인들과 간추려 42쪽의 <광주백서>(1982)를 인쇄했다. 항쟁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지하 팸플릿’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소 박사는 “<광주백서>는 광주에 국한된 공간으로 남아 있던 ‘광주 문제’를 전국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미국의 책임도 처음으로 거론했다”고 말했다.
“이미 한번 실패했던 터라 3명이 중심이 돼 극비리에 진행했어요.” 정용화 대표는 “82년 12월 말 기소유예로 석방되면서 책 내는 일을 다시 추진했다”고 말했다. 84년 11월 출범한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전청협)는 5·18 진상규명을 가장 중요한 사업 과제로 설정했다. 3년여 옥고를 치르고 나와 전청협 의장을 맡았던 정상용 전 국회의원이 전남대 복적생 이재의 원장을 만나 비밀리에 집필 작업을 부탁했다. 80년 5월 당시 시민군 본부이자 마지막 항쟁 거점이던 옛 전남도청에서 활동했던 이 원장이 집필의 적격자로 꼽힌 것이다. 이 원장은 광주고 동창 조양훈 소장에게 공동 작업을 제안했다. 이들은 85년 1월 초부터 둘의 신혼집을 번갈아 옮겨가면서 집필을 시작했다. 정용화 상임대표에게 받은 자료를 분류한 뒤 곧바로 취재에 들어갔다. 전남대 독서동아리 후배 10여명도 취재를 도왔다. 소 박사가 정리한 <광주백서>가 큰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 이 원장은 “감시가 심하던 때라 취재원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려웠어요. 핵심 인물 40여명을 만났지요. 다들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울었어요. 말할 수도 없고, 들어주지도 않던 때였으니까요”라고 말했다. 이 원장은 서문과 본문을 연필로 쓰고, 조 소장은 날짜별로 시민군과 계엄군의 대치 상황을 여러 장 지도로 그렸다. 이 원장의 후배 최동술(52·일본 거주)씨가 초고를 타이핑했다.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알기 쉬운 한국경제>라는 책을 냈던 임상택씨가 이 원장 등에게 책 인세의 일부를 4개월 동안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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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출판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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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용 전 국회의원과 정용화 대표는 85년 3월 말 원고의 내용을 확인했다. 이 원장 등을 보호하려고 집필자로 나서줄 이와 출판사를 수소문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전남사회운동협의회(전사협) 대표였던 전계량 5·18유족회장이 “출판 책임을 지겠다”고 나섰다. 정 전 국회의원이 황석영 작가에게 부탁했다. 이재의·조양훈·전용호씨 등이 4월 초 당시 광주 북구 운암동에 살던 황 작가를 찾아가 원고 뭉치를 넘겼다. 출판은 광주 출신인 나병식 풀빛출판사 대표가 감당하기로 했다. <넘어 넘어> 증보판 추진 소식에 협조를 약속했던 나 대표는 지난해 12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광주의 이름없는 청년들이 썼다고 하면, 유인물 수준이라고 하지 누가 믿겠나?” 지금껏 <넘어 넘어> 집필자로 알려졌던 황석영(71) 작가는 지난달 27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세 팀 정도가 기록한 것을 (내가) 모아서 간추린 것이다. 그 책이 창작이 아니고 기록이지 않나? 기자들이 기사를 보내면 데스크가 손질하는 것처럼 (책) 데스크 노릇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황 작가는 85년 4월 서울 풀빛출판사 인근 여관에서 한달 남짓 두문불출하며 원고를 가다듬었다. 읽기 쉽도록 소제목들을 달았고, 문병란 시인의 시 ‘부활의 노래’에서 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란 책 제목을 붙였다. 머리말과 서문에 해당되는 ‘역량의 성숙’ 부분을 황 작가가 직접 썼다.
85년 5월20일 발행된 책은 전남사회운동협의회가 펴내고 황 작가가 기록한 것으로 돼 있다. 책 집필자를 두고 억측이 일기도 했던 것은 “가해자 전두환이 집권하던 때라 집필 경위를 소상하게 밝힐 수가 없었던 시대상황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정상용 전 국회의원은 “황 작가가 자료 수집과 집필 등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보호하려 방패막이 역할을 한 것은 대단한 용기였다”고 말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2만여권이 압수당하고 나병식 대표는 구속됐다. 표지 디자인 없는 백지로 다시 찍은 초판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황 작가는 “이 책이 출간된 뒤 일본과 미국 등으로까지 퍼져 광주항쟁의 진실이 국내외에 알려졌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넘어 넘어> 증보판을 시민의 힘으로 내려고 합니다.” 증보판 간행위원회 위원 전용호씨는 “몇해 전부터 5·18 정신을 훼손하고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행위가 도를 넘고 있는 상황이다. 올해 말까지 새로 밝혀진 사실 등을 포함시켜 집필을 끝내고, 내년 5월 증보판을 낼 계획이다. 우리 스스로 반성하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증보판 간행위원장을 맡은 정상용 전 국회의원은 “당시 가슴 조이며 읽었던 독자들이 증보판 간행에 또 한번 관심과 응원을 보내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출처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6223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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