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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농부 최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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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농부다] 장흥 농부 최성훈씨
전남 장흥군 용산면 장터. 사람들이 북적인다. 좌판에 벌여놓은 물품들이 소소하다. 현미 뻥튀기, 땅콩, 콩가루, 들기름, 짠지, 울금, 도자기, 헌 옷, 손때 묻은 책…. 누구 얼굴에서도 장돌뱅이 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서로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물건을 사고팔기도 한다. 큼지막한 천에 장터 이름을 손으로 수놓아 초입에 내걸었다. ‘마실장’이다. “장흥 일대에서 소농을 하는 이들이 꾸리는 장터예요. 오늘은 벌교, 해남에서도 오셨네요. 5일장이 주말에 열릴 때, 그날에 맞춰 우리 마실장 사람들도 모여요.” 최성훈(41)씨도 흑미와 콩가루, 현미 가래떡 따위를 펼쳐놓고 있었다. “마을마다 흩어져 사는 농민들을 만나고, 물건을 나누는 자리예요.”
자동차로 10여분 떨어져 있는 그의 마을. 누가 살던 흙집을 고쳐 지은 듯 아담한 집에 들어서니 여느 농가처럼 종자로 쓸 요량으로 남겨놓은 곡식 망, 가지런히 챙겨놓은 농기구들이 눈에 띈다. 마당 한편에는 흙질로 매만진 부뚜막과 화덕이 있다. “가스를 안 써요. 시간이 좀 걸리지만 밥맛이 구수하고, 몸에 익으니 할 만해요.” 저녁밥을 짓고 있던 동갑내기 아내 김유리씨의 말이다. 세탁기 같은 가전제품도 쓰지 않는다. 편리한 생활의 유혹은 없을까? 남다른 절제의 삶이 고통스럽지는 않을까? “값이 싸다고 전기를 펑펑 쓸 수는 없잖아요. 제 성격이 급한 편인데요. 느린 삶이 새로운 감각을 일깨워주더군요. 생각에도 여유를 갖게 되고요.” 엄두를 내기 어려운 삶을 여유롭게 살아가는 그들이다.
집 뒤를 돌아 야트막한 산기슭으로 가노라니 비탈지게 자리 잡은 작은 논밭뙈기들이 펼쳐진다. 논 4600㎡, 밭 5300㎡. 부부가 농사짓는 땅이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여기서 길러요.” 생활에 들어가는 돈은 얼마나 될까. “1년에 500만원가량? 트럭과 경운기 부리는 데 돈이 제일 많이 들어요. 300만원 이상.” 그렇게 적은 돈으로 살림이 가능할까. “살아가는 데 별로 불편하지 않아요. 집을 고친다든가 해서 목돈이 필요할 때는 좀 부족하겠죠.” 부부는 한해 쌀을 팔아서 300만원, 밭작물로 100만~200만원의 수입을 올린다. “농번기에는 마을 일을 해주고 품삯도 받고요.”
최씨의 삶은 서른살 즈음 충남 홍성의 풀무학교 전공부(2년제 전문대 과정)에 들어가면서 부쩍 달라졌다. 그곳에서 마을공동체의 원형을 체험할 수 있었다. “학생과 교사가 함께 농사지으면서 삶을 배우는 학교마을이라고 할까요. 제게는 지상낙원이었어요. 인문학과 농사가 결합되어 있었고요. 농사를 처음 지어보는데 너무 재미있었죠.” 나직한 그의 목소리에서는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즐거움이 묻어났다. “감자를 심고는 매일 흙을 파보았죠. 한달 가까이 그러다가, 어느 날 싹이 돋아나는데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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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부부가 일구는 산기슭 비탈진 논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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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용산면 마실장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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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살 즈음 들어간 풀무학교
거기서 마을공동체 원형 체험
왜 농사 지어야 하는지 깨닫고
간디 이상 찾아 농촌으로 갔다
자립하는 소농의 삶 실천하고
나뿐 아닌 마을의 삶을 바꿔
산업사회 넘을 대안 찾는다
풀무학교에서는 평생의 멘토 장길섭(53) 선생도 만났다. “농사짓는 법을 이끌어주셨지요. 산업사회에서 왜 농사짓고 살아야 하는지 그 의미와 가치를 일깨워주신 분이죠.” 그가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려는 것도 ‘마을이라는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선생의 가르침 덕이다.
그 뒤 충북 제천의 간디학교에서 농사 교사로 4년을 지냈다. 그 시절 인도의 간디공동체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예배를 올리고, 물레를 돌리며, 농사짓고 살아가는 마을공동체였지요. 이런 삶이 있구나! ‘스와라지’(자치) 정신과 평화의 기운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어요.” 그의 가슴속에 간디의 삶을 깊이 받아 안고 싶은 열망이 커져갔다. “학교라는 틀이 너무 갑갑하게 느껴졌어요.” 2010년 학교를 그만두었다.
최씨는 그 무렵 풀무학교를 졸업한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부부는 풀뿌리 자치를 꿈꿨던 간디의 이상을 화두로 삼아 장흥으로 떠났다. 근본적으로 다른 삶에 대한 욕망이 그토록 절실했다고 볼 수 있을 터. 소박한 삶의 가치를 생활로 펼칠 수 있으리라는 설렘에 행복했으리라.
농부는 나름의 소신에 따라 농사짓는 법을 선택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그 관계를 살펴서 짓는 농사, 농장에 필요한 종자, 퇴비, 에너지를 자급할 수 있는 농사야말로 산업문명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바탕이라고 배웠어요. 농사만이 아니라 사람도 순환되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남녀노소가 적절히 어울려 사는 마을이 가능하니까요.”
부부의 삶은 풀무학교 전공부에서의 배움과 간디의 스와라지 정신에 뿌리를 둔다. 그들이 사용하는 기계라고는 1년에 한말들이 3~4통의 기름을 쓰는 경운기와 트럭이 전부다. 사람이 끄는 쟁기질, 사이짓기, 섞어짓기, 돌려짓기를 실천한다. “깻묵, 쌀겨, 낙엽과 인분으로 퇴비를 만들어 써요. 모자라는 양만큼만 사서 쓰죠. 올해부터는 논 한다랑이와 밭 한뙈기는 퇴비도 넣지 않는 자연농법으로 해보려고요. 그동안 자신이 없어서 엄두를 못 냈는데 이제 해보렵니다.”
2011년 3월11일 일본 후쿠시마에서 원전이 터진 그날을 부부는 잊을 수 없다. “처음으로 빗물통 뚜껑을 닫은 날이죠. 빗물을 받아 밭에 물을 주고, 먹을거리를 씻고, 빨래도 하고 그랬는데 방사능이 섞여 있을지 모를 비라니 절망감이 들었어요.” 부인의 말을 남편이 이어받았다. “밭에 새싹이 돋아나는데 즐거워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저걸 먹을 수 있을까, 좌절감도 들고 무섭기도 했어요. 태풍이 덮쳐 전기가 끊겼을 때도 그렇게 막막하지는 않았는데….” 그 무렵 일본에서도 유기농 농민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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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덕으로 밥을 지으며 석유를 적게 쓰는 느린 삶을 실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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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삶의 고리를 끊어놓는 방사능. 피할 수 없는 공기와 물의 오염.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는 재난 앞에서 그들은 ‘어찌할 수 없는 것에 좌절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자’고 마음먹었다. 그즈음 태동하던 녹색당에 힘을 보태고, 학교급식의 방사능 식자재 사용을 제한하는 조례를 제정하자고 뛰어다니기도 했다. 정치적 행위에 나서기는 난생처음이었지만 마을공동체의 풀뿌리 자치를 꽃피우는 밑돌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다.
귀농해서 그렇게 4년을 살아왔다. 자립하는 소농의 삶을 실천하고, 마을공동체를 가꾸고, 마을의 삶을 바꾸는 일에도 나섰다. 혹자는 ‘이상주의일 뿐이야’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상을 향하여 발돋움하지 않는 현실이야말로 구차하고 갑갑한 것 아닐까. 간디는 자서전에 ‘나의 진리 실험 이야기’라는 제목을 달았다. 산업사회를 넘어설 대안을 일상에서 찾아가는 그의 삶 또한 진리 실험의 과정이리라.
장흥/글·사진 이현숙 자유기고가
출처 http://www.hani.co.kr/arti/culture/travel/62261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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