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9일 일요일

설문해자의 ‘생뚱 천문학’ 박살낸 갑골문 조각들

“유(有)는 ‘본래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인데 있는 경우’를 뜻한다”
선악(善惡) 미추(美醜) 난이(難易) 고저(高低) 장단(長短) 따위 서로 대립되는 단어로 짝을 이룬 말들 중에서도 가장 의미가 두드러지는 것이 유무(有無) 즉 있고 없음일 것입니다.
갑골문. 왼쪽 첫째 줄 첫째와 넷째 글자가 有다. 손을 뜻하는 우(又)의 옛글자와 사진에서 보는 글자가 갑골문에서 같은 有자로 쓰였다.

얼핏 ‘부자와 가난한 자’와 같은 정치경제학적 뉘앙스(nuance)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한번 접고 생각하면, ‘있고 없는 것’처럼 원초적(原初的)인 뜻이 다른 어디에 또 있을까요? 생(生)과 사(死)처럼 말이지요.  

갑골문시대 사람들은 어떤 대상과 일에 대해서도 선입견 없는 지혜로 그림을 그려 글자를 지었습니다. 사물(事物)의 본디를 담은 글자지요. 문자의 원형입니다. 우리가 한자라고 부르는 이 글자 하나하나에 안긴 옛 사람들의 멋진 마음씨가 우리를 즐겁게 하는 까닭입니다.

있을 유(有)자, 소리요소 또 우(又)와 뜻 요소 달 월(月)이 합쳐진 형성(形聲)문자입니다. 손 모양을 그린 又는 당연히 ‘손’의 뜻으로 쓰입니다. 옛 글자의 그림을 보면 더 분명하지요? ‘손 아래의 달’, 무슨 뜻일까요?

갑골문에서는 손을 그린 글자 又만으로 ‘있다’[有]는 뜻을 표현했습니다. 손은 무엇인가를 쥡니다. 청동기의 금문(金文), 진시황 때의 전문(篆文)에서 그 손은 고깃덩어리를 쥡니다. 먹기 위해, 또는 제사를 지내고자 고기를 쥔 손, ‘있다’는 뜻의 더 구체적인 그림을 만든 것입니다.
有자 옛글자의 변천(민중서림 한한대자전).

고기는 육(肉)입니다. 흔히 ‘육 달 월’이라고 부르는 부수자 月은 고기 肉자가 도안(圖案) 과정에서 보다 날씬하고 간단한 모양으로 변한 것입니다. 바로 有자의 月이 肉인 것입니다.

개[견(犬)] 불[화(火,)] 고기[육(肉, 月)] 글자로 ‘그러할 연(然)’을 빚어낸 것처럼 ‘있다’는 글자 有도 이렇듯 감각적이고 직설적으로 지었군요. 곰곰 생각할수록 그 비유(比喩)가 생생합니다.
손 모양이 또 우(又)자로 변하는 모양, ‘또’라는 새김에도 불구하고 ‘손’의 뜻으로 많이 쓰인다.

숫자 ‘0’을 만들어 인류에 기여한 인도 문명처럼, 동아시아의 고대 문명은 이런 문학적 회화(繪?)의 상상력으로 인류 중 가장 많은 인구(人口)가 쓰는 문자(文字)를 만든 것입니다. 오랜 세월의 더께가 크고 작은 변화를 빚었지만, 기원전 3500년경 시작되어 지금껏 사용되는 글자는 동아시아의 이 문자가 유일합니다. 기적(奇蹟)이지요.

‘있다’는 말 유(有)는 뜻이 확대되어 ‘존재(存在)하다’ ‘가지다’ ‘소지(所持)하다’ ‘독(獨)차지하다’ ‘넉넉하다’ ‘많다’ 등의 여러 의미를 구사(驅使)하게 됩니다. 특히 없을 무(無)와 짝지어 벌이는 변용(變容)은 눈여겨 볼 대목입니다. 시험에도 나오는 말들이지요.

입 있으되 할 말 없다-유구무언(有口無言), 돈 있으면 죄 안 된다-유전무죄(有錢無罪), 준비해야 걱정 없다-유비무환(有備無患), 이름 번듯 내용 꽝-유명무실(有名無實), 심증 뿐 증거 없다-유형무적(有形無跡), 있는지 없는지-유야무야(有耶無耶), 술 종결자-유주무량(有酒無量), 있으나 마나-유불여무(有不如無)... 어떻습니까, 마술 같지요?

그런데 문자학의 최고봉으로 숭앙(崇仰)받는 후한(後漢)의 허신(許愼)이 서기 100년에 펴낸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이 글자를 두고 알쏭달쏭하면서도 좀 생뚱맞은 소리를 합니다.
 - 유(有)는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불의유야(不宜有也)], 춘추전(春秋傳)에서 ‘해가 달에게 먹히는 때가 있다’[일월유식지(日月有食之)]고 했다.
청나라의 단옥재(段玉裁 1735~1815)는 설문해자를 해설한 ‘설문해자주(注)’에서 “유(有)는 ‘본래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인데 있는 경우’를 뜻한다. 인신(引伸)되어 ‘모든 있는 것’을 有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해[日]가 달[月]에게 먹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는 것입니다.(염정삼의 ‘설문해자주 부수자 역해’에서 인용)

허신도, 단옥재도 1900년경부터 발굴되기 시작한 갑골문(甲骨文)이 가르쳐주는 ‘문자 생성(生成)의 비밀’을 몰랐던 것입니다. 다만 기록으로 전해지는 금문, 전문, 예서(隸書) 등의 글자 모양만을 참조(參照)한 결과 그런 ‘생뚱 천문학’을 세웠겠습니다. 그래도 상상력 하나는 굉장하군요.
갑골문 유물들은 이렇게, 有자처럼, 당시까지의 문자학을 뿌리까지 뒤흔들었습니다.
<토막해설손이 들어간 좌우 글자의 속뜻왼쪽 좌(左)는 왼손에 공구(工具)를 쥔 모양. 옛글자를 보면 부수자인 工을 제외한 부분이 왼손임을 알 수 있다. 공구로 ‘돕는다’는 뜻으로 인신된다. 후에 돕는다는 좌(佐)자가 따로 만들어지나, 左만으로도 돕는다는 뜻이다.
좌(左)와 우(右)의 옛 글자.

















오른쪽 우(右)는 오른손 아래에 입[구(口)]이 붙었다. 그 입은 신(神)에게 기도하는 말이다. ‘신의 도움’이라는 뜻의 우(祐)자의 원래 글자다. 당연히 右도 祐도 돕는다는 뜻이다. 먹는 입이라고 풀기도 한다.
좌와 우 모두 돕는다는 뜻이다. 흔히 좌는 진보(進步) 좌익(左翼), 우는 보수(保守) 우익이라거나 좌는 그르고, 우는 옳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학적’으로 근거가 없다. 익(翼)은 날개, 날개는 좌우 대칭이라야 날 수 있다. 서로 돕는 것이다.
강상헌 논설주간

http://ooso.ingopress.com/1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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