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사업을 부대한 농촌문고 창설의 급무(9)
강진국
8. 농촌문고의 직능과 위정자의 책무
원래 학교(學校)와 문고(文庫)는 불가분할 성질의 것으로 양자가 접근하여야 그 목적은 호상조장(互相助長)되고 그 사명은 연몌발휘(連袂發揮)되어 교육의 온전한 성과를 기대할 수 잇나니 이런 의미에서 여기 설계한 농촌문고는 그 규모와 조직은 비록 미충(微衷)하나마 정히 사도(斯道)의 이상적 기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야 이 농촌문고는 또 불원장래할 1면수교(一面數校) 내지 1리동1교(一里洞一校)의 보통학교 건설의 기초가 되고 또 이 운동을 촉진하는 전초(前哨)가 될 것이다.
또 이 문고를 중심으로 한 소비조합이며 농구(農具)의 공동이용기관의 부설은 나날이 쇠잔하여 가는 우리 농민경제에 막대한 복리를 줄 뿐만 아니라 생사기로의 수기(數奇)한 운명 속에서 한없이 악랄하고 수 없이 가혹한 시련에 짜들여온 남어지 걸핏하면 극단의 이기주의와 또 투쟁적 경향이 파심(頗甚)하여 가는 그들 농어산촌민에게 공존공영(共存共榮)의 정신 배양과 그 실훈(實訓)을 교시함이 불소(不少)할지니 그 과반이 농민대중으로 구성된 우리 민족 사업에 이보다 더 유익하고도 귀중한 사명을 가진 사업이 또 어디 잇으랴. 근자에 제창되는 물심동체주의(物心同體主義)의 이상(理想)은 이 사업에서 구현되지 아니 하는가!
이런 점을 보아서도 위정자는 맛당히 이 사업을 솔선 장려하고 건설할 책무가 잇다 하겠다.
더구나 지방군수들은 이 사업 실현상 가장 유리한 지위에 처하여 가장 만흔 편의와 기회를 장악하고 잇다 하겟다. 즉 관하(管下)의 면장과 구장을 독려하는 일방(一方) 지방유지를 설복하야 이 사업 창설에 노력함이 잇다면 그리 힘들고 어려운 일은 아닐 것같이도 상상된다. 그리한다면 일군일군(一郡一郡)을 단일체로 한 지도원 양성 문제와 이 사업이 확대되는 날의 국고(國庫) 보조(補助)도 용이히 해결될지니 이 최선의 첩경과 건□을 가진 군수는 이 농촌문고 사업 건설의 당위성을 부담한 도덕적 의무를 가진 자라 하겟다. 여긔 제첨(諸僉)의 재음미와 궐기를 촉(促)하야 마지 안는 바이다.
9. 도시 투자가의 방면(方面) 전향(轉向)과 언론기관에 일 제언
마주막으로 문화 투자가, 특히 도시 방면의 문화 투자가에게 투자 방면 전향 즉 농어산촌 방면의 문화투자에로 전향하기를 권원(勸願)하는 동시에 신문 기타 언론기관에게 일언(一言) 제의(提議)하고저 한다.
근일 문화사업 투자가 거이 도시급 준 도시지대에 집중하는 경향이 농후하며 심하야 경성(京城)과 같은 조선 제일의 도시-문명한 외국에 비하여도 그리 큰 손색이 없을 문화도시(文化都市)에 잇어는 이 방면의 투자가 접종(接踵)하야 출현하니 마치 투자경쟁의 감이 불무(不無)하다. 더욱히 지방인사가 자기네 향촌의 암담한 문화와 황무한 토지에는 돈착(頓着)이 없이 또 그 가족 동양(同樣)의 소작인의 쇠잔곤궁과 그 자녀들의 문맹 우매는 시안(視眼)에 두지 안코 불순한 명예와 무모한 허영에 정관(正觀)을 잃고 도시투자(都市投資)에 흥미를 느끼는 양은 이성 잇는 방관자로 하여금 오히려 연민지정을 포회(包懷)케 하는 일이 잇다. 예하면 함경도 어떤 부자가 파고다 공원에 고성기 라디오를 기증하야 인접한 도서관(圖書館)의 열심한 열람자(閱覽者)들의 자자한 원성을 듣는 종류도 그 중의 하나이겟다.
이런 동기는 역시 허영과 불순한 명이욕(名利慾)에 밭은 까닭이겟으며 이것을 자극한 것은 안전사실(眼前事實)과 지척기사(咫尺記事)만 방대히 취급한 도시 중심의 신문 기타 언론기관의 불공평한 찬양에 다대한 원인이 잇을 것이다. 이 점 특히 신문 기타 언론기관에게 대하야 재고(再考)를 촉(促)하는 동시에 문화투자의 기부행위에 관(關)하는 한, 동일한 방법 아니 차라리 지방의 것을 더 크게 찬양하야 차종(此種)의 투자가 지방 아니 그들의 향촌(鄕村)에 귀(歸)하도록 장려할 것이다. 그리하야 산간 벽지에 헤매는 무사가련(無事可憐)한 자녀들을 구제할지며 투자가로 하여금 참다운 명성과 그 장구한 존속은 지하에 뿌리깊이 백이고 지상에가지 넓이 퍼질 농촌문고 창설사업에 투자함에 잇음을 교시하여 주기를 바래는 바이다.
10. 결론
우리는 이상에 술(述)한 대자본의 투하를 기걸하야 말지 안는 한편 이 천혜(天惠)의 강하(降下)만 합장기원할 수 없는 일이다.
먼저 농촌의 지도청년은 전자에 술한 아키라기(明木) 촌, 이토(伊藤) 씨의 문고 경영 정신과 그 수단을 배우고 보광리(寶光里) 이용조합(利用組合)의 김인흥(金仁興) 씨의 수완과 방법을 수작(酬酌)하야 볼 것이며.
군수 기타 위정자는 그 부여된 요직을 이용하야 이 사업의 실현을 위하야 노력함이 잇기를 기걸(祈乞)하여 말지 안으며 농구 기타 농촌 수용품 제조 혹은 취인(取引) 회사는 그 상품의 판로를 맨맨기 위하여서라도 그 이익의 일부를 할양(割讓)하야 농촌문고 건설 자금에 기여할 것이오.
신문 잡지 등 기타 언론기관은 그 광대한 배경을 이용하여 이 사업의 건설과 조장(助長)을 최촉(催促)하고 선전하야.
각기의 기능과 역량을 다하야 민족문화 개척운동이오 농촌개발운동인 이 농촌사업을 부대(附帶)한 농촌문고 창설 사업에 공동 협력함이 잇기를 바라고 언제나 이 사업에 직접 투족(投足)할 농촌 청년에게 더 한번 궐기를 최촉(催促)하면서 이 붓을 놓는다.
(끝)
(이 글을 마침에 제(際)하야 또 다시 이 사업의 설계와 경영법에 관한 것을 축차(逐次) 발표하고저 한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한 문의를 하고저 하는 분은 경성부립도서관(京城府立圖書館) 종로분관(鐘路分館)의 필자(筆者)에게 직접 상의하여 주기를 바란다.)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과 관련하여, 위키 실록사전 '경성도서관' 참조. (인용 및 정리 2023년 4월 29일. '경성문고'를 중심으로 기술한 것으로 보이는 이 기사의 논의를 모두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야마구치 세이가 설립했다는 경성문고/경성도서관, 김윤식 윤익선 윤양구 등이 설립했다는 경성도서관, 이범승이 세웠다는 경성도서관, 이 3개의 도서관을 마치 하나의 도서관의 변천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런 것입니까?)
1. 경성도서관(京城圖書館)은 일본인상업회의소 서기장 야마구치 세이[山口精]가 사재를 털어 설립한 도서관으로 1908년 9월 ‘경성문고’라는 이름으로 처음 설립되었다. 경성문고는 서울 수정(壽町)에 있던 일본인상업회의소 내에 설립되었는데, 1909년 2월 개관하여 일반에 무료로 공개되었다. 이용객이 늘어나면서 서고와 열람실이 좁아져 1911년 8월 남미창정(南米倉町: 현 남창동)으로 이전·신축하여 ‘경성도서관’으로 개칭하였다. 야마구치의 경성도서관은 1919년 경영난으로 폐관했는데, 그때까지 야마구치 개인의 사재로 운영된 사립도서관으로 당시 한국에서는 최대 규모였다.
2. 경성도서관은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한국 도서관사상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첫째, 이 도서관은 창립 당초부터 참고도서관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야마구치 자신도 『경성도서관개황(京城圖書館槪況)』에서 “산업 및 상공업 조사의 편의를 제공할 목적으로 창설했다.”고 서술하였다. 실제로 야마구치 세이는 『조선산업지(朝鮮産業誌)』의 저자이기도 했다. 이 책은 당시 한국의 농업·상업·공업·산림·광업·어업·통화·금융·교통·운수에 관한 각지의 사정을 조사하여 실은 것인데, 상·중·하 세 권으로 이루어졌다. 야마구치 세이는 1911년 7월 5일에 이 책 10부를 경성도서관 이름으로 순종황제에게 바쳤다(『순종실록부록』 4년 7월 5일). 이에 대해 순종황제는 7월 13일 경성도서관에 기부금 150원을 하사하였다(『순종실록부록』 4년 7월 13일).
둘째, 실제의 도서관 활동도 상당히 활발했다. 『경성도서관개황』의 1915년도 통계에 의하면, 개관 일수는 연 303일, 입관자 수 5,420인, 열람 책 수 2만 637책에 달했다. 이용자 중 8할이 일본인, 2할이 한국인이었다. 또한 이 도서관은 1912년에 『경성도서관도서월보』라는 홍보지를 발행하였는데, 이것은 조선 최초의 도서관보이기도 했다.
셋째, 이 도서관은 당시 최대의 장서 수를 보유하였고, 장서 내용도 충실했다. 1919년 폐관 당시, 장서 수가 1만 6,000권에 달하였고, 참고 도서류, 관청 자료 등 비시판(非市販) 자료를 다수 소장하고 있었다. 그 장서의 대부분이 1921년 봄에 김윤식(金允植)·윤익선(尹益善)·윤양구(尹亮求) 등에 의해 설립된 경성도서관, 즉 취운정도서관(翠雲亭圖書館)으로 계승되었다. 취운정도서관에 대한 일반의 기부금은 1921년 2월 당시 약 5,300원에 달했고, 각계에서의 도서 기증도 계속되었다. 1921년 2월 조선도서주식회사도 경성도서관에 자사 발행 도서 300권을 기부하였다. 당시 장서 수는 약 3만 5,000권에 달했다고 한다. 부인독서실을 따로 설치했으며 종람 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였다. 그 장서의 일부가 현재 서울특별시립 종로도서관 장서로 승계되었다.
3. 1922년 1월 6일에는 교토[京都]제국대학을 졸업한 이범승(李範昇)이 탑골공원 뒤에 있는 전 양악대(洋樂隊) 자리에 경성도서관을 개관하였다. 개관에 앞서 1921년 9월 10일에는 신문잡지 종람소(縱覽所)를 공개하였다. 여기에는 40여 종의 신문과 150종의 잡지를 비치했다. 매일 수백 명의 관람자가 이용하여 9월 10일 개관 이후 12월 초까지 그 수가 총 9,000여 명에 달했다.
4. 이범승은 1921년 봄에 개관한 취운정도서관을 인수하여 경성도서관 분실로 사용하기로 했는데, 여기에는 한문 서적을 주로 비치했다. 본관에는 신간 서적으로만 5,000여 권을 비치했다. 1922년 1월 6일 개관 당일에는 무료입장이었으나 1월 7일부터는 입관료로 1인당 2전을 받았다. 한달 표는 40전이었다. 개관 시간은 오전 10부터 오후 5시까지였다. 1922년부터 야간개관도 계획하였으며, 경성도서관 주최로 시민 강좌나 전문 학술 강연, 그리고 순회문고 제도도 실시할 예정이었다. 1923년 4월 1일부터는 개관 시간이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로 변경되었고, 수요일은 정기 휴관일로 지정하였다.
5. 1922년 6월 24일 휘문고등학교 총장 민영휘(閔泳徽)가 기부한 1만 원과 관민의 기부금을 받아 이해 겨울부터 신관 건축에 착수하여 1923년 7월 28일 낙성식을 가졌다. 종로 인사동에 위치한 신관은 건평 130여 평으로 1층 오른쪽에는 백여 종의 신문 잡지를 갖추어놓은 신문실(新聞室)이 있었고, 왼쪽에는 9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열람실이 있었다. 1층과 3층의 일부, 그리고 2층 전부는 7,200권의 신간서와 2,300권의 고서적을 보기 쉽게 진열해놓았다. 그 밖에 특별실과 사무실이 있었다. 구관은 아동관으로 수리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경성도서관은 연 9,000원에서 1만여 원에 달하는 유지 경비와 그동안 도서관 운영을 위해 은행에서 차입한 부채 3만 원을 감당하지 못하여 1924년 10월 1일부터 수차례에 걸쳐 무기 휴관에 들어갔다. 일시적으로 건축비와 도서구입비를 지원했던 민영휘가 유지 경비를 담당하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이에 경성부에서 매입하여 부영도서관으로 운영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1925년 2월부터 일시적으로 경성부의 보조로 개관하기도 했다.
6. 결국 1926년 3월 25일에 경성부에 양도되어 4월 1일부터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이 되었다. 후임 관장으로는 이범승의 친척인 이긍종(李肯鍾)이 부임하였고, 직원들이 한국인들만으로 이루어져 민족 도서관으로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7. 1945년 9월 18일에는 서울시립 종로도서관이 되었다.
- 『동아일보』 1921년 2월 25일자; 1921년 3월 1일자; 1921년 12월 6일자; 1921년 12월 12일자;1921년 12월 31일자; 1922년 1월 7일자; 1922년 1월 17일자; 1922년 3월 17일자; 1922년 6월 26일자;1922년 12월 31일자; 1923년 4월 1일자;1923년 6월 11일자;1923년 7월 29일자;1924년 1월 27일자;1924년 4월 7일자;1924년 10월 1일자; 1925년 1월 30일자;1925년 3월 19일자;1926년 4월 24일자
- 山口精, 『朝鮮産業誌』 上·中·下卷, 寶文館, 1910-1911(복간 民俗苑, 1992).
- 山口精, 『京城圖書館槪況』, 京城圖書館, 1916.
- 宇治鄕毅, 「近代韓國公共圖書館史の硏究ー開花期から1920年代までー」, 『參考書誌硏究』 第30號, 1985.
- 서울시립 종로도서관 홈페이지, https://jnlib.sen.go.kr/jnlib/index.do
- “이긍종(李肯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38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