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리가 날로 盛해지다
英國 수도의 時事新報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이 나라에는 각종 인민들이 제각기 一黨을 수립하여 서로 단결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때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모두 생각하기를 『이 나라 국민들이 서로 단합되어 분리되지 않는 것을 보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려야 할지 도저히 알지 못하겠다』 라고 하였다. 그 뒤 이 나라 정부에서는 단합에 마음을 쏟고 거친 국민을 달래어 한사람의 통치자의 명령에 순응케 하여 점차 開化로 나가게 하고, 각방으로 富强을 꾀하였더니 오늘날에는 드디어 모든 국가들과 어깨를 겨루며 같이 달리고 잇다. 따라서 이 나라 정부가 그 마음을 수고롭히고 나라를 생각함이 지극하였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지금 이 나라의 당시 실정을 기록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採得토록 하겠다. 서기 1877년경에 이 나라의 歲出은 항상 歲入보다 많았는데 그 5년 뒤에는 세입이 꼭 세출보다 많게 되었으니 여기에서 해마다 늘어난 금액을 평균해 보면 60만파운드에 달한다. 대체로 이 나라는 일찍이 兵卒들이 너무 많아서 한해의 수입으로는 이들을 먹이고 입히기에 충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兵數를 줄여서 비용을 절약하고 실질적인 면에 주력하여 虛名같은 것에는 힘쓰지 않았다.
또 그네들의 兵制에 관해서 말해보면 이름이 軍籍에 예속되어 있는 자가 무려 75만명이나 되었으나 참으로 전쟁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반수도 되지 못했다. 그 뒤 이 나라에서는 徵兵法을 만들어 전국의 남자는 모두 兵役을 복무하게 하여 어느 곳의 젊은이든 입장을 같게 했으며, 어느 곳의 농부나 상인들도 역시 조건이 같도록 하였던 것이다. 도 1878년부터 兵卒들에게 모두 읽고 쓰고 계산하는 세가지 과목을 학습케 하였기 때문에 敎化가 크게 펴졌으며 민심도 단결되었다.
그들의 海軍에 대해서 말해보면 지금부터 10년 전에 어떤 海軍士官 한사람이 스스로 책 1권을 저술하여 이 나라의 海防에 있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을 논했다. 마침내 이 나라의 君民은 한마음으로 분발하여 군함을 많이 만들게 되었으며 그중에는 4, 5척의 鐵甲艦도 있어 그 편하고 견고하기는 참으로 천하 어느 곳에서도 비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 나라의 海軍卿인 亞理頓(Ariton)은 일찍이 큰소리를 치며 『英國을 제외하고는 우리 나라 해군이 이 천하에서 제일 강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역시 거짓이 아니다. 이 나라의 인구는 1871년에 약 2천6백79만2천3백54명이었으며 81년에는 약 2천8백45만2천6백39명이었으니 71년에 비하면 1백16만2백85명이나 증가했으며 또 10년 동안에 外國으로부터 수입금액의 증가액은 약 4백만파운드이며 수출금액의 증가액 역시 약 3백만파운드나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국내의 제조업이 날로 왕성하게 진보하였기 때문이다. 철도는 1861년에 8백20마일이던 것이 71년에는 4천3백40마일이고 그뒤 1878년에는 이 나라의 議院에서 새로이 規則을 정하되 앞으로 15년사이에 3천7백39마일의 철도를 가설키로 기약했으나 동 18년에 벌써 철도의 총 길이가 5천7백마일이었고 준공하지 못한 것이 2천여마일로 앞으로 國債를 모집하여 그 役事를 끝낼 것이라 한다. 또 1869년에 郵便局은 1천2백50곳이며 電信局은 6백10곳이던 것이 동 81년에 와서는 우편국이 4천2곳이나 되었으며 電信局 역시 1천9백28곳이나 되었다. 學校도 적게는 鄕邑에서부터 크게는 都府에까지 모두 학교를 설립하여 그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현재 소학교의 생도는 약 2백만명이고 고등학교 생도는 3만6천명이며, 기술학교 생도는 1만9천명 정도이고 대학교는 26곳에 설립되어 있어 그 생도의 숫자는 항상 1만3천명을 넘고 있다. 이밖에도 書庫를 설치하여 국내에 있는 무식하고 고루한 사람에게 모두 관람하도록 하고 있으니 해마다 여기에서 책을 보는 사람의 合計는 77만명이나 되며 또 그 책들이 모두 農桑에 유익한 論說에 해당된다고 한다. 대체로 이태리는 본래 文을 소중히 하는 나라가 아니었는데 오늘날에 와서 곧 書庫를 설치하였으니 이것은 天下文明의 運數는 오직 임금과 大臣들이 敎化를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지 중국이나 외국에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中國의 문명이 西國보다 앞섰던 것은 4천년 전의 堯舞때의 治民敎化와 夏·殷·周 때의 善政으로 모두 그때 그때의 당연함을 따랐기 때문에 백성들을 태평의 땅에 노닐게 하고 국가를 반석같이 안전한 데 자리하게 했었다. 슬프도다, 文武王이 엮은 책들이나 周公·孔子의 저술들이 秦代에 와서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이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둔 자가 있어 어쩌다 밑에서부터 배워서 위로 발전하려 해도 보이는 것이라곤 물건들 뿐이었다. 天子가 아니면 법을 제정하거나 文을 상고하거나 예의를 의논함에 있어 못하게 되었으니 이때에 와서 온세상의 人倫이 문란해지고 국가의 바른 法則이 파괴되고 말았으니 이로부터 뒷 이야기는 할 수 없으나 그래도 옛시절이 그렇게도 멀지 않았고 또한 奏의 無道함을 보아왔기 때문에 先聖을 공부한 학술자를 지방이나 중앙을 막론하고 뽑아 올리게 함으로써 다소 옛날제도를 회복하여 3대의 끼친 풍물을 형용이라도 내었지만 漢 이후로는 搢의 老子·莊子등의 허황한 말들이나 唐의 詩賦 따위는 결국 虛文만 숭상하고 實學에 힘쓰지 않고 章句와 句讀에만 부질없이 아름답게 꾸미려 하고 숨은 뜻만 찾아 내려고만 하였으니 아무리 재주가 屈原·宋玉을 따를만 하고 技藝가 章胡를 쫓을만 하더라도 결국은 그것을 써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이들을 대가로 받들고 큰 벼슬을 주어 흠앙했으니 마침내 천하의 재주 있고 지혜 있는 학자들로 하여금 그 총명함을 고루하게 하고 그 명석함을 막히게 하여 試帖이나 時文의 미사여구나 다듬으면서 늙어 죽도록 깨닫지 못하고, 이 천하의 학자들로 하여금 참다운 학문의 요점을 들어보지 못하게 하고 천하의 백성들에게는 참다운 정치의 은택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그저 꽃 피고 잎 떨어지면 봄 가을이 지났고 달 지고 해 뜨면 주야가 바뀌었구나로 생각할 정도니 캄캄하고 막혀 허우적거리며 고루에 잠겨 있은지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천년이나 된 셈이다. 뜻하지 않게 하루아침에 저 歐洲 각국은 과학에 대한 학문을 열심히 강구하고 천지 이치의 근원을 모조리 탐구하여 이치를 미루어 器械를 제조하고 기계를 만들어서 국가를 일으키게 되었으니 이제는 自守에 만족하지 않고 먼 책략에도 걱정 없게 되었다. 電線으로써 通信을 하고 汽船으로 항해하고 총포로 위엄을 떨치고 化學으로 온갖 것을 만들어서 세계만방에 서로 통하지 않는 곳 없이 백방으로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슬프다. 지난날 實學에는 힘쓰지 않고 한갓 虛文만 숭상한 자들이여. 몸둘바를 알지 못하고 당황하고 엇갈리기만 하여 때로는 모진 모욕을 당하고 때로는 제물로 돌아가도 날이면 날마다 그들을 제지할 도리가 없게 되어 끝내는 歐洲人들로 하여금 천하의 10분의 8에 퍼져서 장악하게 하였구나.
시험삼아 全地球의 육지를 논해보면 51兆現方英里(평방마일)인데 그 가운데 40兆평방마일은 벌써 구주사람들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며 水路로 말한다 해도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으니 대략 계산해도 1백억평방마일은 될 것이다. 海外大洋에 구주 輪船 등의 왕래를 제외한다면 타국의 船隻은 몇척밖에 안되는 셈이다. 또 육지에는 大洲가 5개 있는데 그것을 동서로 분리한다면 서쪽의 大洲는 바로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일 것이다.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구주에서 온 사람들이다. 동쪽에 있는 오세아니아洲에는 완전히 구주인이 거주하며 아프리카洲에도 摩落哥(모로코)등의 小國을 제외하고는 역시 모두 歐洲人의 소유인 것이다. 현재 아시아의 북쪽의 반 정도도 모두 歐洲에 속하며 남쪽의 印度 역시 구주의 속국이다. 그러니 전지구를 통해 봐도 구주의 管掌에 속해 있지 않은 곳은 겨우 10분의 2 정도이고 또 저 波斯(페르시아)·土耳其(터키) 등의 국가에서도 모두들 구주인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잇따른 명령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아, 저 구주사람들이 천하에 분포된 것을 살펴보면 그 뜻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저들은 寸을 얻으면 尺을 생각해서 어디까지 가서 그치고자 할지 짐작으로는 알 수 없으니 똑바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모쪼록 그들을 함부로 봐서는 알될 것이다. 그래도 전지구를 통틀어 논해 보면 구주사람들이 亞洲에 미치지 못한 것이 오히려 많은 편이다. 살펴보면 구라파는 아시아와 연접해 있으면서 아시아의 西北에 자리잡고 있으며 서로 경계되는 곳으로 북으로는 北氷洋이고 동남으로는 烏拉山(우랄산)이며 우랄산은 裏海(카스피해)와 함께 곧 歐洲와 亞細亞를 분계하는 곳이다. 남으로는 高夾蘇(코카서스)山과 黑海가 역시 구주와 아시아를 분계하는 곳이다. 또 남으로 地中海는 바로 구주와 아프리카를 분계하는 곳이기도 하며 서쪽으로는 大西洋이다. 이 땅의 제일 긴 곳은 英里(마일)로 계산하면 3천3백72마일이며 땅의 제일 넓은 곳은 2천4백마일이니 歐洲의 넓이를 계산해도 3백80만평방마일에 불과하여 전지구로 계산해보면 겨우 14분의 1일 뿐이고 亞細亞에 비교하면 5분의 1 남짓하다. 그밖의 3면은 모두 바다로 싸여 있으나 海面으로 논하면 통계 2만40마일이다. 또 기후를 들어 말한다면 東洋諸國은 모두 北緯 20도선의 사이에 있고 구주 각국은 모두 北緯 50도선 사이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天時와 地氣는 동양보다 추운편이다. 그래서 物産 역시 동양과는 다르며 오직 남쪽에서만 中國과 서로 비슷한 것이 있다. 耕種할 수 있는 땅을 계산해 보면 1백분의 20~30의 땅은 사막이 아니면 돌이라 농사하기 매우 어렵거니와 북쪽에는 極寒하여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다. 또 樹木이 숲을 형성하고 있는 곳도 1백분 중의 겨우 40정도이고 어떤 곳에서 이미 耕種을 하고 牧畜을 하고 있는 곳이라 해도 역시 1백분의 36에 지나지 못한다. 동양 제국 같은 곳은 토지만 구주보다 배가 될 뿐만 아니라 그 物産의 번성함이나 인민의 多衆함이 실지로 구주보다 훨씬 앞선 위치에 있다. 그러나 亞洲의 물산과 人數가 이처럼 훌륭하고 이처럼 많다 해도 유독 富强은 구주에 빼앗겨서 참혹한 모욕을 당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이유를 궁구해보면 저들이 實學을 일 삼을 때 우리는 虛文만 숭상했음이다. 만일 이같은 폐단을 바로 잡고 또 별도로 유신을 도모하여 안으로 국가를 굳건하게 하고 밖으로 적을 막고자 한다면 一切 虛僞의 습관을 깨끗이 씻고 물리칠 것이며 오직 사물의 진리를 일삼아서 오늘이나 내일이나 이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면 몇십년 뒤에는 반드시 西國을 능가해서 앞설 것이다. 여기에서 實學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과학 한가지 그것이다. 만약 동양 모든 국가의 재주 있는 학자들에게 여기에 종사할 조건을 제공해 주고 연구해 가게 한다면 이것은 곧 동양제국이 약함에서 벗어나서 강함으로 옮아가는 일대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東人으로서 西學을 배우는 것은 夷狄의 것을 施用하여 華夏를 변하게 한다는 것으로 좋지 않다고 말하고 있으니 슬프다. 이렇게 말한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두서너집 되는 마을에서 겨울에 화로불 앞에서 學究하는 說인 것이다. 저 天文과 曆算法은 소급하면 羲和氏에게서 창시되었으며 格致學도 大學에 나타나 있는데도 특히 후세들이 등한히 여겨서 講求치 않았으니 저들 西人은 이 쪽의 자료에서 단서를 얻어서 마음을 가다듬어 實理를 구해서 기술의 정교함을 완성하고 富强의 실효를 거두게 되었다. 만약 이 학문이 한번 성해져서 人倫이 막혀서 사방에 퍼지지 못한다면 마땅히 꺼리고 피할 것이며 또 몰아서 쫓아내어 거기에는 눈도 돌리지 못하게 할 것이며 마음조차 두지 못하게 하여 마치 氷炭과 水火가 서로 반대되듯 한다 해도 도한 아주 심한 표현이 아닐 것이지만 만약 이 학문이 한번 번창하여 국가가 부강해지고 人倫에도 손상됨이 없고 또한 紀綱이 펴질 수 있다면 허벅지를 찌르고 얼굴에 물을 뿌려가면서 하더라도 오히려 날짜가 부족하여 늙음이 닥쳐오는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西學을 한다는 지탄은 옳지 않으며 오히려 천하의 뜻 있는 학자라 할 것이며 忠君愛國하는 무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나로서는 天文 曆算 格致學은 곧 천하의 公學이고 西學이 아니며 또한 오늘날 절실히 쓰이는 학문이며 道를 해롭히는 異端에 비할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東人들은 도리어 西學이라고 지목하고 있으니 대관절 얼마나 잘못된 것이겠는가. 繙譯 한가지만 하더라도 각국의 言語文字를 함께 열거해서 말한 것이고 西學만 완전히 지목한 것은 아니다. 傳에서도 사방국가에서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으며 孔子도 사방 모든 곳을 한결같이 상대해야 한다고 말했으니 그 당시에 4국이라 말함은 齊·秦·吳·楚에 불과했을 뿐이지만 오늘날은 세계 만국이 혼동되어 있으니 英國·프랑스·러시아·美國 같은 나라들이 바로 오늘날의 齊·秦·吳·楚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碩學들은 재주를 통해서 마땅히 강구하고 빠짐없이 相對하여 재주를 넓히고 같은 문학의 문화를 받아들일 것이지 어찌 소문에만 빠져 구제해야 할 것에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이태리 같은 곳에서도 오랫동안 약하고 약해서 바쁜 명령에 겨를이 없으면서도 곧 그 나라의 君과 大臣이 마음을 분발하여 관습을 물리치고 천하의 奇書들을 찾아 모으고 國中의 奇材를 망라하였으며 저 총포와 기계, 輪車, 철로, 전선, 通標 등과 개간하는 기계와 화학의 藥材를 모두 혁신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민심을 올바르게 인도할 수 있었고 국가의 기반을 공고히 하게 되었으니 이렇게 된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書庫를 설치하여 實學을 힘써 숭배하고 虛文은 거들떠 보지 않고 옛것을 상고하여 현재를 넓히고 앞을 깨닫고 뒤를 깨닫게 해서 정밀한 가운데 더욱 정밀함을 구했으며 솜씨 밖에서 또 솜씨가 나오게끔 하여 修身治家에서 시작하여 愛國忠君하는 데까지 이르도록 한결같이 그치지 않게 하였던 것이다.
저들 이태리는 바로 歐洲의 一國으로 그들의 風氣가 살아난 것을 거슬러 보면 오늘날까지 3, 4백년이지만 문학의 번성함이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우리 東洋 모든 나라들의 역사는 구주보다 앞선지가 이미 수천년이나 오래되었는데도 당연히 나아야할 우리가 저들만 못한대서야. 그러나 동양 제국의 서적이 풍부하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龍圖龜書[周易]는 그 기운이 참으로 넓고 아득한데 속하며 皇墳帝典[書典]은 연대에서 실지로 너무 멀거니와 삼대 이후로 諸子들의 많은 책과 六經 以外에도 한없는 책들이 쏟아져 나왔으니 옛날 장서의 많음이 五車나 된다던가. 大酉·小酉의 두 山 같다고 하는 盛大한 말도 있었으며 후세에 書目의 구별에서는 대개 七略[前漢때 劉向의 別錄本인데 六藝略, 諸子略, 詩賦略, 兵書略, 術數略, 方技略]과 四部[經部, 史部, 子部, 集部의 全書]의 撰을 최고로 치거니와 歷代 藏書家의 簡帙과 各家의 編修된 書目같은 것은 일일이 열거할 겨를도 없는데 어떻게 번거롭게 기록할 수 있겠는가. 오직 이 세대에는 治亂이 서로 잇달아 일어나서 그로 해서 도서 역시 모이거나 흩어짐이 일정치 못했으니 저 開元年間의 四庫나 乾隆年間의 四閣같은 곳에는 선반마다 구석마다 수집해 놓은 것이 지극히 풍부하고 광대했으며 분류하고 비례해 놓은 것도 역시 詳悉完全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책들은 관가에서 특별히 뽑아보는데 충당됐을 뿐 한번도 공중에게 공개되어 열람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저 서양 각국 같은 데서는 반드시 博物館을 두어서 金石과 寶珠와 禽獸, 虫魚, 나아가서는 세상의 古器와 공이 있었던 훌륭한 도구 등을 수집해 놓았으며, 또 박람회를 열어서 百工들의 기술과 産物로서 국가에 유익한 것을 다 모아서 모두 대중에게 공개하여 열람케하고, 書庫를 설치하여 內外古今의 서적을 널리 모아들여서 역시 內外貴賤할 것 없이 두루 살펴볼 수 있도록 백방주선했기 때문에 著作者들도 古今을 참고하고 內外를 비교할 수 있어 공중들에게도 반드시 博識擴智의 보탬이 있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저 기둥이 묻히도록 간수해 놓고, 또는 소가 끌어도 땀을 낼 만큼 모아 놓고도 그저 벌레들의 서식처나 되게하는 따위와 어떻게 수준이 같다고 말하겠는가.
근래에 듣기로는 日本 역시 明治 5년 8월에 처음으로 西洋書庫의 예를 본받아 東京書籍觀을 創設하여 내외 고금의 도서를 널리 구해서 근래에는 책을 書籍觀과 분리하고 세곳에 비치하여 한곳은 淺草文庫라 하고 다른 곳은 東京圖書館·上野博物館이라고 하여 그곳에 늘 監吏를 두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누구를 막론하고 들어가서 두루 살펴 볼 수 있도록 공개해 두었다. 그런데 그 서고내에는 다시 몇 개의 室이 있는데 그것에 漢籍室·洋籍室·佛籍室·圖書室·算書室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다시 실마다 몇 개의 部를 설치하여 政部·農部·集部·詩部로 일일이 部를 나누어서 類로써 분별하여 놓았다. 이렇기 때문에 관람자 중에서 政治部分을 볼 뜻이 있는 자는 各室의 政部에만 돌아가며 열람하고 農耕에 대한 것을 보고자 하면 역시 각실의 農部를 巡覽케 하였다. 참으로 이렇게만 하고 보면 內外古今의 도리를 통달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또 특별히 각 서고마다 반드시 新報室을 두고 내외 모든 신보를 수집해 두었기 때문에 일단 이 고에 들어갔다 하면 천하의 형세를 알아보는데 또한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참으로 국민을 이끌어 주고 교화하는 훌륭한 제도임에 틀림없다. 직장에 알맞은 적임자라면 반드시 採用할 것이고 국가발전에 필요한 훌륭한 제도라면 본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이태리가 날로 盛해지다", 한성순보[漢城旬報], 18840327
*편집자 주석: 일본에 '도서관이라는 제도'가 소개된 것은 후쿠자와 유키지(福澤諭吉, 1835~ 1901)의 『서양사정』(1866/1870년)에 의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 책에서 “서양 여러 나라의 도시에는 문고文庫가 있는데 ’비블리오테키ビブリオテーキ’라고 부른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당시, 오늘날 우리가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단어를 어떻게 표기할 것인가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교토(京都)에서는 ‘집서원’(集書院)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후쿠자와 유키치가 세웠다고 하는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서는 정작 ‘서관’(書館)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도서관 학계에서는 최초의 근대도서관이 1872년(메이지明治 5년)에 유시마 세이도(湯島聖堂, Yushima Seido, 간다 신사 부근에 있음) 안에 문부성이 설립한 ‘서적관’(書籍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성순보>의 이 기사는 이 '서적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근래에 듣기로는 日本 역시 明治 5년 8월에 처음으로 西洋書庫의 예를 본받아 東京書籍觀을 創設하여"
후쿠자와 유키치가 '문고'라는 용어로 도서관을 소개한 때로부터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았던 시기입니다. 이 서적관은 후쿠자와의 ‘문고’라는 용어 대신에 ‘서적관’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후 1870년대 일본에서는 이른바 ‘서적관 붐’(書籍館ブーム)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여러 곳에 서적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예를 들어 1876년 문을 연 오사카서적관(大板書籍館), 1879년 문을 연 고치서적관(高知書籍館) 등.
<한성순보>의 이 기사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도쿄의 유시마 세이도 안에 있던 ‘서적관’은 이후 이름을 계속해서 바꾸었습니다. 1880년에는 도쿄도서관(東京図書館)이 되어 우에노(上野)로 이전하였으며, 1897년에는 제국도서관 관제가 공포되어 '제국도서관‘(帝國図書館)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이후 이 도서관은 일본의 국립국회도서관으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옛 제국도서관 건물은 2000년에 국립국회도서관 국제어린이도서관国立国会図書館国際子ども図書館으로 바뀌었습니다. 안도 타다오 건축연구소와 닛켄 설계에 의해 설계. 2003년 기적의도서관 사업이 펼쳐졌을 때, 기적의도서관 관계자들이 이 국제어린이도서관을 탐방한 바 있었습니다.)
"근래에는 책을 書籍觀과 분리하고 세곳에 비치하여 한곳은 淺草文庫라 하고 다른 곳은 東京圖書館·上野博物館이라고 하여 그곳에 늘 監吏를 두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누구를 막론하고 들어가서 두루 살펴 볼 수 있도록 공개해 두었다."
그런데 이 기사에 나오는 ‘아사쿠사분코’(浅草文庫)란 무엇일까요?
일본어 위키피디아(링크)를 간략하게 정리해보도록 합니다. ‘아사쿠사분코’란 “도쿠가와 막부의 학문소(学問所)와 쇼군의 모미지야마 분코(紅葉山文庫)의 서적을 장서로 한, 메이지 초기에 도쿄에 개설된 공립 도서관”이라고 합니다.
메이지 정부는 옛 막부로부터 접수한 서적류를 태정관(太政官)이나 각 대학으로 분할해 계승했지만, 문부성 박물관(현 도쿄국립박물관)은 이들을 1개소에 정리해 공중 열람에 제공했다 합니다.
1872년에 일본 최초의 근대적 공립 도서관으로서 ‘서적관’을 유시마 세이도에 개설했지만, 1874년이 되어 메이지 정부는 서적관 열람실이었던 유시마 세이도의 대강당을 회의장으로 이용하기 위해, 당시 태정관 박람회 사무국 관할 하에 있던 서적관을 폐쇄해서, 그 장서를 아사쿠사 쿠라마에(浅草蔵前)의 옛 아사쿠사 미쿠라(浅草御蔵)의 미조(米蔵)로 옮겼으며, 그 열람소를 신축해서 이듬해인 1875년에 개관했다고 합니다. 1881년에는 우에노 공원에 신축한 박물관 구내의 ‘서적 차람장’(書籍借覧場)으로 이전해서, 쿠라마에의 열람소는 폐쇄되었으며, 건물은 도쿄직공학교(도쿄공업대학의 전신)로 계승되었으며, 아사쿠사 분코는 막을 내렸다 합니다.
아사쿠사 분코의 장서 대부분은 고전적·고문서로 현 도쿄국립박물관(東京国立博物館)에 이어졌지만, 일부는 내무성 본성을 거쳐 내각문고(内閣文庫)의 핵심이 되었으며, 현재는 국립공문서관(国立公文書館)에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잘 모르는 내용이라, 매우 번잡하게 정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튼 <한성순보> 1884년 3월 27일의 이 기사는 이탈리아의 발전상을 전하는 가운데 학교뿐만 아니라 '서고'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도서관'과 관련하여 이탈리아의 도서관 발전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한성순보>의 이 기사를 쓴 분은 오늘날 우리가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것을 '서고'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고'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書庫를 설치하여 국내에 있는 무식하고 고루한 사람에게 모두 관람하도록 하고 있으니 해마다 여기에서 책을 보는 사람의 合計는 77만명이나 되며 또 그 책들이 모두 農桑에 유익한 論說에 해당된다고 한다. 대체로 이태리는 본래 文을 소중히 하는 나라가 아니었는데 오늘날에 와서 곧 書庫를 설치하였으니..."
"이렇게 된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書庫를 설치하여 實學을 힘써 숭배하고 虛文은 거들떠 보지 않고 옛것을 상고하여 현재를 넓히고 앞을 깨닫고 뒤를 깨닫게 해서 정밀한 가운데 더욱 정밀함을 구했으며 솜씨 밖에서 또 솜씨가 나오게끔 하여 修身治家에서 시작하여 愛國忠君하는 데까지 이르도록 한결같이 그치지 않게 하였던 것이다."
"書庫를 설치하여 內外古今의 서적을 널리 모아들여서 역시 內外貴賤할 것 없이 두루 살펴볼 수 있도록 백방주선했기 때문에 著作者들도 古今을 참고하고 內外를 비교할 수 있어 공중들에게도 반드시 博識擴智의 보탬이 있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저 기둥이 묻히도록 간수해 놓고, 또는 소가 끌어도 땀을 낼 만큼 모아 놓고도 그저 벌레들의 서식처나 되게 하는 따위와 어떻게 수준이 같다고 말하겠는가."
그리고 논설의 마무리를 일본의 '도쿄서적관(東京書籍觀)'의 변화상에 대한 내용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이 점이 이 기사의 특이점이기도 합니다.
이 기사의 마지막 단락은 '도쿄서적관'이 어떻게 변했는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1880년 '도쿄서적관'이 '도쿄도서관'으로 변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 공간 구성과 장서 분류에 대해서도 세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서고 내에는 다시 몇 개의 室이 있는데 그것에 漢籍室·洋籍室·佛籍室·圖書室·算書室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다시 실마다 몇 개의 部를 설치하여 政部·農部·集部·詩部로 일일이 部를 나누어서 類로써 분별하여 놓았다. 이렇기 때문에 관람자 중에서 政治部分을 볼 뜻이 있는 자는 各室의 政部에만 돌아가며 열람하고 農耕에 대한 것을 보고자 하면 역시 각실의 農部를 巡覽케 하였다. 참으로 이렇게만 하고 보면 內外古今의 도리를 통달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또 특별히 각 서고마다 반드시 新報室을 두고 내외 모든 신보를 수집해 두었기 때문에 일단 이 고에 들어갔다 하면 천하의 형세를 알아보는데 또한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참으로 국민을 이끌어 주고 교화하는 훌륭한 제도임에 틀림없다. 직장에 알맞은 적임자라면 반드시 採用할 것이고 국가발전에 필요한 훌륭한 제도라면 본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 1895년, 일본, 교순사交詢社)은 ‘도서관’을 ‘서적고’(書籍庫)라는 용어로 소개하고 있음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 ‘서적고’라는 '특이한 용어'(후쿠자와 유키치가 사용한 '문고', 한성순보의 기자가 사용하고 있는 '서고', 그리고 일본의 근대 도서관의 효시라 할 '서적관' 등의 용어를 합해서 만든 듯한 용어)는 과연 어떤 경로로 만들어졌으며, 이후 어떤 경로를 겪게 되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이 책 이후로 '서적고'라는 용어가 사용된 사례가 있습니까?
일본의 도서관학계, 특히 도서관 역사를 탐구하는 이들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고'가 '서적관'이 되고 어느 날 '도서관'이 된 사유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혀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일본 학계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학계는 왜 <한성순보>의 기자가 1884년 '서고'라고 한 것을, 유길준은 1895년 '서적고'라고 하는지, 분명하게 밝혀주면 좋겠습니다. (이에 대한 탐구와 관련하여, 저는 감히, '서적고의 향방. 그 좌절과 희망'이라고 제목을 붙여 놓겠습니다. 아, 백린 선생이여! 백린 선생의 좌절과 희망이여.)
**편집자 주석의 주석: '圖書館'이라는 단어, 또는 도서관이라는 단어, 근대한국어코퍼스, 이한섭, 『일본어에서 온 우리말 사전』(고려대학교출판부, 2014년 10월 초판)
1. 我日孔廟門外有図書館揭板是何意也(이헌영 <日槎集略> 1881)
2. 往觀図書館博物館女子師範學校昌平館動物園(9월 22일)(박영효 <使和記略> 1882)
3. 社會敎育은 相當한 機關을 要하나니 圖書館도 可하고 강연會도 可하나 比較的 範圍가 廣大하고(<태극학보> 제12호 '苦學生의 情形' 1907년 7월 24일)
4. 外國에셔난 圖書館을 設立하야 衆人의縱覽을 供하옵니다(정운복 <독습일어정칙> 제10장 '학교' 1907)
5. 1738년 公共圖書館을 立하니 實로 美國 圖書館의 始라(<서북학회월보> 제3호 '芙蘭具麟歷史' 1908년 8월 1일)
6. 圖書館員大會에參列하기爲하야日本國京都市에出張을命함(대한제국 <관보> 제4365호 '敍任及辭令' 1909년 5월 1일)
7. 경셩에 거류하난 일본 민단에셔난 도셔관을 셜립할 계획으로 쟝찻 오십만환 국채를 모집한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23일)
8. 世人의 知識을 開發하기 위하야, 圖書館 博物館 動物園 植物園等을 設하니라(조선총독부 <普通學校朝鮮語及漢文讀本> 권3 제42과 '東京 京都 大阪' 1917)
9. 그러나 인제는 독서 속력도 꽤 는 연실이는 도가와가 남겨 둔 책을 보름 동안에 다 보고 그 뒤에는 도서관을 찾기 시작하였다(김동인 <김연실전> 1939)
***편집자 주석의 주석: 근대용어의 성립과 관련하여,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 등을 중심으로 한 ‘메이로쿠샤’明六社와 그 기관지 『메이로쿠잣시』明六雜誌(1874년 4월 2일 창간, 1875년 11월 14일 정간. 모두 43호 간행)를 좀 더 들여다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메이로쿠샤’와 관련해서는 다음을 참조해주시길. 문학과지성사 창립 40주년 기념 좌담: 김병익, 안찬수, 「밤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고 태양은 늘 떠오른다」(웹진 나비, 2016년 1월 5일)
1. 我日孔廟門外有図書館揭板是何意也(이헌영 <日槎集略> 1881)
2. 往觀図書館博物館女子師範學校昌平館動物園(9월 22일)(박영효 <使和記略> 1882)
3. 社會敎育은 相當한 機關을 要하나니 圖書館도 可하고 강연會도 可하나 比較的 範圍가 廣大하고(<태극학보> 제12호 '苦學生의 情形' 1907년 7월 24일)
4. 外國에셔난 圖書館을 設立하야 衆人의縱覽을 供하옵니다(정운복 <독습일어정칙> 제10장 '학교' 1907)
5. 1738년 公共圖書館을 立하니 實로 美國 圖書館의 始라(<서북학회월보> 제3호 '芙蘭具麟歷史' 1908년 8월 1일)
6. 圖書館員大會에參列하기爲하야日本國京都市에出張을命함(대한제국 <관보> 제4365호 '敍任及辭令' 1909년 5월 1일)
7. 경셩에 거류하난 일본 민단에셔난 도셔관을 셜립할 계획으로 쟝찻 오십만환 국채를 모집한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23일)
8. 世人의 知識을 開發하기 위하야, 圖書館 博物館 動物園 植物園等을 設하니라(조선총독부 <普通學校朝鮮語及漢文讀本> 권3 제42과 '東京 京都 大阪' 1917)
9. 그러나 인제는 독서 속력도 꽤 는 연실이는 도가와가 남겨 둔 책을 보름 동안에 다 보고 그 뒤에는 도서관을 찾기 시작하였다(김동인 <김연실전> 1939)
***편집자 주석의 주석: 근대용어의 성립과 관련하여,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 등을 중심으로 한 ‘메이로쿠샤’明六社와 그 기관지 『메이로쿠잣시』明六雜誌(1874년 4월 2일 창간, 1875년 11월 14일 정간. 모두 43호 간행)를 좀 더 들여다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메이로쿠샤’와 관련해서는 다음을 참조해주시길. 문학과지성사 창립 40주년 기념 좌담: 김병익, 안찬수, 「밤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고 태양은 늘 떠오른다」(웹진 나비, 2016년 1월 5일)
****편집자 주석의 주석: 왜 이탈리아인가. 그 점이 중요할 것입니다. 이탈리아는 근대화 과정이 유럽의 다른 나라보다 늦었지만, 주세페 가리발디 등을 중심으로 1861년 통일된 국가를 만듭니다. 이런 과정은 일본과 같은 나라와 비교했을 때 늦었지만 '문명개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이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참고가 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참고로, 신채호 선생(申采浩, 1880~1936)은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이라는 번역서를 1907년 10월 15일 총 94면의 책으로 광학서포에서 출판하였습니다. 이 책은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의 『의대리건국삼걸전(意大利建國三傑傳)』을 번역한 것입니다. 량치차오의 『의대리건국삼걸전』은 1906년 12월 18일자 〈황성신문〉(신채호 선생은 이 신문의 논설위원이었다)에 실린 「독의대리건국삼걸전(讀意大利建國三傑傳)」으로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다고 합니다. 량치차오의 번역서는, 1892년에 나온, 일본의 히라타 히사시(平田久)가 '찬역(纂訳)한 『이태리건국삼걸(伊太利建國三傑)』(民友社)을 저본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히라타 히사시의 책은 1889년 영국 정치가이자 역사학자인 매리어트(John A. R. Marriott, 1859~1945)의 『The Makers of Modern Italy, Mazzini--Cavour--Garibaldi, Three Lectures Delivered at Oxford』(London, New York : Macmillan, 1889)를 번역한 것이라 합니다. (참고 교과서 용어해설 '이태리건국삼걸전' 항목
*참고
讀意大利建國三傑傳
論 說 讀意大利建國三傑傳 一 瑪志尼 二 加里波的 三 加富爾◎嗚乎라 天下之盛德大業이 孰有過於愛國者乎아 眞愛國者 國事以外에 舉無足以介其心야 舍國事에 無嗜好며 舍國事에 無希望며 舍國事에 無憂患며 舍國事에 無爭競며 舍國事에 無歡欣니라眞愛國者 其視國事에 無所謂險며 無所謂艱며 無所謂不可爲며 無所謂已足니라眞愛國者 其所以盡其愛國之術者ㅣ不同야 或以舌며 或以筆며 或以劒며 或以血며 或以機야 前者唱而後者應고 一人射而百人拾이라 有時乎或相矛盾며 或相嫉敵이로 其所向之鵠은 卒至於相成相濟에 罔不相合니今世界列國에 其穪雄者ㅣ不過十之一이니 彼其鼔之鑄之締造之莊嚴之者ㅣ孰有不從一二愛國者之心之力과 之腦之舌과 之血之筆과 之劒之機而來哉아 歐洲近數百年建國之歷史에 可歌可泣可記載者ㅣ不一而足이오 其愛國之豪傑에 爲吾平生所思所夢所崇拜者ㅣ亦不一而足이로 雖然이나 吾尢欽意大利고 吾尤愛意大利三傑노니 彼三傑者ㅣ其地位가 各不同고 其才畧이 各不同고 其結局이 各不同이로 其所以使昔日之意大利로 爲今日之意大利 則同이라 吁嗟乎三傑이여 吾寐而言之고 吾寤而歎之노니 我國民이 其有知愛國者乎아 雖其地位之不及이 相萬고 才畧之不及이 相萬이라도 萬其䇿며 萬其業면 上則可以爲三傑之一이오 下則可以爲三傑之一之一軆니 人人이 勉爲三傑之一고 人人이 勉爲三傑之一之一軆면 其庶幾哉힌져 願與我普天之愛國者로 讀此意大利之愛國三傑노라 第一節 三傑以前意大利之形勢今之意大利 古之羅馬也라 自「般琶西莎兒」以來로 以至「阿卡士大帝」之世히 並呑歐亞美之三大陸야 爲宇宙文明之宗主者ㅣ非羅馬乎哉아 當此時야 天下者 羅馬之天下니 嗚乎라 何其盛也러니 何圖一朝에 爲北狄所蹂躙야 日削月蹙고 再厄於回族며 三厄於西巴尼亞며 四厄於法蘭西며 五厄於日耳曼야 迎新送舊에 如老妓之欵情郞고 朝三暮四에 如畜犬之依豢主야 支離憔悴에 年甚一年터니 直至十九世紀之初期야 山河破碎에 益不可紀極야 東縣於法며 西隷於奧고 中夷於班야 意大利三字가 僅爲地理上之名詞者ㅣ千餘年于玆矣라 望(加西士)陷落之火炎고 吟「法馬」之悼歌니 薤露蒼凉며 刧灰零落야 昔人詩所云卷中正有家山在로 一片傷心畵不成이라 後世讀史者도 猶不禁感慨커던 而况於身親歷之者乎아 嗟乎라 哀莫哀於意大利無國之民이러니寧復知十九世紀之下半紀「距今最近數十年之間」에 儼然造一新國야 湧出於殘碑累累、荒殿寂寂之中니 擁有五十餘萬之精兵과 二百六十餘艘之軍艦고 據有十一萬餘英方里之面積과 二千九百餘萬同族之人民야 內舉立憲之美政며 外揚獨立之威烈고 雪數十代祖宗之大耻며 還二千年歷史之光榮니 此亦革命家達士里阿의 所當瞑目於九原이오 大詩人但丁의 所當感泣而不已니 嗚乎라 誰實爲之완 而克有此오 盖當十八世紀之末年야 拿破崙이 蹂躙意大利니 其時에 意大利가 已支離滅裂야 分爲十五小國이어 拿破崙이 鐵鞭一擊에 合而爲三야 置諸法政府督治之下더라雖然이 意大利後日之獨立은 實拿破崙之賜也라 拿破崙이 廢其小朝廷며 鋤其豪族며 掃其封建積獘고 以法國民法之自由精神으로 施行於其地니 於是에 意人心目中에 始知有所謂自由며 知有所謂統一고 且對外反動에 知有所獨立니 拿破崙은 意大利之第一恩人也라 但萠孽이 初生에 牛羊이 牧之야 拿破崙敗後에 各國專制君相이 會議於「維也納」 絕世奸雄梅特揑이 敢以「意大利 不過地理上之名詞」一語로 明目張膽에 以號於衆야 於是에 盡復王族壓制之舊고 意國을 仍分爲若干小國야 外來種族波旁家、哈菩士博家等이 分領之니 其王位之爲意人血族者 惟有「撤的尼亞」國王之一家而已인 又是奄奄殘喘으로 壓於羣雄니 葢至是而意大利가 闇無天日矣라 時勢가 造英雄니 時勢至此에 豈猶未極耶아(未完)
"讀意大利建國三傑傳", 황성신문[皇城新聞], 19061218
*****편집자 주석의 주석: ‘용도구서(龍圖龜書)’란 무엇인가.
주역정의(4) 周易兼義 卷第七 제11장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是故로 易有太極하니 是生兩儀하고 兩儀生四象하고 四象生八卦하니 八卦定吉凶하고 吉凶生大業하나니라. 是故로 法象이 莫大乎天地하고 變通이 莫大乎四時하고 縣象著明이 莫大乎日月하고 崇高 莫大乎富貴하니라. 備物致用하여 立成器以爲天下利 莫大乎聖人하며 探賾索隱하며 鉤深致遠하여 以定天下之吉凶하여 成天下之亹亹者는 莫大乎蓍龜하니라 是故로 天生神物이어늘 聖人則之하고 天地變化어늘 聖人效之하고 天垂象하여 見吉凶이어늘 聖人象之하고 河出圖하고 洛出書어늘 聖人則之하시니라 易曰 自天祐之어늘 吉无不利라하니 子曰 祐者는 助也니 天之所助者는 順也요 人之所助者는 信也라 履信思乎順하고 又以尙賢也라 是以로 自天祐之하여 吉无不利也니라”
(이 때문에 易에 太極이 있으니, 이것이 兩儀를 낳고 兩儀가 四象을 낳고 四象이 八卦를 낳으니, 八卦가 吉․凶을 정하고, 吉․凶이 大業을 낳는다. 이 때문에 法象은 하늘과 땅보다 더 큰 것이 없고, 變通은 四時보다 더 큰 것이 없고, 象을 매달아 밝게 비춤은 日月보다 더 큰 것이 없고, 崇高함은 富貴보다 더 큰 것이 없는 것이다. 물건을 구비하고 쓰임을 불러와서 기물을 건립하고 성취해서 천하를 이롭게 함이 聖人보다 더 큰 것이 없으며, 그윽한 이치를 더듬어내고 숨은 곳을 찾아내며, 깊이 있는 것을 갈고리로 끄집어내고 멀리 있는 것을 초치해서, 천하의 吉․凶을 정하여 천하의 亹亹함을 이룸은 蓍草와 거북껍질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이 때문에 하늘이 神物을 내자 聖人이 이것을 법칙으로 삼고, 天地가 변화하자 성인이 이것을 본받고, 하늘이 象을 드리워 吉凶을 보이자 성인이 이것을 형상하고, 河水에서 河圖가 나오고 洛水에서 洛書가 나오자 성인이 이것을 법받은 것이다. 易에 이르기를 “하늘로부터 이하가 도와주어서 길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니, 孔子가 말씀하였다. “祐는 도움이니, 하늘이 돕는 것은 순함이요, 사람이 돕는 것은 誠信함이다. 성신을 밟고 순함을 생각하며 또 賢人을 높인다. 이 때문에 하늘로부터 이하가 도와주어서 길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正義曰:
[是故天生神物 聖人則之] 하늘이 蓍草와 거북껍질을 내자 聖人이 이것을 법칙으로 삼아서 卜筮를 만듦을 말한 것이다.
[天地變化 聖人效之] 四時가 낳고 죽임을 행하는데 〈聖人이〉 봄과 여름에 賞을 주고 가을과 겨울에 형벌하니, 이것이 ‘성인이 이것을 본받음’이다.
[天垂象 見吉凶 聖人象之] 예컨대 璿璣와 玉衡으로 七政을 고르게 한 것과 같으니, 이것이 ‘聖人이 이것을 형상함’이다.
[河出圖 洛出書 聖人則之] 鄭康成(鄭玄)의 뜻은 다음과 같다. “≪春秋緯≫에 이르기를 ‘河水는 乾을 통함으로써 天苞를 내고 洛水는 坤을 유통함으로써 地符를 토해내서 河水에서 龍圖가 나오고 洛水에서 龜書가 감동되었다.’라고 하였으니, 하도는 9篇이 있고 낙서는 6篇이 있다.” 孔安國은 “하도는 바로 八卦가 이것이요, 낙서는 九疇(洪範九疇)가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王輔嗣(王弼)의 뜻은 어느 것을 따랐는지 알 수 없다. 易에 四象이 있음은 보여준 것이요, 글을 단 것은 고해준 것이요, 吉凶으로써 정함은 결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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