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그를 뽑는 사람들> 2011년 4/5월호에 실린 정희정(에너지시민연대 사무처장)의 글, '어느 반핵운동가의 사과, 죄인은 누구인가'을 옮겨놓는다.
일본의 대표적인 반핵운동단체 ‘원자력자료정보실’의 반 히데유키(伴英幸, 59세) 공동대표가 지난 4월 5일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후쿠시마 핵사고의 진실에 대해 강연하던 도중, 청중들에게 사과를 했다.
“우리 단체는 핵발전소를 없애기 위해, 이렇게 비극적인 사고가 나기 전에 핵발전소를 없애기 위해 지난 35년간 운동해 왔습니다. 저는 20년 전부터 결합해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역량이 못 미쳐 결국 사고가 터지고 광역의 방사능 오염 사태를 초래했습니다. 한국민과 전세계인에게 폐를 끼치게 되어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시종 표정 없는 얼굴로 냉정을 지키며 사고에 대해 브리핑하던 초로의신사가 갑자기 떨리는 목소리로 사과를 하자, 이 말을 전하는 통역자의 목소리에서도 떨림이 느껴졌고 순간 청중들은 숙연해졌다.
그는 아무 죄 없다. 지난 20년간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성에 대해 알리기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을 뿐이다. 돌이킬 수 없는 무시무시한 사고가 터진 뒤에야 후회하지 말고, 지속가능한 에너지 정책을 수립해 핵발전소 없는 나라를 만들자고 애타게 외쳤을 뿐이다.
그 순간, “원자력 발전소 노심용융 사고의 발생 확률은 천만분의 일,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에 맞을 확률과 같아 대책을 세울 필요가 없”고 큰소리치며 안전을 장담하던 일본 정부와 원자력계는 이웃 나라에 알리지도 않고 방사능 물질에 오염된 물을 바다에 흘려보내고 있었다. 오염수 무단 방류에 대해 항의가 이어지자 일본 정부는 뒤늦게 사과를 하긴 했지만, “국제법 위반은 아니다”라는 말을 앞세웠다. 절반의 사과, 형식적인 사과였다.
반 히데유키 대표는 “일본 정부와 전력회사, 전기사업자, 원자력을 전공한 학자들은 폐쇄적인 세계 속에 갇혀 다른 의견은 귀를 막고 듣지 않았다”며 “그들만의 동네를 일본어로는 ‘겐시료쿠무라(原子力村)’라고 부르는데 이 마을이 무너지려는 작은 구멍이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핵시설에서 일했던 사람들, 결정권을 가졌던 고위 인사들 중에 양심선언을 하며 원자력의 위험성에 대해 공공연히 발언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반 히데유키 대표가 일하는 ‘원자력자료정보실’도 그런 원자력 전문가에 의해 설립됐다. 도쿄대에서 핵화학을 전공하고 원자력 회사에서 근무했으며 도쿄도립대 교수로도 재직했던 과학자 다카기 진자부로(高木仁三郞). 그는 대학에 사표를 던지고 NGO를 창립해 원자력의 위험성에 대해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죽는 날까지 헌신했다. 지난 2000년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다카기 진자부로 시민과학기금’이 만들어져 현대의 과학기술이 가져온 문제와 위협에 대해 과학적 고찰을 바탕으로 비판할 수 있는 시민과학자를 육성, 지원하고 있다. 일본뿐 아니라 아시아 각국의 개인과 단체도 지원하고 있다.
한국에는 그와 같은 수준의 전문지식을 가진 과학자가 교수직까지 버리고 운동에 뛰어든 사례는 없는 것으로 안다. 여전히 원자력 산업계에서 생계를 유지하며 여러 가지 이해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원자력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국은 안전하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게다가 국민들의 방사능에 대한 우려를 ‘불순세력의 불안감 조성’ 때문이라며 색깔공세를 펴는 정치인까지 나타났다. 위험성에 대한 정보를 은폐하고 말 바꾸기로 국민의 불안과 의혹을 키운 것은 정부와 전문가들임이 분명한데도 “좌파세력, 불순세력들이 우리 사회에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으니 정부가 맞서 싸우라”고 주문하는 국회의원. 그들을 3선, 4선 의원으로 당선시켜 큰소리치게 만들어준 것부터가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핵 운동은 철없는 짓이라고 무시하고, 에너지를 풍요롭게 쓰기 위해 원자력은 필요악이라고 용인하며, 100만년이 지나도 다 사라지지 않는 독성 폐기물을 남기는 원자력 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죄책감 없이 펑펑 쓰고 사는 우리 세대는 모두 죄인일지 모르겠다.
일본인 친구가 내게 물을 보내달라고 도움을 청해왔다.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 이후 일본의 일부 도시에서는 수돗물도 방사능 물질로 오염이 되어 먹는 물이 부족하다. 가게에서 살 수 있는 물의 양도 제한이 되어 있다. 한 가족이 하루에 살 수 있는 물의 양은 2리터로 한정되어 있는데, 그나마 상점에 일찍 가지 않으면 다 떨어지고 살 수도 없다고 한다.
“인근 도쿄의 수돗물에서 방사능 물질이 나와서 너무 걱정돼요. 제가 살고 있는 요코하마도 언제 그렇게 될지 모르니까 슈퍼마켓에서 생수를 보면 조금씩 사옵니다. 집에 쌀도 있고 라면도 있고 먹을 것이 있어서 괜찮은데, 앞으로를 생각하면 물이 제일 걱정됩니다. 원전폭발 피해 문제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계속될 것 같아요. 세계에서 유일한 피폭국인 일본이 지진도 많이 발생하는데 원자력 발전소를 그렇게 많이 지은 것이 근본적으로 잘못이지요.”
돈이 있어도 물을 구하기 힘들다는 일본인 사소 요코 씨는 결국 내게 돈을 주면서 물을 사서 소포로 부쳐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한국의 물도 안전하지 않다. 전국적으로 방사능 오염 물질이 섞인 비가 내렸으며 특히 제주도에 내린 비에서 검출된 양은 일본 남부지방과 비슷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국내 한 대형마트에서는 방사능 오염 우려 때문에 앞으로 제주도에서 생산된 생수를 판매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이웃나라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가 한국에서 가장 청정하다고 알려진 지역을 방사능으로 오염시켜 물도 사마실 수 없게 된 상황을 누가 상상이나 했던가. 이게 다 우리의 에너지낭비가 빚어낸 결과라고 말한다면 너무 억지스럽다고 비웃는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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