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껴쓰기’로 힐링을?…문학 작품 ‘필사’에 중독된 사람들
김윤종기자
입력 2015-02-10 16:59:00 수정 2015-02-10 22:59:03
회사원 윤우주 씨(28·여)는 카페에서 자주 여행을 떠난다. 상세히 설명하면 그의 손이 ‘무진(霧津)으로 기행(紀行)을 떠나는 것’이라고 한다. 윤 씨가 카페에서 틈틈이 김승옥 작가의 소설 ‘무진기행’을 필사(筆寫)한다는 의미다. 그는 톨스토이의 ‘부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공지영의 ‘즐거운 우리집’ 등도 노트에 베껴 쓰곤 한다.
○ 문학작품 ‘필사’에 중독된 사람들
출판계에 따르면 문학작품을 필사하는 이른바 필사족이 최근 늘고 있다. 과거 작가 지망생이나 종교인들이 소설이나 성경, 불경을 필사하는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전남 보성에 사는 교사 오소영 씨(51·여) 역시 매일 밤 10시부터 새벽까지 소설 ‘태백산맥’을 필사한다. 올 초부터 ‘태백산맥’을 베낀 양은 200자 원고지 1000장이 넘을 정도.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의 발전으로 손으로 글을 쓸 기회가 적어진 시대에 왜 고생스럽게 문학작품을 베껴 쓸까? 동아일보가 10여명의 필사족은 “키보드나 스마트폰 터치로는 느낄 수 없는 감촉과 소리, 즉 물성(物性)이 마치 ‘마약’처럼 중독성이 강하다”고 말했다. 오 씨는 “‘사각사각’ 연필 소리를 들으며 원고지에 문학작품을 필사하다보면 마음이 정리돼 정신수양이 될 정도”라고 했다.
필사족은 종이와 필기도구의 궁합을 중시한다. 한지에는 붓 펜, 사인펜과 볼펜은 부드러운 종이, 만년필로는 번들거리지 않고 덜 매끄러운 종이와 어울린다. 볼펜(잉크)보다는 오랜 기간 변질되지 않는 연필(흑연)을 선호하는 이들이 많다.
○ 필사로 사유와 힐링을
소설가 김훈의 작품을 필사한 박영선 씨(26·여)는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자판을 치는 속도는 말하는 속도와 비슷해 글을 써도 생각할 시간이 없다”며 “반면 손으로 한자씩 눌러 쓰려면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고 그 틈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고 말했다. ‘기적의 손편지’의 저자 윤성희 씨도 “손으로 쓰면 지우기 어렵기 때문에 한 번 더 고민하고 글씨를 쓰고 이 과정에서 생각하는 힘이 세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필사로 ‘힐링’이 됐다”는 의견이 많았다. 이직을 준비 중인 이미향 씨(51·여)는 “필사 과정에서 그간의 삶을 차분히 정리하고 새 출발에 물두하게 됐다”고 말했다. 태백산맥문학관 위승환 명예관장은 “필사하다보면 문장의 이해를 넘어 행간에 담긴 이야기, 작가의 본질적인 가치관까지 절절히 느끼게 되고 자신의 삶도 반추하게 된다”고 밝혔다.
최근 문학작품 필사를 돕는 책 출간도 늘고 있다. 지난해 말 출간된 ‘고전의 필사’는 출판사 홈페이지에 다운로드 받은 원고지에 책 속 시조를 베끼는 형식으로 구성됐다. 책을 펼쳤을 때 왼쪽 페이지에는 문학작품, 오른쪽 페이지에 빈 공간이 배치된 ‘나의 첫 필사노트’도 1월 말 출간됐다.
눈으로 읽을 때보다 손으로 글씨를 쓰면서 읽으면 뇌가 더 활발해진다는 연구결과 덕분에 교육용으로 필사를 시키려는 부모들도 적지 않다. 박경리, 김훈 소설을 비롯해 ‘메밀꽃 필 무렵’(이효석), ‘날개’(이상) 등 근대문학이 필사하기 좋다는 평이다.
전문가들은 필사의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어깨가 결리고 눈, 손목이 아파지는 등 참맛을 아는 데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7년 간 필사를 해온 서울 중화고 방승호 교장(54)은 “너무 잘 쓰려고 하면 그 자체가 스트레스”라며 “정말 쓰기 싫으면 그 감정을 실어 휘갈겨 써도 좋다. 그렇게라도 필사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내면과 대화하게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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