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일 일요일

文史哲의 쓴웃음… 인문학의 참맛을 찾는 사람들

文史哲의 쓴웃음… 인문학의 참맛을 찾는 사람들


“끝장토론 재미 일깨웠더니, 신입생도 스터디 만들어”

8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 청운관의 5층 강의실에서 홍승태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왼쪽)가 교수 40여 명에게 올해 강좌의 주제인 정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후마니타스 칼리지 소속 교수들은 이 같은 자체적 스터디를 통해 더욱 풍성한 인문학 강의를 만들어 가고 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한국인이 처음 말한 사자성어가 중국 사전에 등재돼 있다는 걸 아세요? 바로 ‘유전무죄 무전유죄’입니다. 1988년 (인질범) 지강헌이 한 말이죠. 25년이 지난 현재, 정의는 얼마만큼 진보했을까요? 사마천이 던진 ‘천도(天道)는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과 연관시켜 고민해 봅시다.”(홍승태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

8일 오후 7시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 청운관. 요즘 말로 ‘불금(불타는 금요일)’이건만 강의실에선 수업이 한창이었다. 그런데 40여 명의 수강생 중엔 머리가 희끗한 이가 많았다. 경희대의 교양 수업 과정인 ‘후마니타스 칼리지’의 교수들이었다.

로마 철학자 키케로가 ‘문명을 만드는 인간’이라는 뜻으로 만든 단어 후마니타스. 이 단어를 딴 이 과정의 교수들은 매월 1, 2회씩 모여 이런 워크숍을 연다. 학생에게 가르칠 내용을 함께 점검하고, 다른 전공 분야도 배울 기회를 갖자는 취지다. 교수 2, 3명이 주제를 발표하고 집단 토론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5∼6시간을 훌쩍 넘긴다. 이날도 도시락을 먹으며 토론에 한창이었다.

“이건 약과죠. 지난해까지는 토요일 하루 종일 했어요. 가족의 원성이 하도 자자해 시간대를 옮긴 겁니다.”(유원준 사학과 교수)


‘취업 준비생’이 아닌 ‘학생’ 길러 내는 인문학 교육

경희대는 2011년 1학기부터 후마니타스 칼리지를 운영하고 있다. ‘문사철’을 가르쳐 취업준비생이 아니라 진짜 공부를 하는 ‘학생’을 길러 내겠다는 계획이다. 신입생들은 1, 2학기 필수과목으로 이 과정을 들어야 한다. 수강생 중 최소 10%는 F학점을 받는다.

도정일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은 “배우려 하지 않는 선생은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며 교수 워크숍을 강조했다. 교양은 전공만 파고든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인문학은 물론이고 사회과학 자연과학 예술까지 망라하는, 영역 없는 교양을 연구하는 교수가 되자는 것이다. 인문학의 본질도 여기에 있다고 믿었다.

갓 입학한 신입생에게 해나 아렌트나 루쉰(魯迅)을 가르치는 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였다. 하지만 1학기가 지나자 학생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린애 같던 말투가 바뀌고 어휘가 풍부해졌다. 삼삼오오 독서 모임도 만들었다. 요즘 세대는 책과 인문학을 싫어한다는 건 틀린 말이었다. 제대로 된 접근법을 몰랐을 뿐이다. 유재홍 후마니타스 행정실장은 “학생들이 만든 ‘아레테(Arete)’가 후마니타스 칼리지의 최대 성과”라고 말했다.

그리스어로 탁월함을 의미하는 아레테는 후마니타스 칼리지가 생긴 해 가을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교양 수업 수강생들의 모임이다. 혼자서는 벅차니 함께 공부하자고 모이기 시작해 지금은 수백 명이 참여하는 동아리가 됐다. 지난해부터는 교육부의 ‘교육역량강화사업’ 대상으로 선정돼 지원금도 받는다. 요즘 아레테는 ‘감시와 처벌’(미셸 푸코)과 ‘나쁜 사마리아인’(장하준), ‘관촌수필’(이문구) 등을 읽고 토론한다.

도 학장은 “교수가 학생에게 씨앗을 뿌렸다면, 이제 학생에게서 교수들이 과실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자발성이 선생들에게도 인문학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계기가 됐다는 말이다. 전공 중심을 외치던 교수들도 점차 마음을 열었다.


시대정신 고민하고 동시대인의 감성 이해하고

상아탑에서 인문학을 지키려는 노력은 다른 곳에서도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다. 부산대엔 20년 가까이 이어진 연구 모임이 있다. 1995년 3월 시작한 ‘인문학담론모임’이다. 현재 강명관(한문학) 곽차섭(사학) 오경환(일문학) 윤애선(불문학) 김혜준 교수(중문학)가 주축이 되어 끌어가고 있다.

이 모임은 학생들이 졸업하고 마주할 한국 사회가 갈수록 첨예한 경쟁 사회로 변질되니, 인문학 교수들이 모여 고민을 나눠 보자는 취지로 시작됐다. 인문학에 내재된 ‘통섭’의 정신을 살리면 더욱 심도 깊은 공부를 할 수 있겠다는 욕심도 있었다.

“분위기는 자유로웠지만 내용은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인문학은 물론이고 예술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천문학에 심지어 양자역학도 주제로 삼는 ‘끝장 토론’이었어요. 1년에 8번 정기적으로 모였지만 평소에도 수시로 논쟁을 펼쳤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싸우는 줄 알았을 거예요. 거친 분위기에 적응 못 해서 떨어져 나간 교수들도 생겼습니다.”(강명관 교수)

하지만 2007년 6월 100회 모임을 가진 뒤 모임은 발전적 해체를 선언했다. 12년 정도 했으니 충분히 성과를 거뒀다는 자평도 있었지만, 순수연구모임을 ‘정치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총장 선거가 다가오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가 적지 않았다.

3년 정도 휴식기를 가진 모임은 2011년 다시 시작됐다. 강 교수가 올해 초 펴낸 ‘침묵의 공장’(천년의상상)에서 갈파했듯 대학이 “학문은 국가에 시들고, 공부는 자본에 지치며 인문학이 굴종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특히 인문학이 상업적으로 소비되는 세태에 대해 교수들이 함께 고민하고 대처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인문학 서적이 잘 팔린다고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자기계발이나 힐링에 초점을 맞춘 ‘타깃형 인문서적’이 팔리는 겁니다. 기업 역시 이윤을 내기 위해 인문학을 이용하고 싶다는 바람이고요. 하지만 인문학의 생명은 비판성입니다. 기존 학문과 사회, 국가와 세계를 냉철하게 비판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강 교수)

이 모임은 최근 ‘배의 침몰’에 관심을 갖고 있다. 여기서 배는 인문학이거나 한국 사회거나 세계 자본주의 체제일 수도 있다. 인류가 몸을 싣고 있는 기존의 그릇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데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강 교수는 “현대사회의 소비 지향적 흐름은 인문학의 부재 혹은 몰락과 무관치 않다”며 “정부와 사회, 대학이 이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변화를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전남대의 인문학 프로젝트 ‘감성인문학사업단’은 학내 호남학연구원 인문학자들이 주축이 돼 2008년부터 한국연구재단의 인문학진흥사업 지원을 받아 공동 연구를 하고 있다. 올해 그 첫 성과물인 ‘우리 시대의 슬픔’을 책으로 엮어 냈고, 지난달 두 번째로 ‘우리 시대의 분노’를 출간했다. 내년 2월 세 번째 ‘우리 시대의 사랑’을 내놓을 계획이다.

이들이 감성과 인문학의 결합에 주목한 이유가 뭘까. 인간을 공부하는 학문인 인문학이 시대의 감성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이 출발점이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감성을 소홀히 다룸으로써 인문학의 위기를 유발했다는 자성이었다.

한순미 전남대 HK연구교수는 “감성을 인문학 이론으로 판단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이 이런 감성을 학문의 주제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라며 “기존의 틀을 깨지 않으면 인문학이 동시대인과 함께 갈 수 없다는 고민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인간의 감성 중 하나인 분노는 최근 한국 사회에서 일상이 돼 버렸다. 정치나 산업 현장뿐 아니라 미디어와 인터넷에서도 분노가 넘쳐 난다. 하지만 이런 분노를 생산하는 사회의 물적 토대라든가 현실에 스며든 분노가 어떻게 자기 파괴를 일삼는지는 관심 밖이다. 이 사업단은 이런 감성을 확대하거나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인문학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한순미 교수는 “교수들의 세미나를 바탕으로 학생이나 일반 시민을 위한 기획 강좌를 주기적으로 열고 있는데 반응이 뜨겁다”며 “인문학이 시대정신을 치열하게 고민한다면 인문학은 강력한 생명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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