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캐럴 들으며 ‘엉뚱한 데서 놀다’
신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
도, 신에 대한 역사적 존재론을 갈
망하는 신앙인들이 우리 인류 문화
사에 가장 큰 영향과 자산을 쌓아
왔다는 ‘거대한 역설’이 여기서 가능
해진다
저녁 어둠이 일찍 다가오고 어디선가 캐럴이 들려오는 이맘때면 지금도 나는 아득한 회상에 젖어들고 아련한 그리움으로 마음이 좀 달뜨며 10대 후반의 가난하고 추웠던 소년 시절의 아름답고 풍요한 추억에 젖어들곤 한다. 신의 존재를 부인하며 교회를 나가지 않은 게 20대 초였는데, 그 후 쉰해를 넘기며 이 거친 세상에 묻을 만큼 세속의 때가 두텁게 묻었고 헛된 시간에 무뎌질 만큼 마음이 무뎌졌는데도 왜 아직껏 전후의 그 을씨년스럽고 스산했던 철부지 시절을 풍성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되찾게 되는지. 근래 처음 인사한 화가 박정숙의 전시화 목록집 <생성을 위하여>에 주조를 이룬 푸른색들의 신비한 세계에서 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신자들 집을 순방하며 밤샘 찬송가를 부를 때 순진한 마음으로 바라본 맑고 신선한 새벽의 짙푸른 하늘을 떠올렸고 정희성의 시집에서 “그에게 시간을 선물했네/ 나 죽은 뒤에도 끝없이 흐를/ 여울진 그리움의 시간을”(<선물>) 얻고 그 영원함에 대해 묵상했다.
나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으며 인격신에 대한 그의 거침없는 부정과 교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에 통쾌한 심정으로 동의하며 우리 신문에서 더러 보는 목회자의 권력욕과 세속화에서 성전의 장사꾼들을 내쫓던 예수의 호통과 면죄부를 팔아먹는 교회를 뒤엎은 종교개혁을 떠올렸다. 심지어 히틀러 암살 기도 사건으로 처형당한 디트리히 본회퍼의 전기를 보며 그의 문화적 세련성과 정의를 향한 열정을 존경하면서도 그의 진지한 신심에 대해서는 의아히 여겼는데 그의 회의 없는 신앙이 그에게서 비롯된 1960년대 미국의 ‘신의 죽음의 신학’에서 현대 기독교의 고민을 짐작한 나로서도 좀 의외여서였다. 신을 부정하고 교회를 비판하면서도 내 어린 신자 시절의 동심을 그리워하다니. 그 모순을 따져보는데 문득 떠오른 구절이 파울 틸리히의 말이었다. 그는 제도권의 의례적인 신자를 가리키는 ‘종교인’과 달리 “영원을 갈망하며 구원을 추구하는 인간”을 ‘종교적 인간’으로 구별했다. 예수나 부처를 말하지 않더라도, 아니 말하지 않고, 삶의 내면을 깊이 사유하고 시간의 흐름에 영원한 의미를 묻는 동경심이야말로 그가 말하는 참된 종교적 인간의 모습이지 싶다.
나는 부모님 천도재를 지내던 절에서 연신 절을 하고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불경을 따라 읽으며 내 무종교주의에 이런 의례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자문하는 중에 문득 떠오른 것이 앞의 틸리히였고 이어 따라온 것이 ‘영원을 향한 인간의 근원적 지향’이란 인식이었다. 아름다움이란 그 실체가 없는데 그럼에도 아름다움을 찾는 인간의 욕구가 예술의 형태로 태어나듯이, 신의 실재/부재를 알 수 없기에 그의 존재와 현현을 소망하는 인간적 의지 혹은 소망이 종교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이 그것이다. 그 ‘없음’으로써, ‘부재한 것’이기에, 그것의 현존과 태어남을 더욱 갈망하는 것이 예술이고 신이 아닐까 하는, 나로서는 자못 도저한 도전이었다. 이 세상 만물 중에서 말을 하고 불을 사용하며 후회를 하고 침을 뱉을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만이 성찰하며 창조한 것이 예술과 더불어 신이며 종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렇게 해서 든 것이었다.
종교의 그 허망함에 젖어든 근래의 내 생각을 추켜준 것이 <한겨레>(2013년 10월28일치) 출판면이 소개한 <무로부터의 우주>였다. 우주물리학자 로렌스 크라우스의 이 과학책은 그 기초부터 무식한 내게 마치 산스크리트어의 불경처럼 읽어내기 참으로 어려운 책이었다. 용어도, 공식도, 따라서 그 논리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끝까지 이 책에 매달린 것은 그 서평을 쓴 기자가 인용한 구절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우주의 기원과 생명체의 특성을 규명하기 위해 구성된 ‘오리진 프로젝트’의 대표인 저자 크라우스는 135억년 전 빅뱅이 일어나 무에서 1000억~4000억개의 행성을 가진 은하수 4000억개가 탄생했으며 이렇게 태어난 우주는 2조년 후에는 시간과 공간이 도대체 존재하지 않는 무의 세계로 되돌아간다는, 한없이 막막한 우주의 역사와 미래를 상상하고 있다. 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찰나’나 ‘영겁’이 가리키는 시간 개념에 압도당했지만 이 책이 전개하고 있는 시공간의 규모는 그 불교적 상상력까지 압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자의 친구 히친스가 했다는 “열반이란 무를 성취하는 것”이란 말에 앞뒤 모르고 절로 승복되었다.
바로 이즈음에서 한승동 기자가 인용한 구절을 만났다. “목적이 없는 우주는 우리를 더욱 놀라운 존재로 만들어주고,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게끔 만들어준다. 왜냐하면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는 의식이 있는 축복받은 존재이며,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할 기회까지 주어졌기 때문이다.” 후기의 <문답>에서 크라우스는 또 이렇게 말한다. “목적이 없는 우주에서 산다는 것은 정말로 놀랍고도 신명나는 일이다. 우주에 아무런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우연히 탄생한 생명과 의식이 더욱 값지게 느껴진다. 이 가치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태양이 살아 있는 동안은 결코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나는 이 우주에서 신과 함께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크라우스는 내가 이해 못 하는 양자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종합하며 <나, 스티븐 호킹의 역사>에서 “휠체어에 붙박인 채” 우주의 역사를 생각하며 “시간여행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설명한 스티븐 호킹의 ‘할아버지의 역설’에 의지하여 우주의 시작과 종말을 구성한 것이다.
나는 우주물리학 이론을 판단할 지식도 그럴 배짱도 없지만, 목적이 없음에서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는 역설에 감동했음은 정직하게 고백해야겠다. 사실 우주와 그 해석에는 ‘역설’을 통해 이해될 진실이 참으로 많다. 크라우스가 창조 신화의 부정과 무신론에서 존재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듯이, 종교가 허무에서 탄생했기에 틸리히가 말하는 종교적 인간의 지향과 인간의 진실을 향한 종교문화의 창조도 가능했을 것이란 것도 그중 하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숱한 신앙적 고백과 거기서 태어난 예술적 고행이 없었다면 종교적 성찰에서 빚어진 사상의 위대함과 예술의 아름다움이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역사에 참여하는 신만 아니라 우주를 만든 창조주를 부인하는 과학조차 교회와 교리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영원한 진리를 발견하려는 종교적 인간의 무한을 향한 추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신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에 대한 역사적 존재론을 갈망하는 신앙인들이 우리 인류 문화사에 가장 큰 영향과 자산을 쌓아 왔다는 ‘거대한 역설’이 여기서 가능해진다. 없기에 자유롭고 자유롭기에 의미가 생겨난다는 인식에 나는 아마도 해방감에 젖은 듯하다. 그 자유와 해방감이란 따뜻한 위로도, 존재의 기쁨도 바랄 수 없는, 한없이 차고 헛되고 고독한 심상이겠지만.
나는 이 쓸쓸한 세밑에 너무 큰 문제에 매달린 것 같다. 먼저 간 친구들, 지금 투병하고 있는 친구들, 그들이 이 무의미한 세계에 남겨준 의미들을 생각하며 나는 시인 김형영처럼 “한참을 엉뚱한 길에서 놀았”다. 그는 네루다의 시집 <질문의 책>을 읽다가 “하늘이 무너지면/ 새들은 어디서 날까?// 지구가 꺼지면/ 허공은 얼마나 깊어질까?/ 사람은 어디에 발 디디고 살지?” 자문한다. 아이들에게 보낼 카드를 사고 이젠 내가 다니지 않는 교회의 성탄절 장식을 보며 나도 이 <옆길>의 가톨릭 시인처럼 “꿍꿍이속 신발끈을 고쳐 매고/ 지구 밖에 나가봐야겠다”고 속삭인다. 하느님이 없음으로써 존재와 삶의 의미와 무의미를 동시에 고려하는, 이처럼 장한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걸 흐뭇하게 느끼며.
김병익 문학평론가
출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1617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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