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4일 화요일

주현우, 김예슬 그리고 대학의 죽음 / 김누리

주현우, 김예슬 그리고 대학의 죽음 / 김누리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없는 대학에서,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었다. 우정도 낭만도 사제 간의 믿음도 찾을 수 없었다. 가장 순수한 시절 불의에 대한 저항도 꿈꿀 수 없었다. 스무 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고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김예슬의 ‘자퇴 선언’을 한 학생이 읽어가자 일순 강의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잔기침 소리가 잦아졌고, 여기저기서 나직이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낭독 후 자신의 느낌을 말하던 여학생이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자 학생들의 눈가에 눈물이 번져갔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저 쾌활해 보이는 학생들의 마음속에 저런 응어리가 맺혀 있었다니. 처음으로 학생들의 심연을 들여다본 느낌이었다. 내 안에서도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었다. 아버지 세대로서, 선생으로서 부끄러웠다.
주현우의 “안녕들 하십니까?”를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2010년 그날의 강의실이었다. 김예슬이 떠난 그 교정에서 오늘 그는 고백한다. “침묵과 무관심을 강요받은 세대”였기에, “단 한번도 스스로 고민하고 목소리 내기를” 요구받지 않았기에, “그렇게 살아도 별 탈 없으리라 믿어왔다”고.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정치적 불의와 사회적 비참의 시대에 모두 ‘안녕들 하시냐’고.
주현우의 고백과 김예슬의 선언은 괴짜들의 개인적 ‘일탈’이 아니다. 깊은 공감과 너른 호응은 이들이 젊은 세대의 정서를 대변함을 알려준다. 이들은 이 땅에 사는 청년들의 막막함과 하릴없음, 무력감과 불안을 진솔하게 드러낸다. 살벌한 생존 경쟁의 정글 속에서도 옳음에 대한 용기와 자유에 대한 감수성이 살아있음을 감동적으로 증언한다.
나아가 주현우와 김예슬은 한국 대학이 처해 있는 심각한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김예슬이 떠난 곳이 “대기업에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가 된 대학”이라면, 주현우가 황야의 이리처럼 외로이 ‘안녕’ 대자보를 붙인 곳은 정치적 공론장이 사라진 대학이다.
오늘날 이 땅의 대학은 더 이상 진리의 상아탑도 정치의 공론장도 아니다. 대학이 스스로 대학이기를 포기하고 있다. 근대 대학의 창시자인 훔볼트의 말처럼 대학이 ‘교수와 학생으로 이루어진 자유롭고 평등한 학문 공동체’라면, 이 땅에 대학은 없다. 교수와 학생은 대학의 자유롭고 평등한 주체가 아니라 단순한 관리 대상으로 전락했고, 경쟁과 승자 독식의 논리 속에 학문 공동체는 붕괴했다. 진리를 탐구하고 정의를 혜량하며 사회에 기여하는 최고 학문 기관이 대학이라면, 이 땅에서 대학은 숨을 거둔 지 오래다. 진리, 정의, 연대의 가치는 낡고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외면당하고, ‘경쟁력’, ‘효율성’, ‘수익성’, ‘선택과 집중’ 따위의 마케팅 용어들만 난무한다. 대학은 취업학원으로, 학생은 지식 소비자로, 교수는 지식 소매상으로 전락했다. 대학이 지녔던 도덕적 권위와 사회적 책임감은 가뭇없이 사라졌고, 실용주의의 탈을 쓴 반지성주의가 대학의 이념을 질식시켰다. 대학은 이제 지성의 폐허, 정신의 황무지, 정치의 불모지가 되어버렸다.
훔볼트는 대학을 이상적인 소우주를 선취하는 곳으로 보았다. ‘대학 밖의 세상’에서 온갖 착취와 불의와 거짓이 판친다 해도, ‘대학 안의 세계’는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대학은 대학 밖의 세상보다도 더 흉물이 되어가고 있다. 최근 여러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화원과 경비원에 대한 비인간적 처우와 파렴치한 착취는 대학이 볼썽사나운 몰골로 죽어가는 모습을 처연하게 보여준다.
김누리 중앙대 독문과 교수

출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1648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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