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7일 화요일

도로명 주소 체계가 지워버리는 것들

도로명 주소 체계가 지워버리는 것들


2014년 1월 1일부터 기존의 주소는 폐지되고, 도로 이름과 건물의 번호로 구성된 도로명 주소(새 주소)를 사용해야 합니다. 병행이 아닙니다. 내년부터 법적으로 인정받는 유일한 주소는 도로명 주소가 될 것입니다.
1997년에 도입이 결정되고 2011년 7월 29일에 고시된 도로명 주소는 일제강점기의 잔재 청산, 세계적 표준, 효율 향상 등의 이유로 시행될 예정이지만 아직도 여전히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택배 기사, 우편배달부조차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슬로우뉴스는 새 주소에 관한 다양한 의견을 게재할 예정입니다. (편집자)
동 중심 주소 체계에서도 번지만 불러주면 짜장면도 택배도 제대로 온다. 그런데 이걸 왜 바꾸는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도로명 중심으로 주소를 바꾼다고 하는데 왜 바꾸어야 하는가. 미국식으로 주소를 바꾸는 게 선진화인가.

산을 등지고 물을 앞에 두고 만들어진 우리나라의 마을

마을과 지역의 구성 방식이 다른데 같은 방식으로 구획해야 하는가. 도로명 주소로 바꾸려면 지역 구획이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 꼬불꼬불한 길을 어떻게 1길, 2길, 3길 식으로 바꿀 수 있는가.
넓은 대지가 있다. 여기에 길을 낸다. 그러면 동일한 규모로 땅이 나누어진다. 그럼 1가, 2가, 3가 식으로 이름 붙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마을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산을 등지고 물을 앞에 두고 만들어졌다. 작은 강 옆에는 작은 산이 있고, 큰 강을 둘러싼 산줄기가 있다. 큰 강을 끼고 큰 도시가 만들어졌고, 작은 강을 끼고 작은 도시가 만들어졌다. 산과 강을 중심으로 도시가 만들어지다 보니 전통 도시의 중심부는 분지 형태를 띠게 된다. 우리나라 옛 도시는 성(城)이 있었고 성 안과 밖으로 구분되었다. 빈 땅에 새로 구획을 나누고 도로 중심으로 주소를 붙이는 구조와는 도시의 형성원리 자체가 달랐다.
산을 기준으로 도시를 만들고 지형의 흐름을 따라 길을 내었다. 그래서 한양 도성 안의 길도 직선이 아니다. 북악산 맞은편에 남산(목멱산)이 있지 않다. 남대문과 북대문이, 동대문과 서대문이 서로 마주하지 않는다. 동대문과 서대문을 연결하는 종로는 일직선이 아니다. 종로에서 남대문 가는 길도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산을 중심으로 분지형 공간에 한양 도성을 세웠기 때문이다.
한성부는 5부(部)로 나누어지는데 이것도 한성부를 1/5 씩 길 따라 나눈 것도 아니었다. 평지를 길을 통해 1/n 로 나눈 것과 다른 방식이다. 궁궐, 도로, 개천(청계천)이 5부를 나누는데 영향을 준 것이다. 한성부에서 5부 아래 52방을 두었고 방(坊)은 원칙적으로는 네모의 구획이 되어야 하지만 지형상의 이유로 그렇게 만들어지지 못했다.
수선전도(首善全圖)(서울의 옛 지도, 1840년경)
수선전도(首善全圖)(서울의 옛 지도, 1840년경)
방(坊) 아래에 동리(洞里) 개념이 있었다. 동(洞)은 기본적으로 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리(里)는 일정 규모 이상의 집이 모여 있는 것을 의미했다. 동리(洞里)가 법정동, 행정동으로 변경된 것이다.

장소성과 역사성을 없애는 도로명 주소

장소는 시간이 녹아있는 이야기의 지층이다.
서울에서도 강북과 강남은 현재의 모습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다르다. 강북은 한양 도성 안과 도성 밖으로 나뉜다. 강남은 1936년에 처음 영등포 지역이 경성부에 포함되었고 그 외 대부분은 1963년에 경기도에서 서울이 된 것이다. 경기도의 양천, 시흥, 과천, 광주 지역이 서울이 되었다. 예를 들어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는 경기도 광주의 외곽이었던 곳이다. 이곳에 새로 길을 내고 구획 정리를 해서 서울의 신 중심지가 된 것이다. 지방의 전통도시(주로 지명 뒤에 주(州)가 붙인 도시들. 강릉, 원주, 충주, 청주, 전주, 나주, 경주, 상주 등)도 성 안과 성 밖으로 나누어진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새로 크게 만들어진 도시들과는 형성 원리 자체가 달랐다.
도시의 형성 원리가 다른데 획일적인 기준으로 주소 체계를 바꾼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삶 터라는 의미는 사라지고 그냥 기하학적 공간이 되어버린다. 장소의 특성과 의미는 이제 서서히 잊혀지게 될 것이다. 장소에 담긴 이야기도 더 이상 발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도로명 중심으로 주소 체계를 바꾼다는 것은 장소성과 역사성을 없애버리는 일이다.

새주소의 문제점 중 하나는 사라진 동리 명칭

내가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동리 명칭이 주소에서 빠진 점이다. 기존 주소에서는 도시 지역은 구 아래 동이 있고, 시골은 면 아래에 리가 있었다. 도로명 주소에서는 구 아래 길 이름, 면 아래 길이름이 등장한다.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13길 123 이렇게 쓰는 게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4동 몇 번지라고 쓰는 것보다 무슨 장점이 있는가. 봉천4동 몇 번지가 관악로13길 123으로 바뀐 것뿐이다. 번지수가 복잡하다고 하는데 도로명은 복잡하지 않은가. 도시보다 시골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람도 많이 살지 않는 시골의 넓은 면 단위에서 리 명칭을 없애고 길 이름으로만 주소를 정한다면 어떻게 위치를 짐작할 수 있겠는가. OO군 OO면 OO리 OO0번지에서 OO군 OO길 OOO으로 하는 것이 집 찾는데 더 좋을까.
번지수가 없던 땅에 사람이 살면 새로 번지가 생기고, 하나의 번지가 또 여러 개로 쪼개져 복잡해지긴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도로명 주소를 쓴다고 이 문제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도시재개발이나 재건축을 하면 길도 바꾸고 건물도 바뀐다. 마찬가지다. 그냥 동리 명이 없어진 것이다.
선진화와 더불어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은데 현재 사용하는 지명에서 일제 강점기에 많이 바뀐 것은 동리 명이 아니라 군 명칭과 면 명칭이다. 예를 들어 양근과 지평이 합해져서 양평군이 된 것이다. 조선시대 시흥군 북면 영등포리가 지금 어디겠는가. 동면, 서면, 남면, 북면이 다른 명칭으로 바뀐 것이다.
군과 면은 많이 바뀌었어도 기초 촌락 단위인 동리 명칭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주소에서 동리 명칭을 빼 버리는 것은 일제 잔재 청산과 상관없는 것이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 1872년, 조선 후기 지방지도, 경기도 시흥 "서울, 성 밖을 나서다." 145쪽
서울대 규장각 소장, 1872년, 조선 후기 지방지도, 경기도 시흥
“서울, 성 밖을 나서다.” 145쪽
참고로 지도 한 장 첨부한다. 이 지도는 일제 시대 지도가 아니라 1872년에 제작된 조선 후기 지방지도의 경기도 시흥 지도이다. 지도에 나오는 지명들을 잘 보시라. 상도리, 봉천리, 신림리, 노량진, 신길리, 당산리, 영등포, 구로리, 독산리, 난곡리, 철산리, 광명리, 소하리, 일직리, 박달리, 안양리 등이 등장한다.
조선시대 지명인 상도리, 봉천리, 신림리, 노량진, 신길리, 당산리, 구로리, 독산리, 난곡리를 주소에서 빼는 게 일제 잔재 청산인가?
서울에서 내가 소유한 땅도 빌딩도 없다. 지적도 볼 일도 없고 번지수 찾아가면서 내 땅을 확인할 일도 없다. 몇 번지가 OO길 OO으로 바뀌어도 상관없다. 다만 동리 명칭은 주소에서 빼지 마라.
http://slownews.kr/1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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