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의 수하한화-‘복음의 기쁨’
전주에서 가톨릭 사제들이 공개적으로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하고, 그 자리에서 박창신 신부의 강론이 있었던 것은 지난 11월22일이었다. 그 강론에서 이 원로 신부는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를 갈수록 유린하고 있는 정권에 대해 매서운 비판을 했다. 그러자 수구세력과 정부는 거두절미하고 이 발언 중에 나온 한마디 말을 꼬투리 잡아 과장되게 왜곡해 이적성 발언이라고 규탄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종북 척결’이라는 상투적인 공격 논리를 꺼내들면서 말이다. 이 와중에 대통령까지 나서 “묵과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자 검찰이 수사에 들어간다는 뉴스도 나왔다.
그중에서도 특기할 것은 ‘대한민국수호천주교모임’이라는 단체가 보여준 반응이다. 그들은 성직자가 정치에 개입했다고 하여 박창신 신부를 파문해 줄 것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서울 주재 교황청 대사관에 제출했다. 제출 날짜는 11월28일이었다. 교회와 국가 혹은 종교와 정치의 관계라는, 역사가 오래된, 그러나 결코 칼로 무를 자르듯이 명쾌하게 정리할 수 없는 이 복잡한 문제를 탄원서 한 장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 탄원서 제출은 어설픈 코미디로 끝날 공산이 매우 커졌다. 왜냐하면 그 바로 이틀 전 11월26일에 로마에서 신임 프란치스코 교황의 새로운 회칙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 <복음의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고, 그 핵심적인 내용이 교회가 복음화라는 소명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정치의 잘못을 지적하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로 돼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는 아직 <복음의 기쁨>을 보지 못했다. 곧 영문판이 나온다고 하니 그때 전문을 읽어볼 생각이지만, 아쉬운 대로 인터넷에서 찾은 몇몇 발췌본과 해설, 논평들을 읽어보았다. 어떤 해외의 논평자는 ‘전율’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이 책의 획기적 의의를 논하고 있었다. 가톨릭교회의 내부 역사를 잘 모르는 나 같은 문외한이 이 문서가 갖는 역사적 의의를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발췌본만으로도,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신선한 충격과 기쁨, 크나큰 용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듯하다.
<복음의 기쁨>은 현재 가톨릭교회와 세계가 직면한 숱한 문제들을 포괄하고 있지만, 요지는 간명하다.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각자 말할 수 없이 신성한 존재임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황의 이 ‘권유’의 두드러진 면은 ‘가난’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예수가 가난하고, 늘 가난한 이들과 어울렸듯이, 교회도 스스로 가난해지고,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프란치스코 교황 자신은 “안온한 성전 안에서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거리로 나가서 멍들고, 아프게 하며, 더러워진 교회를 더 원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아프게 하는’ 교회라는 표현이다. (일부 국내 자료에는 ‘상처받는’ 교회로 번역돼 있는데, 영어 발췌본에는 hurting이라고 돼 있다. 영어 발췌본이 원문을 정확히 번역했다고 가정하면 ‘아프게 하는’ 교회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즉 세계를 비윤리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특권층에 대하여 교회가 늘 고분고분한 자세를 보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거기에 들어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래의 가톨릭 최고 지도자들과 달리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늘날 세계 전역에 걸쳐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을 가장 큰 문제라고 보고 있다. 교회의 소명은 가난한 이들을 해방하여 사회의 완전한 일원이 되게 하는 것이라는 그의 생각은 확고하다. 그러나 그는 가난한 이들과의 일상적인 작은 연대 행위들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빈곤의 구조적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강력히 문제 삼는 것은, “소수의 부가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반면에 다수의 빈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불균형 상태를 만들어내는 논리, 즉 ‘시장의 절대적 자율성’과 금융투기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예전 군사독재 시절 브라질의 반체제 성직자 돔 헬더 카마라 신부가 했던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카마라 신부는 언젠가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그들은 나를 성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내가 빈곤의 원인을 물어보면 그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른다”고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제는 교황이 ‘가난의 구조적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이번 교황이 라틴아메리카 출신이라는 점도 중요할 것이다. 또 세계 전체 상황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적어도 라틴아메리카는 군사독재 시대가 끝나고 민주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지금 국민들의 생활도 예전과는 비할 바 없이 호전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 상황변화는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에 공감했던 많은 가톨릭 성직자들의 희생과 헌신에 힘입은 바가 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발췌본을 읽었을 뿐이지만, <복음의 기쁨>에는 기억해 둘 만한 표현이 풍부하다. 예를 들어 “진정한 평화는 정의를 통해서만 실현된다” 혹은 “부의 분배나 빈자들의 인권이 사회통합이나 평화라는 이름으로 억압되어서는 안된다” 혹은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은 특권의 포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안락보다 높은 가치를 지닌다” 등등의 표현이 그렇다. 내 생각에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오늘날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상업주의와 ‘무관심의 세계화’가 압도하고 있는 세계에서 낙담하고 비관주의에 빠지는 ‘패배주의’를 경계하는 메시지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확신 없이 출발한다면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우리는 패배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생각해보면, 패배주의 혹은 비관주의는 결국 자기중심적 사고, 즉 ‘교만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의 기쁨>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은 옳고 진실한 어떤 것일 뿐만 아니라, 견디기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우리의 생을 새로운 빛과 더 없는 기쁨으로 채울 수 있게 하는 아름다운 어떤 것이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204210446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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