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조금 자라고 나니 엄마의 숙제 중에 가장 큰 영역을 차지했던 책 읽어주는 시간이 빠져나갔다. 그림책을 책을 잔뜩 쌓아놓고 “엄마 그만~” 할 때까지 소리내어서 현장감을 살리면서, 읽고 또 읽었다가 잠이 들기를 반복했다. 습관이 참 무서운거라, 우리집의 가장 큰 일과였던 책 읽기 숙제에서 해방되니 뭔가 시원섭섭하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아쉬움이 남는다. 첫째 아이도 그렇고 둘째도 한글을 떼고서도 엄마와 책 읽는 시간을 떼지 못하였으니 한 15년 정도, 그림책에서 이야기책으로 이야기의 바다로 뛰어들었던 것 같다.
아이였을 때 그림책을 접하지 못한 나는 아이 덕분에 그림책의 매력을 체험할 수 있었다. 필자가 어렸을 때는 그림책 같은 건 없어도 좋을 만큼 육아 환경이 좋았던 것 같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산골에서 무엇이 더 필요했겠는가, 집을 나서면 바로 뱀도 나오고 개구리도 잡아먹을(?) 수 있는 자연이라는 교과서가 있는데. 그때는 부모가 양육에 특별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동네 동무들과 하루종일 뛰어놀면서 신체능력을 길렀고 마을 어르신에서부터 옆집 엄마, 아빠, 삼촌, 이모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공동체 예절도 배웠으니까.
오늘날의 육아 환경은 예전과 정말 다르다. 문 밖에만 나서면 아이들이 뛰놀 수 없는 위험지역이고 모르는 사람들의 세상이니…. 이런 열악한 육아 환경에서 책읽기를 좋아하지 않는 부모들도 늘어난다. 중고생들 사이에서는 ‘책따’라는 말이 있다. 교과서 말고 책을 펴는 아이들을 ‘책읽는 왕따’ 로 불리며 왜 굳이 책을 보느냐는 놀림을 받기도 한다. 그렇게 자라서 부모가 된 사람 중에 ‘책(=교과서)’이란 학교에서나 보는 것으로 인식할 수도 있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부모가 되어서 책을 싫어해서 그림책 따위는 안 본다는 사람을 만난다면 무척 아쉬운 마음이 들것 같다. 책을 읽어주면 국어실력이 좋아지고 어휘력이 는다는 식을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일본의 저널리스트 야나기다 구니오(柳田 邦男)는 <마음이 흐린 날을 그림책을 펴세요>(수희재, 2006)라는 책에서 인생에서 세 번 만나는 것이 그림책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에는 먼저 자신이 아이였을 때, 다음에는 아이를 기를 때, 그리고 세 번째는 인생 후반이 되고 나서 자신을 위해 그림책을 펼치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물론 세 번은 상징적인 표현에 불과하며 그림책에서 손을 떼지 말라는 의미이다.
야나기다 구니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림책을 읽는 즐거움은 당신이 상상하는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그림책은 글이 많아서 펼치기 전부터 주눅 드는 그런 책이 아니다. 그림책이란 글 읽기가 어려운 유아기 아이들을 위해 글과 그림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책이니. 그렇다고 그림책을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500페이지에 달해서 베개 대용으로도 쓸 수 있는 벽돌책에 담긴 핵심 메시지를 몇쪽 안 되는 그림책에서 만날 수도 있다. 다년 간 그림책 읽는 노비 즉, ‘책비(?)’로 살아온 유경험자의 말이니 한번 믿어봄이 어떨지….
그림책 연령의 아이가 있는 부모라면 그림책 읽기에 올인해 보길 바란다. 이야기에 재미를 붙인 아이들의 집중력은 놀라우니, 아이가 그만할 때까지 지치지 말고, 쉬지 말고 읽어주시라. 성장발달단계 전체를 놓고 볼 때 아이가 책 읽어달라고 할 때는 잠시일 뿐이니 부모도 그 시간을 즐기겠다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책 육아만큼 안전하고 확실한 육아는 없는 듯하다. 그렇게 이 책에서 저 책으로 미끄러지듯 즐기다보면 부모도 인생의 책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못생긴 당나귀> 같은 책이었다.
<못생긴 당나귀>는 이효석의 명작 <메일꽃 필무렵>의 동물판 같은 줄거리의 이야기다. 이야기는 말과 당나귀 사이에서 출생한 어린 노새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늘씬한 엄마 말이 자랑스런 ‘나’는 장날을 오고가는 길에서 늘 만나는 못생긴 당나귀 아저씨가 싫다. 거기다가 엄마를 바라보는 시선이 몹시도 거슬린다. “엄마만 보면 코를 벌름거리고 이상한 소리도 내는 저 당나귀 아저씨, 저번에는 혀로 내 볼을 핥다니! 보면 볼수록 못생긴 아저씨가 싫어요.”
잠방거리며 쏘다니던 노새는 늙은 승냥이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죽을 힘을 다해 달렸지만 승냥이와의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져 오고, 어린 노새는 낭떠러지 앞에서 털썩 주저앉게 되는데 뒤따라오던 승냥이는 곧장 낭떠러지로 내려꽂힌다. 다리가 풀려 오도 가도 못하는 노새를 구하러온 것은 바로 그 못생긴 당나귀 아저씨. 아저씨와 헤어진 어린 노새는 물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당나귀 아저씨와 닮은 것을 확인하고 “혹시 아저씨와 나는?” 이런 암시의 문장을 남기고 끝난다. 승냥이에게 쫓기는 대목에서 아이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내 팔에 매달렸고 낭떠러지 대목에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엄마는 막장드라마에서도 쉽지 않은 출생의 비밀에 관한 극적 반전에 감탄했다. 향토색이 물씬 묻어나는 그림체 덕분에 더욱 사랑했던 그림책이었다.
<사과나무>는 사과나무 과수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집 없는 벌레들 새들이 사과나무에 깃들려고 할 때, 다른 모든 나무들이 “시끄러워서 싫어! 지저분해서 싫어! 발바닥이 간지러워서 싫어!”라는 이유를 들어 거부할 때 한 사과나무는 집 없는 이들 모두를 받아들인다. 나비도 놀러오고, 새도 놀러오고 한 귀퉁이를 틀어 집도 짓고 알도 낳고, 벌레들은 뿌리 곁에 터를 잡고…. 그리고 겨울이 찾아온다. 무성했던 나뭇잎도 다 떨어지고 찬바람이 쌩쌩 부니 쓸쓸하기만 하다. 그러나 모두를 받아들인 사과나무 한 그루는 쓸쓸할 틈이 없다. 여기저기서 두런두런거리는 소리, 발 밑에는 애벌레들이 굼실굼실, 하하호호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은 겨울의 풍경이 그려진다.
통섭의 과학자 최재천 선생과 인문학자 도정일 선생이 생태계는 단순계보다 복잡계가 더 경쟁력이 있다는 내용을 담은 <대화>라는 대담집을 낸 적이 있는데 <사과나무>는 과학적 용어 같은 건 하나도 쓰지 않고 <대화>에서 주장하는 핵심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우리네 인생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아, 공자님도 말씀하셨지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
아이 덕분에 그림책 읽는 즐거움과 효용을 알게 되었다. 더욱 고마운 것은 그림책을 즐길 한 번의 기회가 더 남았다는 거다. 그 때에도 혼자보다 함께 읽고 싶다. 함께 읽다가 흥에 겨우면 춤도 추고 노래도 불러야겠다. 그림책은 왁자지껄 떠벌떠벌거리며 읽어야 제맛이니까! 그림책 읽는 노년, 왠지 모르게 설렌다. 나는 기다린다. 나만을 위해서 그림책을 펼칠 그날을! 순수한 즐거움으로 몰입할 그날을!
출처 : 미디어제주(http://www.mediajej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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