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과학소설), 무협, 추리, 판타지 등 장르문학 작품들이 2000년대 들어서면 웹소설로 모입니다.”
지난달 31일 오후 7시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인문학협동조합 강의장에서는 ‘뉴미디어 비평 스쿨’ 마지막 강의가 열렸다. 이지용 단국대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연구교수가 ‘한국SF의 역사 그리고 웹소설로의 진화’란 주제로 강의를 맡았다. 이 교수는 해외 SF의 역사와 계보를 설명하면서 국내에서는 SF 등 장르문학에 대한 비평이 없었다는 점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SF나 웹소설이나 비평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비평이 있어야 재창작이 일어나고 장르가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날 수강생은 28명. 장르문학 연구자부터 웹소설 작가와 독자까지 다양했다. 1시간30분가량 강의가 끝나고 30분간 토론이 이어졌다.
‘뉴미디어 비평 스쿨’은 올해 1월 시작해 1~3강 게임비평, 4~6강 테크노컬처, 7~8강 웹소설론 등으로 진행됐다. 강의를 준비한 곳은 인문학 연구자들 모임인 인문학협동조합이다. ‘인문학’의 영역에서 ‘게임’ ‘기계’ ‘웹’은 다소 낯선 단어로 읽힌다. 조합은 이번 강의뿐만 아니라 앞서 한양대에서 기계비평 강의를, 성균관대에서 게임과 인문학이라는 강의를 개설했다. 근현대사를 테크놀로지 발달사로 다룬 <한국 테크노컬처 연대기>(알마), 게임을 둘러싼 문화사를 담은 <81년생 마리오>(요다) 등의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날 강의에 앞서 만난 오영진 인문학협동조합 총괄이사는 “게임, 웹소설, 심지어 힙합까지 여러 가지 뉴미디어들이 생겨났지만 이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작업은 없었다”면서 “웹소설을 두고도 산업규모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지 어떤 담론도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문화에서 분명 존재하지만, 비평이나 담론이 부재한 영역을 인문학으로 다뤄내는 게 이 조합의 주요한 활동 중 하나다. ‘연애인(in)문학’이나 ‘오덕(덕후)인문학’ 등의 대중강좌가 대표적인 사례다. ‘연애’나 ‘덕후’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어떤 가치를 불러일으키며, 어떻게 인문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를 탐구한 것이다.
“사회에서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새로운 소재의 인문학”에 대해 조합은 우선 파일럿 강의를 거쳐 대중 무료·유료 강의를 진행하고, 이후 대학 강의나 출판으로 이어가는 등 일종의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날 강의 사회를 맡은 천정환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게임과 인문학이라고 했을 때 단지 새로운 소재인 게임에만 방점을 찍는 게 아니라, 이러한 새로운 소재를 탐구하면서 인문학적 능력을 고양하는 게 중요한 목표”라고 말했다.
인문학협동조합은 2013년 8월 출범했다. 인문학을 연구하는 것은 고독한 작업이지만 ‘협동’이 필요한 지점들이 있다는 데 공감한 젊은 인문학자들이 모여 만들었다. 현재 조합원 67명. 오영진 이사는 “대학에서 하지 못하는 것들을 협동조합에서 해나가자는 취지였다”고 했다. 시강 시스템을 도입해 조합원들 서로 강의를 모니터링해주고 석사 학위 연구자들에게도 출강이나 출판의 기회를 제공한다. 대학에서는 연구자의 강의 능력을 키울 프로그램이 부족하고 석사 학위로는 강단에 서기 어렵다. 천정환 교수는 “같이 연구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 또한 연구자들의 삶을 지속하는 동력 중 하나가 된다”면서 “신자유주의 속에서 대학 안의 연구자들은 파편화되고 성과 압박이나 경쟁에 시달린다. 인문학 공동체가 있다면 교류와 교환의 역할을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 이사는 “기계비평 등은 다른 전공자들이 한데 모여 팀워크로서 가능했던 일인데 분과학문 체계의 대학에서는 그런 만남을 주선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조합의 또 다른 목표 중 하나는 인문학 연구자들의 지식 생산물이 사회에 환류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나고 조합은 학자들의 성찰과 사유를 담은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현실문화), 청년들의 목소리를 담은 <흙흙청춘>(세창미디어) 등을 공저로 펴냈다. 오영진 이사는 “조합이 출발할 때 삶과 앎을 일치시킨다는 게 하나의 취지였다”면서 “사회 문제나 현상에 대해 조합은 저널리즘의 속도로 대응할 수 있었는데, 협동성이 이런 데서 발휘되지 않았나 싶다. 사회적 의제를 같이 끌고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인문학협동조합은 최근 1~2년간 조합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했다. 그 결과 협동조합보다 더 강하고 큰 형태의 인문학 단체로 나아가자고 총의를 모으고, 비슷한 결을 가진 단체인 민족문학사연구소와 함께 ‘한국인문학연구원’이라는 사단법인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 출범 예정이다. 천정환 교수는 “향후 대학은 인구절벽에 따른 위기 상황에 맞닥뜨릴 것이며, 연구자들에게도 직접적인 위기 상황이 될 것”이라면서 “사단법인 형태의 단체가 되면 연구자들의 자기 재교육이 가능하도록 지원하고 이들의 연구와 교육이 대학 밖에서 시민인문학을 통해 순환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연구자들에게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단체가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2052106005&code=960201#csidx566ff477b738bbfa49927f5011cced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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