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석(何石) 박원규(朴元圭) 선생은 당대 최고의 서예가 중 한 사람이다.
서예평론가 김정환은 선생을 이렇게 말했다.
"걸작이 사라졌다는 시대지만,
시대가 수천 번 바뀌어도 여전히 좋은 작품, 역사를 다시 쓴대도 경이로움을 주는 작품은 그대로 존재할 것이다. 인간 세계에도 그런 걸작 같은 인물이 있는 건 아닐까.
아무리 다시 봐도 여전히 매력적이고 힘이 느껴지는 걸인(傑人)!"
하석의 최근작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가 인문예술공간 순화동천에서 열린다. 전시의 주제는 '책+독서'다. 선인들의 독서와 책에 관한 생각과 정신을 작품으로 만들었다.
선생의 작품은 한자의 뿌리인 갑골문과 전서가 주류다. 한눈에 무슨 글자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한자는 표의문자라 유심히 바라보면 현대 한자의 뿌리를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전시장 입구의 대형 작품이 그렇다. '책(冊)'이다. 대나무를 쪼갠 죽간(竹簡)을 이어붙인 모습이다. 책의 원형이다.
'冊'을 보고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보이는 글씨,
未讀五車書者勿入此室(미독오거서자물입차실)
"아직 다섯 수레의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이 방에 들지 말라!"
그렇다고 돌아서서 나갈 필요는 없다.
奪天巧(탈천교). 하늘의 솜씨를 압도하다.
가운데 사람의 형상을 한 글자는 하늘 천(天)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黃券靑燈(황권청등). 노란 책과 파란 기름 등잔.
어려움 속에서도 부지런히 밤에 책을 읽음을 이른다.
옛사람이 책을 베끼는 종이에 황벽나무즙을 물들여 좀을 방지해 책을 황권이라 했다.
얼굴 면(面)이다. 표정이 떳떳하지 않다.
북송의 학자 황정견이 이렇게 말했다.
"사대부가 사흘을 글을 읽지 않으면 가슴 속에서 義와 理가 서로 통하지 않고, 거울을 보면 그 면목이 가증스럽고, 사람에게 하는 말도 맛이 없다."
갑골문 '책(冊)'.
抱書眠(포서면). 책을 안고 잠들다.
웃음. 책을 읽으면 즐겁고, 즐거우면 웃는다.
한글도 표의(表意)문자인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恨不十年讀書(한불십년독서).
십년 독서를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觀書爲樂(관서위락). 글을 보는 즐거움.
박원규 선생은 전각(篆刻)에도 뛰어나다.
慧厪寂(혜근적). 지혜로움과 부지런함과 고요함.
학문의 세가지 요체.
전시공간인 순화동천의 양쪽 벽을 '책'과 '책'이 메우고 있다.
순화동천(巡和洞天)은 출판사 한길사가 마련한 공간이다.
한길사가 처음 시작한 서울 순화동과 노장사상의 이상향인 ‘동천’(洞天)을 결합했다.
下心(하심). 내 뜻을 내려놓고 남을 따름.
공경 경(敬).
이 간략한 필획이 경(敬)자다. 갑골문이다.
아래 '경'자와 비교해 보자.
敦敬(돈경). 인정이 두텁고 행실이 조신함.
新正(신정). 새해 첫날.
바를 정(正)은 서주(西周)시대 제기(祭器)에 입구(口)와 두 발자국 형태로 새겨져 있다.
두 발자국은 멈출 지(止)를 뜻하는 것일까.
蓮子聲(연자성).
갓끈에 매달린 연실(蓮實)이 책상에 가볍게 부딪혀 나는 소리.
선비가 의관을 갖추고 책을 읽을 때 나는 소리다.
券氣(권기). 서책의 기운.
讀書聲(독서성). 책 읽는 소리.
敬恭(경공). 삼가고 공손함.
왼쪽의 '경'자가 위 간략한 필획의 '경'자와 비슷하다.
鑿壁(착벽). 벽을 뚫다.
벽을 뚫고 이웃집 불빛에 책을 읽다.
焚膏繼日(분고계일). 기름을 태워 불빛을 이어가다.
갑골문이다.
敬時愛日(경시애일). 때를 공경하고 시간을 아끼다.
박원규 선생이 71세를 맞이하는 2018년 첫날 쓴 작품이다.
마지막 작품도 대형 '책(冊)'이다.
하석은 이렇게 설명했다.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 이 말은 안중근 의사께서 중국의 여순감옥에 계실 때 붓글씨로 쓴 후 세상에 유명해졌다.
박원규 서예전은 순화동천에서 4월 30일까지 계속된다.
(서울 중구 순화동 217 덕수궁 롯데캐슬 201동 컬처센터, 02-772-9001)
오프닝 리셉션은 2월 6(화) 오후 4시에 열린다.
박원규 선생은 개인전 입장료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이번 전시회는 무료다.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서소문사진관] '책 읽기'의 멋 보여주는 박원규의 옛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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