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자리에서 무례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대개는 낯서니까 긴장하고 조심한다지만 예의에 대한 감수성이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거침없이 사적인 질문을 하거나 정치적인 문제를 꺼내 논쟁이 될 만한 사안에 대한 유도형 질문을 하는 것이다. 대화하는 법은 재능이 아니라 훈련이고 연습이라고 생각한다.
해외여행 중에 ‘테이블 북’을 발견했다. 손님을 맞는 거실, 건물 로비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화보집. 아예 출판 장르로 구분해 부르기도 한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 들춰볼 수도 있고, 첫 만남에 그 책을 화제로 말머리를 자연스럽게 여는 데도 도움이 된다. 활자가 없는 화보집을 한두 페이지 넘기며, 서로의 사생활이 아닌 삶에 대한 교양미를 드러내는 것.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옛사람이 안부 인사로 “밥 먹었어요?” 질문하듯 이제 “요즘 무슨 책 읽어요?”라고 물었으면 좋겠다. 내가 출판인이어서 갖는 바람이 아니라 사람 관계에서 아름다운 대화가 꽃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책 이야기로 시작하면 얼마든지 깊은 대화가 가능하다.
누군가 내게 질문해줬으면, 무슨 책을 읽는지를. 출판인임을 아는 지인은 주로 무슨 책을 만들고 있는지를 묻고, 아예 모르는 사람은 그런 질문 자체를 하지 않는다. 내게는 답이 준비되어 있는데 말이다.
나는 요즘 뉴스에서 만나는 문화계 인사의 추잡한 행동에 놀라고 답답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남자들은 모른다>를 읽는다. 오래전 내가 만든 책이기도 하다. 앤솔로지인 이 책을 다시 읽으며 위로와 힘을 얻는다. 안타깝게도 책이 상당 기간 품절되어 서점에서 구할 수는 없다.
지금은 정년퇴직하였지만 당시 국문학과 교수이던 김승희 시인이 ‘여성, 여성성, 여성문학’의 키워드로 44편의 시를 뽑고 거기에 이야기를 붙인 책이다. 출간 당시 단정적이고 도발적인 제목 때문에 화제가 되었다. ‘남자들은 모른다’라니. 책에는 가부장제 문화가 제공하는 여성 정체성과 그 환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여성주의적 주체 인식이 분명히 드러나는 시들이 수록되었다.
<남자들은 모른다>에 실린 시를 반복해서 보다가 시구를 소리 내어 읽기도 한다.
어젯밤에는 책에서 최영미 시인의 ‘어떤 족보’를 읽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헤스론은 람을/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얌을 낳고/ 르호보얌은 아비야를…// (허무하다 그치?)// 어릴 적, 끝없이, 계속되는 동사의 수를 세다 잠든 적이 있다”
끝없이 아버지가 아들을 낳고 있는, ‘낳다’는 동사 반복인 시. 가부장 중심주의의 이상한 족보를 의문스럽게 생각하는 시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잠들었다. 어머니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단성생식의 소생이 남자란 말인가. 신화의 견고한 부권제를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독자에게 이 시가 던지는 물음이 곧 여성 자각의 힘이 될 수 있다.
지금 만들고 있는 책에도 이런 여성 자각의 이야기가 있다. 영화배우 문소리와 일본 감독 니시카와 미와의 대담에서. 이제는 직함에 영화감독도 붙은 배우 문소리는 작년에 상영했던 <여배우는 오늘도>를 연출하면서 여배우의 민낯이 드러난 삶의 이야기로 ‘여성적 삶’의 보편성을 획득했다. 자신의 목소리로 살아가는 모든 여성이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든 연출력에 마음껏 박수를 보냈다.
배우 문소리는 니시카와 감독이 여성성 캐릭터 연기를 잘하는 비결을 묻자 이렇게 답한다. “제가 평범하게 산 일상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들이 나의 큰 재산일 수 있다고 늘 그렇게 생각해요. 나의 평범한 일상이 내 연기를 비범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이런 여배우임을 밝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합니다”라고. 여성으로 태어나 남자들이 잘 모르고 의식하지 못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겪는 이 땅의 현실. 영화 속에서도 묘사된 외면할 수 없는 여러 풍경들을 통해 현실 인식을 정확히 드러냈다는 점에서, 여성의 삶에 대한 풍자가 통렬한 <여배우는 오늘도>를 높이 기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내게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물었다면, 이렇게 책으로 시작해서 영화로 건너가는 이야기로써 우리의 현실과 뉴스 속 참담한 사건을 여성의 시선으로 말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요즘 무슨 책을 읽느냐고 안부 인사를 건네주시기를.
원문보기: https://goo.gl/ebia1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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