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19일 월요일

네안데르탈인 증후군/ 김진경

우리는 나무가 도끼에 심하게 찍혀 있는 모습을 보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아이고 저 나무 무지 아프겠다,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떠올린다. 우리들에겐 참 너무 평범하고 진부한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생각들이 현생인류의 조상인 크로마뇽인에게서 일어난 두뇌혁명의 산물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두뇌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크로마뇽인 이전의 인류인 네안데르탈인 두뇌는 서로 연결이 안된 채 놓여 있는 수많은 컴퓨터들처럼 두뇌의 방들이 서로 연결이 안된 채 병렬되어 있는 구조였다고 한다. 그런데 크로마뇽인으로 오면서 이 두뇌의 방들이 뉴런이라는 신경세포에 의해 자유롭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두뇌구조의 변화가 네안데르탈인에게는 불가능했던 새로운 사고를 가능하게 했다. 나를 다루는 두뇌의 방과 나무를 다루는 두뇌의 방이 자유롭게 연결되기 때문에 크로마뇽인의 후손인 우리는 나무를 나처럼 상상하고 나무의 상처와 아픔에 공감할 수 있다. 이 공감은 연대와 관계를 만들어낸다. 상대방을 나처럼 상상하고 공감하여 연대하고 관계 맺는 능력, 그것이 크로마뇽인의 두뇌혁명이 가져온 새로운 사고이자 새로운 힘이었다. 네안데르탈인은 두뇌구조상 이러한 공감과 연대의 능력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본능이 허용하는 범위 이상의 집단을 형성할 수 없었고, 그러한 한계 때문에 인류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에 반해 크로마뇽인은 두뇌혁명이 가져온 공감과 연대의 능력으로 수천 수만 수백만의 집단을 형성할 수 있었고, 마침내 오늘날에는 60억이 넘는 사람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상상하여 인류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고, 인류문명을 이룩해냈다. 
현생인류에게서 일어난 두뇌혁명, 그것이 가져온 공감과 연대의 능력이 오늘날의 사회와 문명을 이루어낸 기본 동력이었다는 말은 뒤집으면, 한 사회의 가장 심각한 위기는 그 구성원들이 공감과 연대의 정신을 버리고 본능적 욕망의 집단으로 한없이 분열되어 나갈 때, 그렇게 현생인류의 본질을 망각하고 네안데르탈인을 향해 무한히 퇴화해 가는 증후군이 만연했을 때 온다는 걸 뜻하기도 할 것이다. 지난 세월호 사태 때 우리는 세월호 가족들을 시체팔이로, 국민을 개돼지로 매도 비하하는 지도층 인사들을 보며 한국사회에 ‘네안데르탈인 증후군’이 얼마나 심각하게 만연되어 있는가를 뼈저리게 느꼈었다. 그리고 “적어도 네안데르탈인 증후군 중증인 자들을 우리 사회의 지도자로 두어서는 안되겠다”는 국민적 자각이 촛불집회로 분출되어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하지만 정권교체가 곧 ‘네안데르탈인 증후군’의 말끔한 치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치유의 시작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왜 이렇게 한국사회에 ‘네안데르탈인 증후군’이 만연하게 되었는가를 곰곰이 따져보는 일일 것이다.
우리 세대가 대학에 다니던 1970년대에는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의 상당수가 농촌 출신이었다. 산업화가 급속히 진전되는 과정에서 농촌 대가족의 아버지는 장남이나 아들 중 공부 잘하는 아이 하나를 선발하여 도시의 대학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리고 딸들은 공장으로, 다른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어 대학에 간 아들을 뒷받침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해서 대학에 온 아들은 누이와 형제들에 대해 부채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아들에게 구로공단 여공들의 파업이나 농민들의 자살이 남의 일로 보일 수가 없다.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연대, 대학생과 농민의 연대로 확산되어 간 1970,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정서적 기반은 바로 이 대가족의 유대감에 있었다.
그런데 대학을 나온 아들은 그와 비슷한 여성과 결혼하고, 공장에 다니던 딸 또한 비슷한 배우자와 만나 살다 보면 서로 생활문화가 달라져 소통이 뜸하게 되고, 대가족의 유대감은 사라져 계급 계층적 구별짓기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 마련이다. 그 시작이 바로 1990년대 초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1970, 80년대에 사회적 구심력으로 작용했던 대가족의 유대감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강남’으로 상징되는 계급 계층적 구별짓기가 사회의 전면에 등장하여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아이들의 왕따와 학교폭력이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며, 사회구성원들이 학교교육을 계급 계층적 구별짓기의 수단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는 점일 것이다. 
왕따와 학교폭력 문제가 심각할 때 나는 학부모 대상 강연을 가면 “우리 어머님들 왜 비싼 돈 들여서 명품 가방 사세요? 구별짓기 하려는 거 아닌가요? 왜 악착같이 돈 모아서 강남 아파트로 가려고 하시나요? 구별짓기 하려는 거 아닌가요? 아이들의 왕따도 일종의 구별짓기입니다. 어디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어머님들의 그림자예요. 그런데 왜 자기 그림자를 보고 그렇게 깜짝깜짝 놀라며 경찰 동원하라고 소리소리 지르세요?”라고 어머니들을 질타하곤 했었다. 이제 나는 수능 문제든 특목고 자사고 문제든 학교교육을 구별짓기의 수단으로 보고 집착하는 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인공지능자동화가 전면화되면 인간에게 남는 역할은 공감을 바탕으로 한 관계 형성, 협업과 통합 같은 겁니다. 그래서 OECD도 이미 학력 개념에 그러한 정의적 능력을 중요하게 포함시켰고, 각 나라도 그런 방향으로 학력 개념을 바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과거의 잣대를 가지고 당신의 아이를 구별짓기를 위한 무한경쟁으로 내몰아 네안데르탈인 증후군에 빠트리려 하세요? 그렇게 하면 인공지능자동화가 전면화된 사회에서 아이가 잘살 수 있을까요?”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2182049015&code=990100#csidx1085f5af37e47a6a981091a62728e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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