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0일 화요일

왜 지금 글쓰기인가/ 박송이 경향신문 기자

일요일 저녁 6시. 최병진씨(37)가 집을 나선다. 텔레비전에서는 얼마 남지 않은 주말을 붙잡으려는 예능 프로그램이 방송 중이다. 다가올 월요일을 앞두고 마음이 조금씩 붐비는 시간이지만 집을 나서는 최씨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볍다. 최씨가 향하는 곳은 서울 행당동에 위치한 ‘하숙공방’. 매주 일요일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이곳에서는 글쓰기 모임이 진행된다. 서울 송파구 최씨 집에서는 50분 가까이 걸리는 곳이지만, 물리적 거리나 시간이 부담스러웠던 적은 없다. “주중에는 일을 하니까 모임에 가기 힘들잖아요. 일요일이니까 마음 편하게 가요. 글쓰기 모임에서 마음을 여는 시간이 많이 있거든요. 놀러가듯 즐겁게 가죠.”

모임에 앞서 매주 한 편의 글을 쓰는 게 과제. 스트레스는 전혀 없다. 잘 쓰면 좋겠지만, 꼭 잘 쓰지 않아도 괜찮다. 지켜야 할 분량도 없다. 글쓰기 모임 이름도 ‘너도나도 글쓰기’. “말 그대로 너도나도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는 의미예요.” 모임장 어효은씨(29)의 소개다. ‘너도나도 글쓰기 모임’은 지난해 12월부터 자신의 감정을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지난 4일 열린 모임의 주제는 ‘설렘’. 글을 준비하면서 최씨는 자신의 감정을 좀 더 들여다보게 됐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설레다’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내겐 너무 낯선 단어가 되었다. 아님 나이가 들어가면서 무덤덤해졌든지….” A4용지 한 장 분량의 글을 마무리하고 나니 자신과 좀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글을 쓰다 보면 스스로를 좀 더 깊게 대하게 돼요. 또 주제가 감정이다 보니 ‘내 안에 이런 것들이 있구나’라는 것을 한 번씩 더 생각해 보게 되고요.”

■ 이제 누구나 글을 쓴다

포털 사이트에서 ‘글쓰기 모임’을 검색하면 다양한 글쓰기 모임 소개가 쏟아져 나온다. 글쓰기 강사가 모집하는 모임도 있고, 등단을 꿈꾸는 예비작가들의 모임도 있다. 그러나 ‘너도나도 글쓰기 모임’처럼 직업적인 목적이나 특별한 프로그램이 없이 글을 쓰는 모임도 많다. “한 달에 두 번 모여 함께 글을 씁니다.” “글을 쓴 후 이를 토대로 대화합니다. 글에 대해 합평하지는 않습니다.” “자유롭게 글을 씁니다. 전문 강좌가 아닌 취미 모임입니다.” ‘글쓰기’ 혹은 ‘글쓰는 시간’ 자체에만 방점을 찍은 모임 공지글이다. 한때는 진입 장벽이 높은 소수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글쓰기가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넓고 평평한 공유지로 바뀌었다.

“왜냐하면 지금은 아무도 나를 대신 설명해주지 않는 시대거든요.” 취미로 혹은 일상의 한 부분으로 글을 쓰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를 묻자 김대성 문학평론가가 답했다. 김 평론가는 2013년부터 부산에서 독서·글쓰기 모임 ‘곳간’을 운영해왔다. 김 평론가는 줄곧 ‘생활글쓰기’의 중요성을 이야기해 왔다. 자신의 생활을 돌보고 스스로를 존중하기 위해 ‘생활글쓰기’가 필요하다는 관점이다. 1970년대부터 노동운동 진영을 중심으로 ‘생활글쓰기’ 모임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글쓰기 열풍은 그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주류 매체, 주류 글쓰기 가 없어졌잖아요. 작가에 대한 관심도 많이 적어졌죠. 이전에는 권위 있는 누군가가 개인들의 삶을 설명하고 정리해줬어요. 권위자가 해결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던 거죠. 그런데 지금은 내 삶은 내가 설명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요.” 김 평론가의 설명이다. <대통령의 글쓰기>의 저자 강원국 전 청와대 연설비서관은 “ ‘읽기’ ‘듣기’만 있던 사회에서 ‘말하기’ ‘쓰기’ 사회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삶을 대신 설명해주던 권위 있는 저자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자신의 삶을 직접 설명하고 싶은 수많은 ‘나는’이 등장했다.

이는 “준거집단이 사라진 시대”라는 진단과도 맞닿아 있다. “나이에 대한 발달과업이 낡은 이야기가 됐다. 나와는 다른 배경과 상황을 가진 멘토의 조언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인생의 방향이 사지선다처럼 어느 정도 정해져 있던 예전과는 달라졌다.”(강한나·김보름의 <마이크로 트렌드 심리학>) 다양한 삶의 방식이 공존하면서 앞 세대의 길이 내 길이 되리라는 보장은 사라졌다. 어떻게 하면 ‘나답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적극적인 고민이 시작됐고 글쓰기 열풍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성은숙씨는 재작년부터 지인들과 ‘월세’라는 온라인 글쓰기 모임을 하고 있다. ‘월세’는 일기를 쓰는 모임이다. 글쓰기 플랫폼인 ‘브런치’에 공동계정을 만들어 월요일 오후 3시까지 글을 올린다. 생각, 사건, 업무, 가족 이야기, 책 이야기 등 소재의 제한이나 형식의 구애 없이 정해진 시간에 각자의 일상을 기록하면 된다. ‘월세 프로젝트’ 참여자들의 직종은 다양하다. 20대 신입사원부터 의사, 카피라이터, 경단녀, 대기업 부장, 동화작가 등. 다양한 직종을 넘어 글쓰기를 하려는 사람들이 모였다.

직업이 정체성을 압축한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직업과 상관없이 글을 쓰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직업이 더 이상 정체성을 설명해주는 유일한 수단이 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강 전 비서관은 “지금은 누구나 쓰고, 누구나 써야 하는 시대”라고 말했다. “ ‘어디에 다닙니다’라고 하면서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냈던 시대가 아니거든요. 내가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야 하는데 그런 수단은 사실 글밖에 없어요.”

■ 글쓰기는 지금, 여기의 즐거움이다

소셜미디어가 글쓰기를 도운 기술적 배경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의 글쓰기는 오프라인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 ‘축적’이 더 이상 삶의 원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이전의 삶의 원리는 ‘축적’이었다. 한마디로 시간이 지나면 좋아진다는 논리다. 은행에 돈을 넣으면 언젠가는 목돈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연공서열제에 따라 회사를 참고 오래 다니면 언젠가는 갑이 될 거라는 기대 같은 것들이다. 소설가 김영하씨는 그의 책 <말하다>에서 “많이 벌고 많이 쓰고 많이 저장하는 삶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 이런 비관적 인식하에 지금 여기에서 어떤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를 개인적으로, 독자적으로, 개별적으로, 현실적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쓰기는 바로 축적이 불가능한 시대에 지금, 여기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고민에 대한 하나의 대답인 셈이다. ‘너도나도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권경덕씨(32)의 말이다. “정답이 없는 삶인데 친구들과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돈 안 쓰고 재미있게 노는 활동을 많이 해보자는 취지에서 글쓰기 모임을 시작했어요. 소비 위주의 생활 말고요.” 장 대표는 “ ‘축적’이라는 감각이 없을 때 미래보다 현재가 중요해진다. 글쓰기는 현재를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라고 본다. 글쓰기로 자기 일상을 돌아보면서 끊임없이 자기 삶의 평범한 흐름에 깊이를 부여하게 된다”고 말했다.

권씨는 글쓰기를 혈액순환에 비유했다. “글을 쓰면 혈액순환이 되는 것 같아요. 스트레칭 혹은 체조 같은 것이죠. 스스로를 차분하게 응시할 수 있으니까 삶이 명료해지는 느낌을 받아요. 그 느낌이 좋아서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어요.” ‘너도나도 글쓰기 모임’ 참여자 이해웅씨(37)는 “처음에는 글쓰기 기술을 익히려고 모임을 신청했는데 글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보게 됐다. 누가 더 잘 살고 못 사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서로 나누고, 글에 대한 피드백도 하다 보니, 정화되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김대성 평론가는 “글쓰기는 누군가 알려주기보다 사람들끼리 어울려 막연하게라도 직접 감각을 해보는 게 중요하다”며 “자기 감정도 각자가 품고 있는 단어도 다 자기 살림이다. 그런 것들을 흘려보내지 않고 기록하면서 자기가 몰랐던 자기의 좋은 점들, 자기의 생활에서 소중한 지점들, 사소해보이는 것에서 발견하는 귀함 같은 것들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축적이 불가능한 시대에 절망한 사람들이 마지막 한 방을 노린 게 비트코인이었다면 미래만을 좇던 시선을 현재로 거둬들이는 게 글쓰기일지도 모른다. 김영하 작가는 그의 책 <말하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계에 부딪혔을 때 글쓰기라는 최후의 수단에 의존한 것은 여러분이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닙니다. 그게 무엇이든 일단 첫 문장을 적으십시오. 어쩌면 그게 모든 것을 바꿔놓을지도 모릅니다.” 



솔직하게 하루 3분씩 습관처럼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가 어렵다고 한다. 낯설고 두려워서 어려운 것이다. 익숙해지면 된다. 익숙해지는 방법은 매일 쓰는 것이다.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고 습관적으로 쓰는 게 왕도다.”

- 강원국 전 청와대 연설비서관

“어려운 일이지만 글을 쓸 때 자신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 나한테 일어난 사건을 쓴다고 했을 때도 그 일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써 보는 게 좋다.”

-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보통 알아서 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알아서 쓰는 것보다 쓰면서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생각하면 누구라도 글을 쓸 수 있다. 글을 쓰면 자신의 생각에 대해 알게 되고 자기 주변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 김대성 생활글쓰기 모임 ‘곳간’ 대표

“너무 부담을 갖지 말고 하루 3분만 써도 괜찮다. 3분 동안에도 생각보다 꽤 많이 쓸 수 있다. 본격적으로 책상에 앉아 서론, 본론, 결론을 구성해서 쓰려고 생각하면 부담이 있다. 3분 동안 앉아서 지금 막 떠오르는 생각을 끄적이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효과가 나타난다.”

- 박미라 ‘치유하는 글쓰기 연구소’ 대표

“골프 칠 때 어깨에 힘을 빼는 데만 3년이 걸린다는 말을 들었다. 글쓰기 역시 어깨에 힘을 빼고 나의 말로 꾸밈없이, 한 문장씩 정확하게 써내려가는 게 중요하다는 점에서 골프 치는 법과 닮았다. 중언부언하는 수식 과잉의 문장이 아니라 군더더기 없이 정교한 문장이 좋은 문장이다.”

- 은유 ‘글쓰기의 최전선’ 중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출처 https://goo.gl/ZgTtV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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