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13일 목요일

권위주의적 자본주의와 대안적 민주주의

2010년 5월 5일자 <경향신문> 인터넷판. 프랑크 데페 독일 마부르크대 명예교수(69)의 인터뷰 기사 “한국, 권위적 자본주의로 회귀할 우려”.

 

프랑크 데페 독일 마부르크대 명예교수(69)는 5일 "금융위기 이후 우리 앞에는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로 회귀할 것이냐, 대안적 민주주의로 나아갈 것이냐의 두 갈래길이 놓여 있다”면서 “한국은 권위주의적 자본주의의 길을 선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데페 교수는 유럽을 대표하는 진보적 학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국제통상연구소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데페 교수를 만나 지난 2년간의 금융위기 수습과정 평가와 향후 전망을 들어봤다.

 

- 이번 금융위기로 나타난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금융자본주의의 붕괴로 시작된 이번 위기는 이상기후로 인한 전지구적 식량난, 신자유주의의 한계로 인한 성장의 둔화, 빈곤, 사회적 분열 등 총체적 문제가 맞물리면서 국가의 강력한 개입이 없이는 극복될 수 없는 지경에 놓여있습니다. 이번 금융위기로 인한 가장 큰 변화는 신자유주의가 숭배받던 시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했던 ‘국가’가 화려하게 귀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지난 2년 동안 각국 정부들은 위기 극복을 위해 많은 돈을 쏟아부었습니다. 위기에서 어느 정도 탈출했다고 보십니까.

“아니요. 위기는 점점 더 확산되고 첨예화되고 있습니다. 금융위기의 주범이었던 은행들은 정부의 강력한 구제금융을 통해 되살아났고, 그들의 투기적 속성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반면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거액을 쏟아붓고 있죠. 그리스 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 그 결과 국가채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습니다.”

- 위기 이후 양극화가 더 심해지는 느낌입니다.

“국가채무의 급증은 금융의 위기가 사회로 전이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럽의 우익 포퓰리스트들은 늘어나는 국가부담을 이유로 각종 사회보장 삭감, 이주민 제한 강화 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금융위기는 금융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점점 더 확산되고 첨예화되고 있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경쟁에서 밀려났을 때 그것이 가져다주는 사회적 추락에 대한 두려움은 커집니다. 노동시장의 주변부에서 고용불안과 사회적 불안정을 경험해 봤다면 그 두려움은 더욱 커집니다. 이는 시장의 법칙과 요구에 순응토록 사람들이 길들여지는 ‘훈육적 신자유주의’를 확산시킵니다.”

-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비교적 빠른 속도로 금융위기를 탈출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금융위기 이후 우리 앞에는 두 갈래길이 놓여 있습니다. 한쪽 길은 권위적 자본주의로의 회귀입니다. 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들은 과거 권위적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짧은 기간에 반 봉건적 사회에서 고도로 발전된 현대 자본주의로 비약했습니다. 한국의 경우는 다행히 1980년대의 노동운동 덕분에 민주적 자본주의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금융위기 이후 모습을 보면 과거 권위적 자본주의의 압축 성장기에서 수혜를 입었던 기득권이 다시 권위적 자본주의로의 회귀를 꿈꾸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권위적 자본주의의 특징은 경기진작의 방법으로 강력한 수출 부양책을 택하고 엄청난 자원을 쏟아붓습니다. 그러나 수출부양책이란 결국 노동자들의 임금압박 형태로 나타납니다. 또 다른 특징은 앞서 말씀드린 훈육적 신자유주의의 효과를 더욱 극대화하기 위해 ‘안보’ 이슈를 결부시킨다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북한과의 관계가 그러한 역할을 합니다. 남북 긴장관계가 높아지면 그렇지 않아도 사회적 추락의 위험에 겁에 질려 있는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길들이기가 더욱 쉬워집니다. 보수주의자들과 기득권자들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죠. 아시아형 모델이라 불려왔던 이러한 권위적 자본주의는 이번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최근 서구에서도 일종의 효과적인 위기극복 모델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다른 한쪽 길은 무엇입니까.

“다른 한쪽 길은 국가의 올바른 개입으로 이번 금융위기를 계기로 표출된 문제점들을 극복하고, 대안적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폴 크루그먼이나 조지프 스티글리츠 같은 학자들은 국가가 어마어마한 자원을 동원해 수출을 지원할 것이 아니라 내수 위주로 경제를 재편하기 위해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조세정책, 은행 사회화를 포함한 공적 소유부문의 확장, 자본시장에 대한 엄격한 통제, 내수 강화, 사회서비스, 경제민주주의의 확대 등입니다. 물론 이는 쉽지 않습니다. 대대적인 금융·사회개혁의 기대 속에 선출된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월스트리트의 반대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금융위기 이후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발전적인 민주주의 모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러한 목소리를 내줄 다수가 만들어져야 하는데, 경제위기로 인해 훈육화 압력이 강해지고 있는 현재로선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독일의 경우엔 금융위기 이후 1만5000명이 모여 금융투기세력들의 위기 비용을 대신 내주지 않겠다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민주주의를 일궈낸 한국 사람들의 저력을 믿습니다.”

 

프랑크 데페 교수는

서유럽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노동조합의 정치사회학, 유럽통합, 국제정치경제학 등 다방면에서 학문적 업적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다. 반세계화 시민단체인 아탁(ATTAC)의 자문위원이기도 하다. 이호근(전북대 법대), 구춘권(영남대 정외과), 이해영(한신대 국제관계학), 임운택(계명대 사회학) 교수 등이 그를 사사했다. 저서로는 <노동운동의 미래 또는 종말> <새로운 자본주의> <새로운 제국주의> <민주주의의 위기>(공편)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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