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태(국민대 국문학) 교수의 번역서, <기타 잇키--천황과 대결한 카리스마>(마쓰모토 겐이치 지음, 정선태, 오석철 옮김, 교양인, 2000)는 눈 밝은 사람이 아니라면 접하기 어려운 책일 것이다. 이 두꺼운 책을 번역하게 된 생각의 뿌리는 무엇일까가 궁금했었는데, 오늘 <교수신문> 2010년 8월 23일자에 번역자의 칼럼을 읽었다. 그 가운데 한 대목.
자신의 생각이 정당하며, 정당한 자신의 생각을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하고 있는 국가 기구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기타 잇키의 사상은 ‘치명적인 매력’으로 다가올 수 있다. 치명적인 매력에 들린 이들은 미리 파국을 예상하지 않는다. 아니 예상하지 못한다. 특히 국가 기구를 장악하기만 하면 자신의 의도를 관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유혹만큼 강렬한 게 어디 있을까. 그런 유혹의 이면에 도사린 파국을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할까. 히틀러와 괴벨스의 죽음이 웅변하듯이 ‘나의 제국’을 실현함으로써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낭만적 정신’은 종종 참담한 최후에 도달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곤 한다.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기타 잇키의 사상적 행방을 추적하면서 그를 ‘낭만적 혁명가’로 자리매김한 저자가 빠뜨리고 있는 것이 바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막스 베버의 말을 빌면, 물리적 강제력 즉 폭력에 기초한 국가는 “공포와 희망이라는 지극히 강력한 동기와 그 외에 매우 다양한 종류의 이해관계”를 통해 구성원의 복종을 유도한다. 그럼으로써 지배 세력들은 안정적으로 모든 것을 독점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다. 그렇다면 기타 잇키가 구상한 ‘나의 제국’은 이런 국가와 얼마나 거리를 둔 것일까. 그는 재벌들과 부패한 관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천황의 국가’가 안고 있는 모순들을 일소하고 새로운 ‘나의 제국’을 수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국가라는 정치적 조직체는 결코 국가의 존재 근거를 뛰어넘을 수 없다. 좌파든 우파든 국가를 중심으로 사유를 전개하는 이들이 자기모순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가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는 기타 잇키의 사상 역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조금은 뜬금없어 보이지만 이 책을 읽고 번역하면서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 다름 아닌 국가와 개인의 문제였다. 이상적인 국가가 있기나 한 것일까. 개인의 욕망과 자유와 행복을 전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국가라는 게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착한 자본주의’나 ‘도덕적 자본주의’라는 말이 가진 자들의 탐욕과 현실의 모순을 은폐하기 위한 僞裝의 수사학이듯이, 이상적 국가라는 것도 자신의 지배 욕망을 은폐하기 위한 수사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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