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에 2012년 1월 6일 오후 5시 59분 31초에 올라온 글, 남루의 시대, 열망의 시간. 편집자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청춘이 살아남는 법'이라고 제목을 뽑은 듯싶다.
남루의 시대, 열망의 시간
<동물농장>과 <1984>의 저자로 유명한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서 "아주 어릴 때부터, 아마도 대여섯 살 때부터 나는 내가 커서 작가가 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스무 살 전후 여러 해 동안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려고 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런 중에도 그것이 자기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어서 조만간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가리라는 걸 의식하고 있었다고 털어놓고 있다.
같은 제목을 표제로 삼은 산문집 <나는 왜 쓰는가>(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에서 이 대목을 읽으면서, 아마 누구나 그러했을 테지만, 나도 자연스럽게 나 자신의 그 나이 때를 돌아보게 되었다. 대여섯 살 때 나는 나의 미래에 관해 대체 무슨 생각이라는 걸 가져보기나 했던가. 또, 스무 살 무렵이면 대학생이 되어 있을 때인데, 그때 나는 자신의 '본성'에 관해 어떤 자각을 가지거나 그 본성에 거스르는 일을 결행할 인생의 위기 같은 것에 부딪혀 있었던가.
물론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이 다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재능이 나타나는 시기와 방식도 서로 같지 않기 때문에 오웰의 조숙에 위축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자기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 해로울 것은 없다. 오웰이 식민지 인도에서 영국인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것과 달리 나의 동년배들은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자아의식이라고 할 만한 것이 싹트기도 전에 분단된 국토의 어느 한쪽에 자동적으로 속하게 되었다.
얘기가 자못 거창해졌는데, 개인 사정을 말하면 우리 집은 해방 직후 38선 이북의 고향 속초를 떠나 남쪽 타관으로 내려왔고, 그에 따라 자연히 나는 떠돌이 피난민 같은 느낌 속에 소년기를 보냈다. 경상북도 봉화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쓰면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충청남도 공주로 이사한 뒤에는 다시 충청도 사투리를 익히면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집에 오면 또 부모가 쓰는 강원도 말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것은 우리 집에만 닥친 예외적인 고초였던 것은 아니다. 분단과 전쟁을 전후해서 수백만 인구가 별의별 기막힌 곡절에 따라 월남 또는 월북을 했고, 그중 상당수는 평생 부모 자식과도 생이별을 하지 않았던가.
사라진 줄 알았던 기억 속에서 용케 대여섯 살 무렵의 장면 두엇이 되살아난다. 탄광으로 유명한 강원도 장성(지금의 태백시)에 잠시 살고 있을 때였다. 무더운 여름날, 흰옷 입은 어른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뭐라고 구호를 외치며 만세를 부르기도 하는데, 여자들과 아이들은 큰 구경거리가 난 듯 길가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추측건대 그것은 아마 8·15 해방 1주년을 맞아 벌어진 군중들의 시위행진이었을 것이다.
다음에는 집안에서 본 광경이다. 할아버지가 외출하고 나면 아버지는 벽에 걸린 이승만 사진을 떼어내고 대신 김구 사진을 걸곤 했다. 그러나 저녁에 돌아온 할아버지는 화를 내며 도로 이승만 사진으로 바꾸어 걸었다. 다음날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고, 그러다 보면 그것이 부자 간의 격한 시국 토론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나의 대여섯 살은 작가가 될 꿈을 꾸는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척박함 속에서 마치 태풍을 만난 조각배처럼 정치의 압도적인 위력에 휘둘려야 했다.
문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선입견 중에는 그들이 게으르고 술을 좋아하고 세상물정에 어둡다는 것이 있다. 그래서 과거 한때 글 쓰는 사람이라면 장가드는 데도 넘어야 할 고비가 하나 더 있었다. 하지만 50년 가까운 내 문단 경험에 의하면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순진하고 고지식한 문사들이 눈에 잘 띄기는 하지만, 영악하고 이재에 밝은 문인도 많다. 선량하고 소심한 문인이 있는가 하면 주먹 휘두르는 걸 마다않는 문인도 있고, 두주불사도 있지만 술 같은 건 아예 입에 못 대는 사람도 없지 않다.
요컨대 문인이란, 알고 보면 스님도 목사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데, 일반인과 똑같이 오욕칠정(五慾七情)에 괴로워하는 존재들이다. 다만 문인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어린 시절 책읽기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나도 문필가가 되려고 그랬는지, 문자를 해독할 수 있게 된 뒤부터는 인쇄된 종이만 보이면 책이든 신문지 조각이든 식탐하는 어린애처럼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시절 우리 주위에는 책다운 책이 너무도 빈곤했다.
그럭저럭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었을 무렵, 다행히 나는 서류 전형만으로 원하는 학교에 합격되었으므로 4월 1일 개학 때까지(5·16 쿠데타 뒤인 1962년도부터 3월 개학으로 당겨져 지금까지 관행으로 굳어졌다) 석 달 넘는 동안 학교 공부에서 해방되어 한껏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마침 우리 집에는 멀리 목포에서 공주사대에 시험 치러 온 학생이 하숙을 들었다. 그는 시험도 치기 전에 이미 합격한 사람처럼 이부자리는 물론이고 사과궤짝 서너 개에 책까지 잔뜩 담아가지고 왔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모두 문학책이었다. <문학예술>, <현대문학> 같은 잡지도 있었지만 처음 보는 시집·소설책도 많았다. 나로서는 눈이 휘둥그레질 일이었다. 그는 보물 상자를 열듯 책을 꺼내서 선선히 나에게 빌려주었고, 책에 대한 만성적 갈증에 시달리던 나는 맹렬한 기세로 책이 주는 쾌락에 빠져들었다.
그때 읽은 책들 가운데서 무엇보다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손창섭(孫昌涉)의 소설집 <비 오는 날>(일신사 펴냄, 1957년)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어쩌다 손에 들어온 월간지 <학원>을 통해 교과서 바깥에도 흥미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중학생이 되어서는 이광수, 김내성의 소설과 <삼국지>, <수호지>, <옥루몽> 따위를 탐독했지만, 나에게 그런 것들을 '문학'의 개념에 결부시켜 사고할 능력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어떻든 <비 오는 날>은 나로서는 모든 지난날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짙은 초록색 바탕 위에 폐결핵 환자의 각혈처럼 검붉게 칠해진 표지의 장정부터가 불온한 느낌을 주었는데, 과연 거기에는 나의 상상을 뛰어넘는 암울하고 절망적인 삶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었다. 고압전류에 감전된 듯한 전율에 떨면서 나는 손창섭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거기 묘사된 악몽과도 같은 불길한 인생들을 목격함으로써 나는 드디어 문학이라는 이름의 위험한 세계를 만났다고 믿었다. 그것은 6·25 전쟁의 참극에도 불구하고 무탈하게 지탱되던 소년 시절의 평화와 순수함이 나의 내부로부터 부서져나가는 일대 번신(翻身)의 체험이었다.
누구나 소년에서 청년으로 변해가는 성장의 시기에는 정신적 상승의 열망을 품게 마련이다. 그런데 손창섭의 소설은 삶의 누추함을 드러내는 그 가차 없는 통렬성으로 해서 여린 감성을 뒤흔드는 충격 효과를 발휘할 수는 있었지만, 그의 문학 세계를 감싸고 있는 전망의 암담함은 청소년 시기의 성장 지향과는 본질적으로 충돌하는 측면이 있었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우리나라에서 염상섭이나 채만식의 소설처럼 인생의 신산(辛酸)을 어떤 미화의 유혹에도 동요됨 없이 실상에 가깝도록 묘사한 작품은 비평가로부터는 높게 평가받을지 몰라도 독자들에게는 외면받기 일쑤인 반면에 성장 소설 내지 연애 소설의 범주에 드는 작품들은 대체로 독자의 애호를 받는다. 김정한(金廷漢), 송기숙(宋基淑), 이문구(李文求)처럼 문학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남녀의 사랑을 다루는 데 서투른 작가들이 잘 팔리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마 그 까닭의 하나는 한국에서 문학 독자의 주력 부대가 젊은 세대이기 때문, 다른 말로 성인 독자가 빈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든 내 정신의 지배자는 손창섭에서 차츰 함석헌으로 옮겨갔다. 1958년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 맞은 봄이었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우리 학교에는 사대생들이 교생 실습을 나왔다. 교생들이란 대개 서투르고 쩔쩔 매어 교실 분위기를 산만하게 만드는데, 유독 국어 교생 한 분은 아주 능숙하게 수업을 진행할뿐더러 우리보고 무엇이든 기탄없이 질문하라고 유도했고 자상한 설명으로 우리를 매혹했다.
나는 단 한 시간의 수업으로 홀딱 반해서 그에게 개인적으로 접근했고, 교생 실습이 끝난 뒤에도 접촉은 이어졌다. 공주대학교 명예교수인 시인 조재훈(趙載勳)이 바로 그 사람인데, 나는 요즘도 1년에 한두 번쯤 그를 만난다.
무엇보다 조재훈의 하숙집을 처음 찾아갔을 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그의 방은 들창과 출입구를 제외한 사방 벽이 온통 책으로 덮여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과궤짝 서너 개와는 비교도 안 되는,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다. 당연히 나는 여러 권의 책을 그에게서 빌려보았는데, 그중 단연코 잊지 못하는 것은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성광문화사 펴냄, 1950년)이다.
나는 이미 <사상계>에 연재되던 함석헌의 글을 읽고 그의 독특한 문체와 강렬한 비전에 매혹되고 있었지만, 그에게 이런 역사책이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내가 흥미를 보이자 조재훈은 가져다 읽어보라고 책을 꺼내주었고, 나는 연신 감동하면서 책에 몰입했다. 얼마 후 다시 그 책을 빌려다 읽었고, 그 후 세 번째 빌리러 갔을 때에는 조재훈은 아예 나보고 책을 가지라고 했다. 지금도 그 책은 귀중본의 하나로 내 서가에 꽂혀 있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는 <비 오는 날>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나를 격동시켰다. 비유컨대 <비 오는 날>이 나를 따뜻한 온실에서 바람 불고 잡초 무성한 들판으로 끌어냈다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는 황량하고 캄캄한 벌판 가운데 서 있는 나에게 환한 관솔불 하나를 건네준 것이었다.
알다시피 함석헌은 20세기 한국을 대표할 만한 인물의 한분으로, 그의 사상의 깊이와 넓이는 아직 제대로 정리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어쨌든 당시의 어린 나에게는 현실에 타협 않는 그의 불굴의 이상주의와 민족사의 고난을 영광의 모멘트로 해석하는 그의 전복적 사관이 피난민 같은 생활의 각박함에 맞서 나 자신의 소망을 밀고나가도록 고무하는 용기의 한 원천이 되었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는 한국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간행된 탓에 대중적으로 널리 읽힐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1973년 YMCA가 함석헌의 이 책을 기념하기 위해 주최한 어느 공개 대담에서 그는 자신에게도 책이 남아 있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대폭 손질하고 보완하여 1965년 <뜻으로 본 한국 역사>라는 제목의 개정판을 내었다.
이 개정판은 단지 제목만 달라지고 한국 전쟁을 서술한 부분만 추가한 것이 아니다. 사실 나는 1950년의 초판과 1965년의 개정판을 함석헌의 문체 변화 및 그에 따른 사상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비교해보고 싶은 내심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초판의 작은 활자와 불량한 인쇄 상태를 감안하면 현재의 내 시력으로는 그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는 것이 유감이다.
'학교 폭력', '교실 붕괴', '청년 실업', '무한 경쟁' 같은 살벌한 낱말들이 난무하는 시대에 이런 글을 쓰는 심정이 스스로도 한심하다. 돌이켜보면 1950년대는 한 마디로 전쟁과 빈곤에 의해 규정되는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도 억압적이고 폭력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의 풍화작용 탓인지 나에게 그 시대는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따뜻하고 투명했던 날들로 미화되어 있다.
공주 같은 시골에서는 과외고 학원이고 도무지 없었고, 고3 한 해 동안만 입시 공부에 집중하면 대학에 갈 수 있었다. 가정 형편 때문에 진학을 체념한 동급생도 많았지만 그들이 교실의 분위기를 망가뜨리지 않았고, 대학 입시에 떨어지는 것을 인생의 실패로 여기는 풍조도 아직 없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물질적 풍요가 증가할수록 나의 세대가 누린 행복의 총량은 점점 더 감소하여, 오늘날 중학생은 최악의 우범 집단으로 묘사되는 비극적 사태에 이르렀다.
거듭되는 얘기지만, 소년에서 청년으로 변해가는 시기에는 누구나 정체불명의 열망과 일종의 광증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그래서 때로는 청소년들의 좌절과 일탈이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하고, 더러는 극단적인 범죄의 양상으로 나타나 개탄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그런 부정적 외피 자체가 아니라 외피 안에 들어 있는 순수한 영혼들의 상승을 향한 갈망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청소년들의 경우 왜 갈망의 에너지는 자아실현의 동력으로 되지 못하고 타자를 향한 또는 자기 자신을 향한 파괴력으로 분출되는가. 그들에게 가해지는 압박의 사회적 실체는 어떤 것인가. 우리가 고민하고 밝혀내야 할 것이 바로 그것인데, 내 생각에 문제는 언제나 그들이 아니라 기존 사회이다.
가령, 최근 대구의 중학생 자살 사건을 계기로 학교 폭력이 새삼 떠들썩하게 거론되고 있지만, 그렇게 떠들어대는 오늘의 주류 언론이 그럴 만한 도덕적 자격을 갖고 있는지 나에겐 의문이다. 그들 자신 어린 중학생에 불과한 가해 학생 몇몇을 감옥에 집어넣고 그들을 닦달하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우월자로서의 기존 체제가 법과 도덕의 이름으로 약자에게 저지르는 또 하나의 가학 행위, 일종의 마녀 사냥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가령 이른바 '벤츠 여검사 사건'의 경우, 이것은 단지 실정법의 위반 여부에 관계된 단순한 형사 사건이 아니라 이 나라 상층 계급의 부패와 타락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 실증하는 구조적 사건이다. 이 나라에서 판사나 검사 또는 판·검사였다가 지금 변호사인 분들은 반드시 이 사건을 깊이 들여다볼 의무가 있다. 내 생각에 이 사건을 보고서도 자기 직업에 치욕과 절망을 느끼지 않는 법관은 법관으로서 구제불능이다.
그런데 오늘날 '벤츠 여검사 사건'의 당사자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이 사회의 실권자들이고, 그런 실권자의 일원이 되기 위해 또는 그런 실권자의 일원으로 만들기 위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전쟁을 끝내는 데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자기 실력에 맞게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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