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변호사협회의 기관지인 <대한변협신문> 2012년 1월 23일자 제384호, 박훈 변호사 인터뷰.
“석궁사건 재판때 사법부에 엄청난 분노감 느껴”
영화 시사회에서 ‘부러진 화살’이라는 작품을 보았다. 석궁을 들고 가 판사를 쐈다는 교수의 재판 광경을 심도 있게 연출하고 있었다. 정지영 감독이 오랜만에 심혈을 기울여 발표한 작품이었다. 영화감독의 눈을 통해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법정의 모습들이 나타났다. 판사가 증거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떤 진실도 은폐되거나 왜곡될 수 있다는 걸 영화는 말해주고 있었다.
영화 속의 주인공은 창원에서 활동하는 운동권 출신의 가난한 노동전문 변호사였다. 그러나 그는 서울에 올라와 거대한 골리앗인 사법부와 싸우는 다윗 같은 영웅으로 그려져 있었다. 영화의 자막은 실제의 주인공이 박훈 변호사라는걸 알려주고 있었다.
2012년 1월 3일 땅거미가 내리는 오후 5시경 창원시 상남로 이면도로에 있는 허름한 건물에 도착했다. 상점들과 목욕탕, 음식점이 가득 들어차 있는 낡고 허름한 상가였다. 구석의 털털거리는 낡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복도를 가운데 두고 부동산 소개업소나 직업소개소 같은 느낌의 사무실들이 마주보고 늘어서 있었다. 그 중간쯤 ‘박훈 법률사무소’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석궁사건을 일으킨 김 교수의 가족이 이곳까지 내려와 변호사를 선임했을 정도면 그들의 궁박했던 입장도 대충은 짐작할 것 같았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목제책상들이 놓인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벽에 붙어있는 목제캐비닛 위로 서류를 담은 판지상자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허름한 야전점퍼를 입은 노동자풍의 남자 몇 명이 상담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창문 앞의 책상이 박 변호사의 자리인 것 같았다. 별도의 변호사실이 없었다. 작달막한 키에 검은 얼굴의 남자가 구석의 비닐소파에서 손님과 얘기하다가 나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훈 변호사였다. 전형적인 털털한 시골아저씨 인상을 풍겼지만 안경 뒤에서 만만치 않은 지적수련의 눈빛이 번쩍이는 것 같았다. 그는 흔히 볼 수 없는 다른 종류의 변호사가 틀림없을 것 같았다.
“영화 속의 얘기들이 어느 정도까지 진실입니까?”
일단 진실과 영화를 구별해 확인해 둘 필요가 있었다.
“공판과정의 장면들은 전부 진실입니다. 그리고 주인공 변호사의 사생활도 80%는 저를 모델로 그린 겁니다. 영화적 흥미를 위해 삽입한 여기자와 잠을 자거나 김 교수가 감옥 안에서 강간을 당한 부분 정도만 사실이 아닙니다.”
“영화를 보면 나중에 주인공 변호사가 분노해서 재판장에게 물병을 집어 던지려는 장면이 나오던데 그것도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너무 울화가 터져서 재판정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구치소로 감치되어 갈 각오를 했었습니다. 석궁사건 마지막 변론 때 저는 재판부에 대해 화가 난 정도가 아니라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법정구속을 당하고 자격을 박탈당하더라도 물리적으로까지 재판장을 응징하고 싶었습니다. 재판을 끝내기 전날 집사람에게 얘기했습니다. 이 사건은 변호인의 위치가 아니라 사법정의를 위한 내 자신의 일이 됐다고 말입니다. 사법부의 전횡독재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를 궁리하다가 물병을 준비해 재판장에게 던지려고 계획했었죠. 아내에게 애들 잘 키워달라고 부탁하고 나갔어요. 그런데 현장에서 방청객들이 먼저 계란을 투척하고 그러는데 저까지 물병을 던지면 폭동이 될 것 같아 자제했습니다.”
그가 잠시 중단했다가 말을 계속했다.
“사법부는 국민으로부터 선출되지 않은 집단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 영향력을 미치면서도 국민으로부터 한 번도 통제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현지와 유착되어 있는 ‘향판’들은 또 다른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대법원장과 법원장, 검찰총장, 검사장은 모두 선거로 뽑아야한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판·검사 범죄는 특별법원에서 처리해야 합니다. 제가 경험한 바로 석궁사건은 사상유례 없는 사건입니다. 실체적 진실을 알기 위해 신청한 증거가 모두 기각된 사법테러이기도 하구요. 이 사건이 ‘부러진 화살’이라는 영화가 됐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사법부가 얼마나 반성 없는 집단인가를 국민이 알았으면 합니다.”
“재판부가 어떻게 했기에 변호사가 그렇게 분노했나요?”
“경비원의 진술과 화살을 맞았다는 박 판사의 증언 중 정확히 일치하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현장에 끝의 촉이 뭉툭해지고 뒤쪽이 부러진 화살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없어졌어요. 그 외에도 이상한 점이 많았습니다. 박 판사는 법조생활을 25년 이상 해 오신 분인데 증언이 왔다갔다 하고 진술이 번복된 것 같았어요. 아랫배 쪽에 화살을 맞았다고 해서 나온 증거물을 보면 러닝셔츠, 내복, 와이셔츠, 조끼, 겉옷 순서로 옷을 입고 있었는데 피가 순차적으로 배어 있어야 맞는 겁니다. 그런데 와이셔츠에만 핏자국이 없는 겁니다. 이상하죠.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측 감정서를 보면 그 피는 동일한 남성의 피다, 그 정도만 적어놓은 거예요. 검찰이 제출한 화살에는 혈흔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그 옷에 묻은 피가 과연 박 판사의 피인지 정확히 확인해 보자고 했죠. 그리고 박 판사를 불러서 왔다갔다 진술이 흔들리는 부분을 확인하고 싶다고 했는데 재판부에서는 무조건 안 된다면서 기각하는 겁니다. 박 판사가 고등법원 부장판사이기 때문에 법원이 제 식구 감싸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실체적 진실은 일단 밝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너무 그렇게 증거신청을 차단하는 걸 보고 저는 혹시 박 판사의 자작극이 아닐까하는 의심까지 가지게 됐습니다. 변호사가 사건의 실체를 조금도 밝혀낼 수 없도록 몰아버리는 겁니다. 마지막에 저는 이건 재판이 아니고 사법테러라고 했습니다. 이러면 안 된다고 했죠. 부러진 화살에 대해서 검찰은 그 존재자체도 모르는 겁니다.”
사법부에 삶의 줄을 댄 변호사로서는 대단한 용기였다. 그 누구도 변호를 하지 않는 사건을 그는 맡아서 한 것이다. 그리고 사법부와 싸운 것이다. 그의 평형감각을 알고 싶었다.
“석궁을 가지고 간 김 교수는 어떻게 보십니까?”
“김 교수와 얘기하면서 내가 돌아 버리겠더라고요. 그 양반이 나보고 법은 아름다운 거라고 하더군요.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아서 이렇게 됐다고요. 법이 뭐가 아름답습니까? 김 교수와 참 많이 싸웠는데 철저한 원칙론자이고 판사들 못지않게 김 교수 역시 엘리트주의에 젖어있어요. 동시에 확신범이기도 하죠.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자기는 석궁을 가지고 간 건 맞는데 쏘지는 않았다는 거예요. 석궁을 가지고 간 죗값을 받으라면 당연히 받겠는데 왜 덮어씌우냐는 거죠. 그래서 왜 박 판사에게 상처가 났느냐고 물었더니 김 교수는 자기도 모르겠다는 겁니다. 저는 일단 실체적 진실을 밝혀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자작극일 수도 있고 그렇다면 왜 굳이 그랬을까 하는 의문도 떠올랐습니다. 저는 사람이 어떻든 간에 확신범은 일단 변호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테스트에서 석궁은 막강한 위력이 증명됐다. 가까이서 사람에게 쐈다면 옷을 뚫고 10㎝ 이상 깊이 박혀야 맞다. 잘못 쏴서 콘크리트 벽에 부딪치면 끝이 뭉툭해지고 부러질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박훈 변호사는 다른 사건도 이런 식으로 변호합니까?”
어떤 종류의 변호사인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다.
“2001년 4월 대우자동차에서 1750명을 해고하면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저는 근로자들의 변호사로서 회사 측에서 고용한 깡패인 용역과 경찰이 근로자들의 정상적인 노동행위조차 방해하는 걸 봤습니다. 국가권력과 주먹이 정상적인 노동권을 침해하는 거죠. 그래서 법원의 업무방해금지가처분명령을 받아내 즐거운 마음으로 회사 측과 경찰에 보여줬습니다. 저는 당연히 출입봉쇄를 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법원의 결정을 무시하고 더 강하게 나가더라고요. 법이나 법원이 의미 없는 나라였습니다. 현장에서 하는 근로자들의 행동에 저도 동참했습니다. 거기서 경찰의 방패에 찍히고 군홧발에 얻어맞아 일주일동안 입원을 했었습니다. 나중에 귀가 들리지 않고 스트레스가 심해서 지리산에 가서 휴양을 한 적도 있었죠.”
“그렇게 투쟁을 할 때 대한변협에서 지원한 일은 없습니까?”
“대한변협 박재승 협회장님이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서 직접 병원으로 찾아오셨어요. 저는 사실 대한변협에서 품위를 손상시켰다고 징계를 할 줄 알았어요. 웃통을 벗고 같이 달려들었으니까요. 저에 대해 다시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고통 받는 노동자와 함께 싸우는 건 품위손상이 아니라 변호사의 가치를 높이는 행위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과 같이 뒹굴고 싸워나가야 하는 직업이 변호사인 거죠. 그런데 대한변협 협회장님이 오셔서 저보고 ‘영감 훌륭하네’ 하시더라고요. 그 말에 큰 용기를 얻었었습니다.”
그의 내면 속에는 행동을 뒷받침하는 강한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법 지식을 나누는 걸 넘어서 자기까지 제물로 던진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지나온 세월의 얘기를 좀 들을 수 있을까요?”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탄광막장에서 30년 광부로 일하던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죠. 아버지는 갱 속에 들어갔다가 두 번이나 매몰된 적이 있어요. 한번은 사흘 만에 살아나오고 다른 한번은 일주일 만에 구출됐죠. 광부인 아버지를 따라 어려서부터 함백탄광, 성주탄광 등 떠돌아다녔어요. 단칸방 하나 얻을 수 없는 힘든 살림이었죠. 열네 번 이사 끝에 화순탄광촌에 정착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탄광생활에서 얻은 진폐증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수많은 일을 당하면서 어머니는 저보고 꼭 공부해서 힘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노동자의 아픔과 서러움이 뼛속까지 배어 있었다. 그가 얘기를 계속했다.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가전제품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취직을 했습니다.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열심히 한 까닭에 학점이 좋지 않아 취업이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내가 맡은 역할은 작은 대리점들을 착취하는 일이더군요요. 물건을 파는 게 아니라 강제로 떠넘기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큰 거래처에는 회사가 노예같이 비굴하고요. 한번은 큰 거래처 사람과 싸운 적이 있었죠. 상부에서 가서 빌라고 하는 명령이 떨어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거래처 사람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빈 적도 있습니다. 거기 그대로 있으면 아주 더러운 놈이 될 것 같았어요. 도저히 그렇게 살 수 없어서 몇 푼 퇴직금을 받아가지고 신림동에 가서 죽기 살기로 공부해서 40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실패하면 용산전자상가에 가서 다시 영업사원으로 뛸 생각이었죠.”
“그래서 어떤 법조인이 되고 싶었습니까?”
“법률가가 돈이나 권력에 집착하는 순간 자기가 해야 할 본분을 망각하고 자본주의의 첨병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현실에서 보니까 변호사들이 자기 지식이나 능력을 돈 받고 파는 데 너무 익숙해 있는 것 같아요. 변호사와 돈은 물론 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사법연수원 2년차 때 내 눈에 비친 멘토가 김기덕 변호사였습니다. 그 사람은 노동현장에 있다가 사법시험을 치고 연수원을 나온 후 다시 노조 전임으로 들어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 저럴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죠. 거기는 월 80만원 정도의 급료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고민했죠. 돈을 벌어놓고 들어갈까 아니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갈까 망설였죠. 그러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자 하고 연수원 2년차 때 저도 노조에 전임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최소한으로 먹고 살 정도면 되지 않느냐고 자문했었습니다. 제가 지금 마흔여섯살인데 지금까지 집도 없고 세들어 살고 있습니다. 차도 얼마 전에 아내 명의로 처음 샀죠.”
“투쟁하는 것 말고 평소의 삶은 어떤 겁니까?”
“취미가 없고 술 먹으면서 남과 얘기하는 걸 즐깁니다. 연말연초에 고전을 사서 그걸 읽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금년은 힘들 것 같습니다. 현역에서 은퇴하면 글쓰기에 전념하고 싶은데 그런 날이 쉽게 오지는 않을 것 같아요. 먹고 살기 위해 끊임없이 일해야 하는 그런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와 얘기하는 사이에 어느덧 들끓던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와 간단히 막걸리를 곁들인 조촐한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그는 스펙트럼의 반대쪽 끝에 가 있는 변호사였다. 그는 이번에 정계진출을 시도할 거라고 했다. 아직 현재진행형인 그가 추구하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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