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일 화요일

표정훈, 대한민국이 읽은 책에 대한 인터뷰, 한국일보 조태성 기자, 2018년 10월 2일

베스트셀러로 읽는 20세기 한국


“자유교양대회에 나가기 위해 책을 읽었다.” 최근 방영된 tvN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3’의 ‘그리스 아테네’ 편에 출연한 유시민 작가의 말이다. 예능 프로그램이니 방송에선 교양 함양을 위한 대회였다는, 간략한 설명만으로 넘어갔다. ‘자유교양대회’는 박정희 정권 때인 1968년 시작돼 1975년 중단된 대회다. 교양 함양을 위해 동ㆍ서양 고전을 초ㆍ중ㆍ고교생에게 읽혀 평가하는 대회였다. 각 학교가 ‘대통령기 쟁탈’을 목표로 공부 좀 하는 아이들을 대표선수를 뽑아 스파르타식 교육을 했다.
자유교양대회는 1970년대 중후반 ‘권당 200원짜리’ 문고판의 유행에도 큰 영향을 줬다. 역설적이게도 문고판 세대는 ‘박정희 체제’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누가 어떤 의도로 무엇을 써내거나 읽도록 강요하든, 헤아리는 건 오로지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를 통해 ‘읽는 자들의 무의식’을 읽어내려는 시도가 지속돼 온 이유다.

유명 출판평론가 표정훈(49)씨의 신간 ‘대한민국이 읽은 책 – 시대와 베스트셀러’는 20세기 후반기 한국인의 무의식을 분석한다. 많이 팔렸다고, 유명하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책은 아니지만 표씨의 신간을 돋보기 삼아 베스트셀러에 깃든 사회심리를 들여다 볼 수 있다.

국내 베스트셀러의 시작점은 1954년 서울신문 연재물을 묶어낸 정비석의 ‘자유부인’이다. 대학교수 부부의 일탈을 그려낸 이 소설은 당시로는 기록적인 10만부 가까이 판매됐고, 작가 정비석이 황산덕 서울대 법대 교수와 뜨거운 논쟁을 벌이면서 화제에 화제를 거듭했다. 문학적 완성도 문제를 떠나 “최초의 사회현상으로서 베스트셀러였다는 점”은 물론, “대중적 명사 또는 전국적 유명인으로서의 작가를 탄생”시킨 사건이었다.
1970년대는 두 가지 경향이 겹쳤다. 철학자 김형석ㆍ안병욱으로 상징되는 에세이와 세계 문학전집이라는 중산층의 교양이 한 켠에 있었다면, 그 반대편에는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사상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문제작이 나왔다. 전혀 상이한 베스트셀러의 면면에는 산업화의 두 얼굴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시사주간지 주간한국에 ‘스물 두 살의 자서전’이라고 연재되다 1981년 ‘인간시장’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김홍신 작가의 소설은 ‘최초의 밀리언셀러’다. 100만부 판매 기념으로 출판사가 작가에게 국산 중형차인 스텔라를 사준 일화는 당시 큰 화제를 모았다. 장총찬이란 주인공의 화끈한 액션을 강조한 대중소설이었던 ‘인간시장’은 1980년대 신군부 아래서 “진짜 악한을 악한이라 말하지 못하는 암울한 시대, 악한이라 말하는 사람이 악한으로 지목되어야 했던 어두운 시대”의 반영이기도 했다.
암울했던 시절이었으니 저자 없는 책도 쏟아졌다. 그 중 대표적인 책은 동녘출판사가 1983년 내놓은 ‘철학에세이’다. 마르크스주의를 설명한 이 책은 ‘조성오’라는 저자가 엄연히 있었지만 ‘동녘 출판부’ 이름으로 나갔다. 용케도 검열을 피한 이 책은 운동권 필독서가 되면서 100만부 이상 판매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통계는 없다. 책이 팔리면서 바뀌게 마련인 1쇄, 2쇄하는 식의 판쇄 숫자조차 고치지 않았다. 검열 당국의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 시절 ‘사회과학 베스트셀러’가 천한 가혹한 운명이었다.

민주화가 본격화된 1990년대를 열어젖힌 베스트셀러는 ‘소설 동의보감’ ‘소설 토정비결’ ‘소설 목민심서’ 같은 역사소설이었다. 이 소설들이 다루는 인물인 허준, 이지함, 정약용은 엄격한 의미에서 당대 주변부 인물들이었다. 표씨는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역할 모델로 삼을 만한 역사 인물은 구국의 영웅이나 위대한 성군 일변도에서 벗어나 훨씬 더 다채롭게 넓어져야 했다”는 필요성이 반영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1990년대 중후반엔 적당히 진지하면서도 적당히 대중적인 위치에 놓인 ‘중간저자’가 출판시장을 이끌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한비야의 ‘바람을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박영규의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같은 책들이 대표적인 베스트셀러다. ‘근엄한 지식인’이 아닌 ‘솔직 발랄한 이야기꾼’이 탄생했다. 대중적 인문교양의 붐을 예고한 것이다.
표씨가 2018년에 20세기 후반 베스트셀러를 되돌아 본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출판의 위기가 기정사실이 된 디지털시대, 예전 사례로부터 힌트를 찾아낼 수 있길 바란다는 취지를 밝혔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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