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사태가 드러난 지금, 당시 연극계를 분노하게 했던 사건들을 되돌아보면 검열의 지극히 작은 일부분이었다. 방대한 규모로 블랙리스트가 실행되고 있었고, 연극인들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검열은 집요하고 혹독하게 계속되었다. 그 뿐인가. 연극인들의 저항을 공공지원에 목매고 있는 연극인들의 투정으로 호도하고 모욕했다. 연극계 내에도 그리고 연극계를 향해서도 여러 의견들이 있었다. 때로는 서로 갈등하기도 하고, 깊은 상처를 주고 받기도 했다. 그래도 길을 잃지 않고 블랙리스트 사태가 드러나는 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그 충돌과 갈등의 과정에서, 검열이 ‘예술지원’의 문제로 한정되지 않는 민주주의의 문제라는 점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연극제대관탈락 사태 당시 동료이자 피해자인 서울연극협회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인 서울연극협회를 지지하는 활동이 아닌, 자칫 양비론에 빠질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토론회’를 개최하였던 것은 대관탈락 사태의 문제가 그 결과만큼이나 과정의 투명성, 공정성 훼손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공공기관의 ‘과정’에 대해 문제제기 하기 위해 연극계 내부에서부터 건강한 공론장에 대한 성찰이 필요했다. 그 고민이 대학로X포럼이라는 온라인 플랫폼을 여는 것으로 이어졌다.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저항은 연극계 외부를 향한 ‘싸움’만이 아니라 연극계 안의 성찰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플랫폼을 만들고, 자발적 참여를 통해 하나 하나의 과정을 만들어갔던 것이다.
연극계 블랙리스트 싸움은 겉으로 드러나기에는 그 대응의 격렬함 등으로 조직적인 활동으로 비춰지지만, 특정한 조직을 두지 않고 그때그때 사안마다 대학로X포럼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이슈의 확산과 과정을 공유하면서 진행되었다. 대학로X포럼은 온라인 플랫폼으로 대표자나 집행부가 있는 조직이 아니다. ‘팝업씨어터’ 거리시위의 경우, 오프라인 시위로 진행되었지만 그야말로 알음알음 이슈를 공유하면서 전개되었다. 대학로X포럼은 이슈를 공유하는 수단이다. 물론 한 달 여 시위가 계속되는 동안 릴레이 시위에 참여하는 이도 있고, 내내 릴레이 시위의 진행을 맡는 이도 있다. 이 또한 특정한 그룹이나 집단 혹은 조직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슈가 공유되고 참여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었다. 각자 자신이 참여할 수 있는 만큼, 참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활동이 이루어졌다.
조직을 갖추었던 활동도 있다. ‘권리장전2016_검열각하’, 검열백서, 광장극장블랙텐트 등은 일정 기간 프로젝트를 책임있게 운영해야 하는 활동으로 ‘예술감독’ ‘극장장’ ‘사무국장’ 등의 직함을 두고 조직을 갖추었다. 그러나 처음 비공개로 진행되던 권리장전이 이제 참여를 열어두고 있는 것이나 검열백서위원회가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여러 쟁점을 두고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자발성’과 ‘개방성’의 원칙을 지키고자 했다. 광장극장블랙텐트는 운영위원회가 있었지만, 1월 7일 설치부터 3월 18일 해체까지 운영되는 동안 공연팀은 물론이고 극장운영에 많은 연극인, 촌민들이 참여했다. 대학로X포럼이 플랫폼이라면 좀 더 적극적인 대응과 연대를 위해 ‘블랙리스트 타파와 공공성 회복을 위한 연극인회의’가 조직되었는데, 이 또한 30여 명이 넘는 공동대표단으로 운영되고 있다.
자발성을 원칙으로 느슨한 네트워크를 통한 연대는, 발 빠르게 이슈에 개입하는 데에 한계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연극계의 활동이나 광화문캠핑촌과 예술행동위원회의 활동이 보여주듯이 느슨한 네트워크가 더 다양한 활동을 가능하게 하기도 한다. 광화문캠핑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많은 예술행동들은 참여하는 예술가들의 자발성에 기초한 협업이었다. 느슨한 네트워크는 조직의 결정이라는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서 참여자들의 제안이 빠르게 공유되고 그 과정에서 자발적 참여를 통해 새로운 협업이 이루어진다. 대학로X포럼의 경우 첫 토론회부터 발의와 진행 그리고 기록까지 자발적 활동을 통해 이루어짐으로써 세대 간의 다양한 관점들이 토론된다. 물론 이러한 느슨한 네트워크도 드러나는 활동만이 아닌, 네트워크를 움직여가게 하는 많은 땀을 필요로 한다.
블랙리스트 사태 이후, 미투 등 연극계에서는 여러 현안이 폭발적으로 터져나오고 있다. 그리고 블랙리스트 사태처럼 아직 그 사건의 소용돌이 안에 있는 것이 현실이다. 블랙리스트조사위 활동이 마무리되지만, 활동의 한계로 아직 밝히지 못한 사건들이 있다. 또한 블랙리스트조사위의 제도개선권고안과 책임규명권고안은 이제 실행을 앞두고 있다. 진상조사위 활동과는 별개로 연극계 안에서도 블랙리스트 사태가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그리고 피해 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연극계 성폭력 사건은 사건별로 진상조사위원회 활동이나 재판 등이 진행 중이다. 사건의 해결까지는 아직도 많은 난제들이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현안에 대해 연극계가 적극적으로 대응해왔기에 이만큼이라도 올 수 있었다. 이러한 활동들은, 조직이나 개개인의 직접적인 연관은 아니라 하더라도, 블랙리스트 사태에서 있었던 연대의 힘, 연대의 경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외부로 드러난 여러 활동들만이 아니라 그러한 활동들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도 관심과 기록이 필요하다.
블랙리스트 사태는 그저 부도덕한 권력에 의한 탄압 사건인 것만은 아니다. 연극인들에게는 예술가이자 시민으로서 자기 존재에 대한 성찰의 과정이기도 했다. 예술의 사회적 실천은 현대예술에서 중요한 테마다. 우리의 현대예술에서도 여러 다양한 활동들이 있었다.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저항이 여타 사회적 실천과 다른 점이라면 예술가 자신이 당사자인 이슈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로서의 싸움에 그쳤던 것이 아니다. 예술가로서 예술의 공적 지원의 파행에 대해 싸웠다면, 시민으로서 민주주의의 파괴에 맞서 싸웠다. 이 과정에서 연극은 싸움의 무기이자 자기성찰의 장소이고 연대의 공간이었다.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저항의 과정이 자기성찰의 과정이라 할 때, 그 성찰에는 연극인들의 ‘연극’에 대한 새로운 발견도 포함된다. 그래서 블랙리스트 사태, 이후가 더욱 주목된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soyeon14?fref=n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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