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선생님
1. 대학 처음 들어가 <대학의 이념>(K.야스퍼스)을 읽고, "대학은 자유와 고독"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배웠다. 선생은 야스퍼스를 자주 인용했고, 그걸 매우 좋아했다. 선생은 대학을 아주 사랑했고, 대학교수로서의 자유와 고독의 가치를 체현하고, 그로부터 한걸음도 이탈하지 않았다. 선생은 일생동안 대학과의 강한 연결을 갖고 있었다. 단독자로서의 지식인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사고한다. 그는 고독으로 생을 채웠다. 사교나 패거리에 속하지 않았고, 대학교수 이외의 다른 공적 타이틀을 거의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글로써 말했고, 가끔 말로써 채웠다. 지식인의 에센스가 무엇인지 확실히 체감케 했다.
2. 대학때 선생의 글을 많이, 자주 읽었다. <한국문학사>의 패기도 대단했지만, <문예비평사연구>도 잘 들여다보았다. 자신만의 문체를 갖고 있었고, 그 문체흉내내기, 표현 흉내내기는 당시 우리 대학생들의 한 멋이었다. 선생의 문장은 비문인데, 틀렸다고는 전혀 할 수 없고, 읽는 맛은 또한 희한했다. 문장만 봐도 이건 김윤식의 것이구나 알만큼 독특했다. 그때 문학은 힘이 있었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문학은 힘을 더하기 마련이다.
3. 선생의 글은 대학신문에도 자주 나타났다. 대학신문사 기자로서 가끔 그 글을 받았다. 원고지의 칸의 규격을 전혀 따르지 않고 썼고, 글자의 표준격을 전혀 따르지 않고 썼다. 자필원고 자체가 그의 체화된 자유의 경지를 보여준다. 선생의 원고를 정서하지 않으면 식자공이 판독하지 못했다. 정서하는 건 학생기자의 몫이었다. 신문이 나가면 꼭 신문사에 야단전화가 왔다. 시의 한 구절, 평론의 한두 글자가 틀렸다는 것이다. 우린 불평했다.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글씨로 써야지~~하면서. 생각해볼 수록, 지식인에게 글자가 생명이고, 한글자 한글자가 중요하다. 그의 엄청난 작업은 한글자 한글자로 쌓은 글자탑이다. 비유하자면, 마이산 탑사의 그 돌탑처럼 글탑을 쌓아낸 것이다.
4. 4.19특집호인 것 같은데, 신동엽의 시구인가..뭔가 틀린 글자 지적을 받은 후 학생편집장과 함께 선생의 집을 방문했다. 한번 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독특했다. 1층엔 사모님, 2층엔 교수님의 서재인 것 같았다. 사모님은 볼수 없었고, 선생만 뵙고...한잔 얻어마셨는지는 모르겠고...임종국, 백낙청, 김용섭 등 문학인, 평론가, 학자들의 몇가지 뒷담화같은 학문하는 얘기를 재미있게 들을 수 있었다. 지식인의 서재, 완전히 책 책 책...그 느낌이 진하다.
5. 선생은 문학하는 후배, 제자들로부터 주로 기억되겠지만, 선생과 유별나게 가까운 두 법률가가 계신다. 처음은 김영란 전대법관인데...김영란 학생이 대학 초년부터 선생과 (아마도 강의실에서) 알게 되었고, 그 총명한 김영란 학생에게 종종 교정을 부탁하면서, 소감을 듣는 걸 즐긴 것 같았다. 당시 선생의 책 서문에는 김영란 이름이 자주 나온다. 김영란은 대학시절, 법이 아닌 문학 글을 잘 썼고, 소설로 당선된 적도 있고, 당선과 상관없이 대학저널에 소설도 냈다. 선생과의 사제간 배움의 좋은 예라 하겠다. 김영란의 법률가의 문필력과 사고의 넓음, 그리고 약간의 탈속적인 지식인적 면모가 그 본래의 것이기도 하지만 선생과의 교류에서 온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
두번째 분은 안경환 교수이다. 문학자들을 제외하곤, 아니 어느 문학자보다 선생과 교류가 많았던 것이 안경환 교수다. 선생의 책이 (지금 언론에서는 200여권이라 나오는데), 안교수가 헤아리기론 170여권이 넘는다는 것이고, 그 중에서 안교수가 읽은 책이 120권 정도 된다고 했다. 말년 10여년간은 안교수는 언제나 선생과 연결되어 있었고, 선생의 건강이 사경을 헤멜때 그 사모님을 동반하면서 위로하는 역도 기꺼이 맡았다. 아마 사후에 관한 여러 부탁도 선생이 안교수께 한 것으로 느껴진다. 안교수는 학병세대와 관련하여 <황용주> 책을 썼고, <이병주> 관련 책도 준비하고 있고, 동.서 문학소양에서 폭과 깊이가 대단하고, 사투리도 같고 하여 토속정서도 잘 융합된 듯 했다. 안교수로부터 선생에 관한 얘기를 계속 전해들은게 몇년이나 된다. 안교수가 겪은 작년 '횡액'은 본인에게 힘들었지만, 생애말년의 선생에게는 안교수의 자유로운 시간이 하나의 예기치않은 선물일 수 있었을 것이다.
두번째 분은 안경환 교수이다. 문학자들을 제외하곤, 아니 어느 문학자보다 선생과 교류가 많았던 것이 안경환 교수다. 선생의 책이 (지금 언론에서는 200여권이라 나오는데), 안교수가 헤아리기론 170여권이 넘는다는 것이고, 그 중에서 안교수가 읽은 책이 120권 정도 된다고 했다. 말년 10여년간은 안교수는 언제나 선생과 연결되어 있었고, 선생의 건강이 사경을 헤멜때 그 사모님을 동반하면서 위로하는 역도 기꺼이 맡았다. 아마 사후에 관한 여러 부탁도 선생이 안교수께 한 것으로 느껴진다. 안교수는 학병세대와 관련하여 <황용주> 책을 썼고, <이병주> 관련 책도 준비하고 있고, 동.서 문학소양에서 폭과 깊이가 대단하고, 사투리도 같고 하여 토속정서도 잘 융합된 듯 했다. 안교수로부터 선생에 관한 얘기를 계속 전해들은게 몇년이나 된다. 안교수가 겪은 작년 '횡액'은 본인에게 힘들었지만, 생애말년의 선생에게는 안교수의 자유로운 시간이 하나의 예기치않은 선물일 수 있었을 것이다.
6. 과연 지식인이란 무엇일까. 지식인의 본령은 '글'로 산다는 것이다. 무릇 지식인의 다른 사람들과의 핵심차이는 평생동안 글쓰고, 글의 끝없는 절차탁마에 있다. 둘째, 지식인의 사고는 패거리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평과 비판은 그러한 호연독존의 자세에서 가능하다. 셋째, 지식인은 그냥 주장하지 않고, 그 근거와 자료를 끝없이 찾고 독해하면서, 자신의 해석을 논리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런 원형적 지식인의 모습에 가장 걸맞는 '자유로운 영혼의 글쟁이', 그리고 오직 그것으로 삶을 채워낸 분은 참으로 흔치 않은데, 김윤식 선생이 바로 그런 분이다. 글 내용 이전에, 그 삶의 자세와 결이 참으로 지식인으로서 오롯하다.
7. 그러기에 한때 읽었던 그의 책 중에서 몇권을 다시 찾아 읽으면서 저자의 존재를 음미하는 것, 이것이 김윤식을 추모하는 가장 김윤식적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의 책이 살아있으면, 그는 그냥 살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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