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막할 때면 읽고 또 읽었던 선생님의 글…인간을 배웠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고 김윤수 교수 추도사
‘읽다 그리고 쓰다.’ 2015년 9월 한국현대문학관에서 열린 ‘김윤식 저서 특별전’의 제목이다. 한 단어가 더 있다면 ‘가르치다’일 거다. 선생님은 쉼 없이 읽고, 쓰고, 가르치셨다. 가끔 불러 밥을 사주셨는데, 생각해보면 그런 때가 잠시 쉬는 시간이셨던 것 같다. 늘 같은 말씀이셨다. “자, 다 먹었으면 일어나는 거지.” 평생의 화두였던 한국근대문학. 거기서 그 괴물 같은 ‘근대’의 윤곽이나마 파악하는 데 별도로 16년의 공부가 필요했다고 술회하셨으니, 한눈파는 시간이란 애초에 있을 수 없었다. 월평을 쓰려면 한 작품을 최소한 세 번은 읽어야 한다고도 하셨다. 하루 20매 분량의 글쓰기는 평생을 일관한 선생님의 생의 기율이자 리듬 감각이었다.
“하루 70매를 쓸 때는 사흘을 앓았고, 하루 3매밖에 쓰지 못할 때도 사흘을 앓았소. 이렇게 해서 20매 분량이 나의 리듬 감각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근자에 들어선 하루치 분량이 조금 줄었다고 하셨을 뿐, 매일의 글쓰기는 한결같은 삶의 질서였다. 오른손 중지의 뭉툭한 굳은살을 몰래 엿본 적이 있다. 퇴임 후에는 몇 번 출판사의 자투리 종이로 원고지를 인쇄해서 가져다 드리기도 했다. 선생님이 주신 견본은 학교에 계실 때 쓰시던 옅은 하늘색 원고지였다. 매번 많다고 꾸짖으셨지만 삼 년 정도면 소진되었던 것 같다. 인쇄비라며 늘 한참 넘치는 비용을 주셨다. 원고지를 구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우셨겠는가. 가난한 출판사를 헤아리셨던 마음을 뒤늦게 아둔하게 더듬어본다.
막막할 때면 그냥 선생님의 글을 읽고 또 읽었다. 거기엔 언제나 혼신의 생각과 글쓰기가 있었다. 내게는 그게 문학이었고, 세상의 척도였고, 어쩌면 전부였다고 이제 말해도 되려나. 선생님의 글에서 역사와 시대의 숲을 헤치고 들어가야 겨우 만져지는 문학작품은 고독의 산물이되 휘황한 정신의 높이로 우리를 위로하고 있었는데, 사실 선생님의 글쓰기야말로 그러하다는 걸 조금씩 알아차리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한국근대문학 연구, 현장 비평, 작가 평전, 예술기행, 자전적 글쓰기가 다 하나의 운명, 하나의 길 위에 서 있는 선재동자의 외로운 길 떠나기라는 걸 아주 조금이나마 느끼고 엿볼 수 있었던 것은 또 언제부터였을까.
문학은 누구를, 무언가를 탓하는 일이 아니었다. 비평은 조심스럽고 특별한 공감과 칭찬의 기술이어야 했다. 선생님의 삶이 그러하셨다. 그것이 역사와 인간에 대한 경외와 겸허의 마음임을 나는 아주 늦게서야 조금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문학은 그때 인간의 위엄, 고독, 진실과 관련된 최량의 노력이자 표현일 수 있었다. 정년퇴임 강연 때의 말씀이 기억난다. “감추어진 힘이란 무엇일까요. 연구자로, 비평가로 제가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성실했다면 그것은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남아서 힘이 되어 시방 저녁놀 빛으로, 몽매함에 놓인 제게 되돌아오고 있지 않겠는가. 제가 그토록 갈망하는 표현자의 세계로 나아가게끔 힘이 되어 밀어주고 있지 않겠는가. 여기까지 이르면 저는 말해야 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다행이었다고. 문학을 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그 문학은 병자년 윤삼월 정오에 나라 잃은 땅에서 태어난 선생님의 시대적 역사적 충실성의 길이었지만, 또한 그 문학은 강변 포플러 숲에서 자라며 누님의 교과서에서 처음 엿본 세계, 붕어와 까마귀를 속이고서야 가능했던 잿빛 공부와 고독한 글쓰기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도 같다. 선생님의 글이 울림으로 가득하고, 선생님의 글을 읽는 시간이 온통 울림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일 테다. 거기서 언뜻언뜻 회한을 엿보았다면 불경한 이야기가 될까. 선생님의 그 철저함은 인간의 약함, “나비 한 마리도 감당 못하는 거미줄의 섬세함”의 다른 표현은 아니었을까. 감히 말하고 싶다. 나는 선생님과 선생님의 글에서, 선생님의 문학에서 인간을, 인간의 도리를 배웠다고. 인간의 슬픔과 존엄을 배웠다고. 인간의 고독을 배웠다고.
그러고도 선생님은 연전에 어느 책에서 쓰셨다. “나의 길동무여, 소금기둥이 되기 전에 떠나라. 언젠가 군이 그릴 그림들을 내가 보지 못할지라도 섭섭해 마라. 군의 그림은 군만의 것. 그게 그림의 존재 방식인 것을. 자 이제 지체 없이 떠나라. 나의 손오공이여, 문수보살이여. 혼자서 가라. 더 멀리 더 넓게.”(<내가 읽고 만난 일본> 머리말) 선생님, 이제 편안히 쉬세요.
정홍수 문학평론가(강출판사 대표)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67673.html#csidx48cba1b6947c3d9bfe92578815490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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