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9일부터 2018인문주간이 시작된다. 한국연구재단이 중심이 되어 전국에서 인문학 대중화의 축제가 벌어진다. 꼭 필요한 일이다. 나는 이번 주에는 베이징에서 개최되는 한·중인문학포럼, 다음 주에는 부산에서 열리는 세계인문학포럼에 참가해야 한다.
그런데 기쁨 반, 슬픔 반이다. 한·중포럼은 한·중 정상 간 합의체였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면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재작년 국정농단 사건 때문에 최고 권력자의 이름도 말하지 못하고 ‘양국 정상’ 운운하던 창피함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인문학이 권력의 산물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한·중 간에 ‘전전긍긍’ 토의되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데, ‘희희낙락’하는 것만 같아 부끄럽다. 세계포럼도 그렇다. 외국 석학들을 모시는 잔치인 것 같아 나서지 않았는데 나도 어쩔 수 없이 발을 담그게 되었다. 그런데 주제가 너무 아름답다. 우리 인문학이 다뤄야 할 게 ‘통일’도 있고 ‘평등’도 있고 ‘학살’도 있는데, 이것들과 거리가 멀다. 내가 지나치게 이념적인가? 아니다. 이 모두 우리의 역사다. 그냥 덮는 게 아니라 ‘치유’와 ‘화해’를 지향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요즘 인문학의 유행을 보면 나로서는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인문학은 유행할 뿐 연구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젊은이들은 더 이상 인문학을 공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인문학이 뒷전으로 밀린 지는 오래되었고 날이 갈수록 형편없어지고 있어 너무 슬프다. 젊은이들은 이런 시류를 읽는다. 자리 잡을 데 없는 인문학, 몇몇 스타의 인문학, 학문과 엔터테인먼트가 구별되지 않는 인문학 속에서 청년학인들은 절망한다. 자본주의에 휘둘리는, 겉은 있고 속이 없는 인문학이 범람한다.
인문학은 살고 인문학자는 죽어가고 있다. 인문학을 지탱할 인문학자를 키울 요량은 없다. 껍데기 인문학이다. 그저 만족하거나 과시하는 ‘허영의 인문학’, 청년은 사라지고 노인들만 붐비는 ‘은퇴의 인문학’, 인문학에 대한 장기투자는 없고 산만한 무료 강연만 난무하는 ‘일회용 인문학’이다.
2016년에 시작한 대학인문역량강화사업(CORE)이 있다. 한국연구재단 관계자와 연 1200억원의 예산을 목표로 뛰었으나 400억원으로 깎였다가 기획재정부에서 600억원으로 낙착되었다. 덕분에 전국적으로 학, 석사연계과정도 활성화되고 대학원생도 늘었다. 그러나 3년으로 끝난다. 명분은 통합해서 지원하겠다는 것인데(BK), 이공계에 밀릴 것이 뻔하다. 정부를 믿고 공부를 시작한 학생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리프킨이 ‘노동이 권리’라고 이야기한 게 1996년이다. 20여년이 지난 오늘, ‘고용 없는 성장’ 속에서 젊은이들은 아예 ‘노동 안 할 권리’를 말하고 있다. 기계가 모든 것을 대체하는 현실에서 자신들이 살 방도를 찾는다. ‘노동하는 동물’이 아닌 ‘유희하는 동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 놀이, 어디서 오겠는가? 인문학, 나아가 그를 밑바탕으로 하는 그 무엇에서 온다. 그 무엇이란 삶의 주인 되기, 공유라는 가치, 개별성과 순수함의 고양, 국가보다는 정치의 복원, 컴퓨터가 할 수 없는 것 하기다.
인문학을 장기적으로 생산하기 위해서 국가의 지원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철학과가 잘나가는 어느 국립대 교수를 모셔다 그 까닭을 들어보았는데, 결국은 돈이었다. 어떤 교수 말처럼 이제는 ‘강한 노병’의 시대는 접어버리고, 연약하더라도 부단하게 삶의 가치를 탐구하는 젊은 병사들이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인문학은 기계의 길이 아닌 인간의 길을 가게 하는 유일한 출구다.
4차산업 시대에 사람이 할 일이 사라지고 있다. 연금생활자가 쏟아져 나오고 20, 30대들은 직업 없이 살아야 한다. 그들 모두를 살아가게 할, 하루하루가 뜻있고 즐겁게 만들 방책은, 등산 말고는 아무래도 인문학밖에는 없는 것 같다. 등산 가방에 꽂혀 있을 한 권의 책, 상상만 해도 좋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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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10212056005&code=990303#csidxafad3a08a55a3ef9364e52bfa24c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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