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따 저 사람들은 예술 하잖여."
"그럼 우리도 예술 한 번 해 볼 쳐?"
나이 지긋한 할머니 셋이 책방 '세간' 앞을 지나며 두런거렸다. 책방 자체가 낯선 것은 아니지만 시골의 한적한 거리에 들어선 책방을 기이하게 바라보는 눈치였다.
▲ 책방 세간 부여군 규암면에 자리잡은 작은 책방. 예전에는 담배가게였다 | |
ⓒ 정덕재 |
충남 부여군 규암면, 쇠락한 여느 시골거리와 다르지 않은 곳에 젊은 예술가들이 심상치 않은 행보를 보이고 있다. 전통공예를 비롯해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을 하는 이들이 수년 전부터 허름한 가게를 하나둘 매입했다. 어느 덧 20여 군데. 한때 번성한 적이 있었지만 농촌을 떠나는 이들이 늘어가면서 동네는 더욱 스산해졌다.
상권이랄 것도 없이 허름한 상황에 처한 거리에 '흑기사'처럼 등장한 사람들은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이 인적이 드문 오래된 거리를 찾은 이유 중에 하나는 문화예술을 통해 거리를 활성화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중에 하나가 책방 '세간'이다. 이들이 매입한 가게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로컬푸드를 중심으로 요리를 하는 음식점, 전통공예, 전통염색 등 각자의 솜씨를 바탕으로 농촌의 거리를 살려나갈 따뜻한 꿈을 갖고 있다.
소문이 조금씩 나기 시작하면서 시골 작은 책방을 찾는 이들도 하나둘 늘고 있다. 한때 담배가게였던 책방의 변신. 여기에서 벌어질 일을 상상만 해도 즐겁다. 아니, 상상 이상일지도 모른다.
▲ 책방 세간 내부 옛날 가게 모습을 크게 바꾸지 않은채 리모델링 한 책방 세간 | |
ⓒ 정덕재 |
책방 '세간'
"뭐? 그게 미술책여?"
"허허, 이 사람 무식한 소리 하고 있구먼, 색깔만 들어가면 다 미술책이랴. 그럼 최인훈의 소설 <회색인>은 회색분자 미술인이고, 파묵이 쓴 <하얀 성>은 흰색 좋아하는 미술인이 사는 성인감?"
"내 파닭은 들어봤는디 파묵은 또 뭐여?"
"파닭보다는 차라리 도토리묵이라고 하지 그려, 파묵이라고 노벨문학상도 받은 많은 유명한 양반여."
"그렇구먼, 그려두 내가 아무리 몰라도 면박을 그렇게 주는 사람이 어딨댜. 근디 <녹색평론>이 뭔 책인디?"
"나두 잘은 모르는디 농사짓는 얘기도 나오고 전쟁하지 말자는 얘기도 나오고 생태 뭐 거시기헌 얘기들도 많이 나오는 책여."
"그러면 우리도 책방가서 진한 커피 한잔 찌그리면서 평론 한 번 해볼껴?"
논둑에 훌쩍 자란 풀을 깎고 난 뒤 한숨을 돌리던 이장 김씨와 60년 지기 박씨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2시간 넘게 풀을 깎은 터라 등줄기는 땀에 흥건히 젖었다. 집에 들렀다 갈까도 싶었지만 시원한 커피 한 잔 생각에 예초기만 트럭에 싣고 책방 세간으로 향했다. 그들은 책방 앞에서 신발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들어갔다.
"이장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내 지난 주도 왔었는디."
"아, 그러세요. 제가 없을 때 오셨나보네요."
"그나저나 책방 선생은 갈수록 이뻐져."
"이장님, 요즘 책을 많이 보셔서 그런지 농담도 많이 늘었슈."
"책방 선생도 사투리가 많이 늘었슈."
'책방 선생'이라 불리는 여성은 인근에 있는 대학에서 사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책방 곳곳에는 전문가의 손길이 배어 있다.
이장과 박씨가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을 꼼꼼하게 보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하거나 갸우뚱하는 모습은 반복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 책방에 붙어있는 방 한쪽에서 커피향이 흘러나왔다.
쉼터와 나눔터
내가 책방 '세간'을 처음 찾은 것은 지난 여름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가량 농막이 있는 부여 은산에 가지만 정작 옆 동네 규암면 소식은 어두웠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들이 별다른 소문을 내지 않고 책방을 준비한 이유는 그동안 호들갑스럽게 할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방이 문을 열고 인근의 가게들도 개업 준비를 하면서 서서히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지난 9월에는 책방 마당에서 처음으로 작은 프리마켓이 열렸다. 스카프와 그릇 등 그들이 직접 만든 소품들을 내놓기는 했지만 상업적으로 팔 목적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알리려는 눈치였다. 김밥과 떡볶이 간단한 안주와 소곡주는 동네 사람들을 모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예술하는 사람이라 차림새도 다르다고 말한 할머니 일행이 책방 문을 넘어선 건 프리마켓이 열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여기있는 송정리 그림책이 저기 양화 송정리를 말하는 겨?"
"그렇댜, 거기 할마시들이 이런 그림을 그리고 책 까장 냈는지 몰랐네."
"참 신통방통하네, 늙은이들이 떡 하니 책도 내고."
"동네 사람 여럿이 만들었다고 허던디."
▲ 벽안에 책장 예전 시골집에는 벽장이 있었다. 벽장을 책장으로 바꾼 모습이 귀엽다. 책방 세간에는 커피와 간단한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 |
ⓒ 정덕재 |
부여군 양화면 송정마을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은 전국적으로 화제가 됐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러 권의 책으로 나오고 책에 담긴 내용들이 서울 인사동 갤러리에서 전시가 됐다. 마을에는 그림책 마을 찻집도 생겨 화제의 이야기를 찾아오는 이들도 늘고 있다고 한다.
같은 또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직접 펴낸 책이 책방 세간의 진열대에 올라와 있는 걸 보고 동네 사람들은 마냥 신기했다.
"우리도 책 한번 내볼 쳐?"
"글도 지대로 못쓰면서 책은 무슨 언감생심여?"
"내가 맞춤법은 자주 틀려두 글씨 하나는 잘 쓴다니깨."
"글씨 틀리게 쓰면 챙피헐 텐디 책을 어치게 낸댜?"
"글씨도 글씨지만 뭐 쓸 내용이 있간디?"
"내용이야 열 권도 더 나오지, 비 오는 날 소나기 내려서 빨래 걷는디 논둑에 매놓은 소가 도망가지, 소 잡으러 가다가 지게 다리에 발이 걸려 지게 넘어지지, 이런 얘기만 해두 책 열장은 나오겄네."
"그렇게 말할 것 같으면 내가 팔남매 키운 얘기는 8권도 더 나오겄네."
책방에 진열된 책 한 권을 놓고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인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온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기 시작하더니, 설탕 듬뿍 넣은 커피 한 잔 달라면서 방으로 올라갔다. 커피 한잔을 마시며 족히 3시간 이상은 수다가 이어질 기세였다.
책방에서 책만 팔던 시절은 지나가고 있다. 지역에 따라 책방은 쉼터이자 나눔터이고 서로를 끈끈하게 만드는 하나의 네트워크가 되고 있다. 때로는 새로운 스토리를 무한생산하는 플랫폼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올 하반기 그리고 내년 쯤 책방 '세간'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다양한 가게들이 문을 열면, 우리는 문화의 힘으로 끌어당기는 발길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발길이 북적거리면 더욱 좋고, 끊일 듯 끊이지 않은 고요한 발자국이어도 좋을 것이다. 시골 책방의 분주함은 새로운 즐거움이고 고요함은 익숙한 기다림이기 때문이다. 규암면 자온로 82번지, 허름한 거리에 있는 책방 '세간'에 가면 세간의 이야기가 웅성거릴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대전에서 발행하는 잡지 '토마토' 10월호 실렸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80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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