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신입생이던 1982년 어느 가을날, 당신의 강의를 들으며 제 인생의 윤곽은 운명과도 같이 결정되었지요. `대학 수업이란 정녕 이런 것이구나`를 직접 느끼게 만들었던 그 가슴 설레던 시간, 그토록 매력적이며 열정적인 강의를 아직도 또렷이 기억합니다.
제 인생과 학문의 영원한 스승 김윤식 선생님, 당신과 한 시대를 함께할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당신의 글, 삶, 말, 책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습니다. 평생 동안 어떤 파벌이나 조직에도 속하지 않고 고독하게 자신만의 성채를 쌓아 올리신 선생님의 그 운명적인 외로움과 깊은 허무를 사랑합니다. 그 환각에 대한 동경까지도 존중합니다.
1985년 4학년 비평론 수업 때 갑자기 해 주셨던 말씀이 아직도 선연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책을 읽었고, 각계의 숱한 전문가도 만나 보았다. 방학마다 늘 외국을 비롯해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많은 것을 느꼈다. 그런데도 내일 결정해야 할 사소한 고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여러분,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당대 최고의 석학 중 한 분이 토로하는 이 발언을 통해 저는 겸허한 지성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었답니다. 머리보다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라는 선생님의 조언을 뼛속 깊이 새기겠습니다.
당신과 함께한 아주 일상적이며 사소한 장면까지도 너무나 그립습니다. 고서로 둘러싸인 선생님의 고적한 연구실에서 꾸중을 듣던 그 아픈 순간까지도 제 마음에 깊이 박혀 있습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던 동부이촌동 서재, 그 책의 숲에서 열정적으로 문학과 시대, 인간에 대해 설파하시던 선생님의 정정한 목소리를 떠올려 봅니다.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 비평문단과 국문학계, 아니 당신이 없는 이 세계 자체를 저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당신으로 인해 이 땅의 비평과 근대문학 연구는 아연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답니다.
당신은 20대 중반부터 `노예선의 벤허`와 같은 운명을 응시하며 "죽음 이외의 휴식은 없는" 바로 그런 삶을 살아 왔습니다. 이제 저 밤하늘의 별이 된 당신께서 영원히 평안한 `휴식`을 취하시기를 마음 깊이 바랍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공부만 하지 마시고, 책만 읽지 마시고, 소설가 최인훈, 비평가 김현 선생님과 함께 편하고 즐거운 시간을 맘껏 향유하시기를 염원합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인해 한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선생님의 안식과 평안을 기원합니다. 늘 부족한 당신의 영원한 제자 권성우 삼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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