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가에서 사냥꾼을 대표하는 인물로 석공 혜장 선사를 꼽는 모양이다. 어느 날 혜장이 사냥을 하던 중 마조 선사를 만나 그의 법문을 듣고 활과 화살을 버리고 출가하였고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하지만 산중에 있어도 본성을 마저 버리지 못해 소리를 지르며 활 시위를 당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세상 어느 곳이나 호적수가 있게 마련이다. 삼평이라는 이가 가슴을 풀어헤지며 "자, 쏠 테면 쏘아보라"고 하였다. 그때 석공 혜장은 활을 버렸다 한다. 삼평은 물었다.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활인전'입니까? 아니면 사람을 죽이는 '살인전'입니까? 여기서 '전'이라는 화살 전을 말한다. 말도 되지 않는 행동을 버리고 진짜배기를 드러내보이라는 말이다. 살인전은 살인검이다.
불가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놀라운 것은, 왜 이러한 교육 방법이나 사람을 보는 눈은 전승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뿐만 아니다. 왜 이런 교육 방법은 근대교육에 전혀 접목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불가에서는 사람을 '법기'(법의 그릇)으로 본다. 아무리 촌놈, 무지랭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막무가내로 보지 않는다. 그 그릇으로 본다. 그것도 글을 아느냐 글을 모르느냐가 아니라 깨칠 놈이냐 아니냐로 본다. 물론 모든 사람이 깨칠 수 있다는 전제가 밑바탕에 놓여 있다.
<육조단경>은 그냥 문헌이 아니다. 근대교육의 말도 안되는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인간상보다 <육조단경>이 만들어놓은 인간상이 더 위대한 것 아닌가? 나는 오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육조 혜능이 오조 홍인에게서 가사와 발우를 전수 받게 되는 이야기는 신화이자 전설이고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사와 발우란 것이 뭐 별거인가? 아닐 것이다. 그에게 전승된 법통이란 것도 별거 아닐 것이다.(이런 이야기를 하면 머리 깎은 스님들께서 들고 일어날지도 모르겠지만.)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그놈 사람 됐다"는 이야기일 거다. '사람되기'가 얼마나 힘든가. 하지만 육조 혜능은 쓸데없는 글을 읽은 바 없기에 오히려 '사람 그릇'이, 근기가 깊었던 것일 터이다.
최근 내 마음은 천근만근 무겁다. 용산참사나 쌍용자동차 파업현장에서 무지막지한 경찰들의 '활약'을 보면서 도대체 이런 무장력으로 현실화하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이놈의 교육이라던가, 정책이라던가, 또 제도라던가, 법이란던가 하는 것이 도대체 뭐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인간말종'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지금 '인간말종'을 키워내고 있고, 그런 '인간말종'들끼리 히히덕거리면서 돈 몇 푼에 웃음을 지으며 사람 흉내를 내고 있다. 끔찍한 일이다. 탄압과 진압의 현장을 보거나, 듣거나, 그 어떤 방식으로 보고를 받았을 '인간'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나도 사람이요"라고 뻣뻣하게 말을 한다. 잘난 체한다. 정말 잘 났다.
그러고 보면, 나도 헛살았다. 목숨을 부지하느라고 세상이 이렇게까지 낭떠러지에 와 있는 것을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이니까. 글을 읽고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게 부끄럽고 또 부끄러울 뿐이다.
'선문답'이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오늘 문득 든다. 그냥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그것도 진짜배기로 살고 싶었던 인간들의 이야기다. 나도 정말 살고 싶다.
--원철 지음, <할로 죽이고 방으로 살리고>, 호미, 2009년 8월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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